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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습격(2)
한밤중의 도시연합 북부 대로.
짙게 드리운 밤하늘의 먹구름은 달빛은 물론 별빛마저도 대부분 가리고 있었다.
다만 달과 별의 도움 없이도 대로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길을 중심으로 듬성듬성 자리 잡은 피난민들이, 제각기 모닥불을 피워올린 채 야영지를 꾸려두었기 때문.
그들은 갑작스럽게 닥친 전란의 소식에, 다급하게 짐을 싸 들고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댈런과 일행은 야영지들 사이를 가로질러, 대로를 따라 쉴 새 없이 남쪽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거의 일 년 만에 밟은 도시연합의 영토는 떠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전의 시끌벅적하던 활기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 대신 공기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건 전쟁의 혼란과 날 선 경계심뿐.
“으이? 누구야!”
“다들 일어나! 외부인이다!”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지나칠 때마다 피난민들이 부산스레 일어나고, 조악한 활이며 장창 따위를 꼬나쥔 채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드는 모습은 그 단면이었다.
물론 경계심만큼이나 두려움도 많은 피난민들에게, 야영지를 지나치는 기수들을 직접적으로 해코지할 용기가 있을 리는 만무한 법.
그걸 잘 알고 있는 댈런 일행 역시, 그들이 무기를 들건 말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엇보다 급한 건 공성전이 벌써 사흘째에 접어들었다는 팔시온의 남부 지구이었으니까.
아군을 적시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도시연합의 북부를 종단해 라이칸트 강을 넘어가야 했다.
“전황은 어떻소.”
말없이 고삐를 쥐고 달리던 댈런이 입을 열었다. 어깨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까악 하고 울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깍― 크흠! 이거 생각보다 불편하군요.”
“······.”
“대부분의 시민들을 남부 지구의 성벽 인접 구역에서 대피시켰고, 손상된 성벽이나 탑 역시 엘가이아 마탑과 샤니아 필로폰의 마법으로 빠르게 보수중입니다.”
“다행이군.”
부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시에나나 루시아의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이쪽과 계속 교신하기에는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
주문과 마녀의 힘으로 공성전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시에나는 까마귀 둥지의 정보망을 총동원해 제국 본토의 동향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루시아는 미궁도시에 있는 성기사단 지부의 병력을 이끌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성벽 바깥에서 타격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고.
애초에 몸이 여러 개라도 부족할 만큼 급박하게 돌아가는 곳이 전장 한복판. 이쪽 일행과 소통할 만한 위치의 사람들은 다들 상황이 비슷했다.
그럼에도 팔시온의 입장에서 댈런이라는 카드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
결국 문자 그대로 몸이 수십 개인 사람이 소통을 맡게 된 것이었다.
“까악― 물론 낙관적인 건 아닙니다. 사흘에 걸쳐 적 병력의 양과 질은 모두 급격하게 상승하는 중이니까요. 오늘 저녁에는 아인종 노예병도 모자라 만신전의 광전사들까지 보일 정도였습니다.”
푸른 눈의 까마귀를 통해, 에버론 라크텔라가 말했다.
금강궁의 스물여섯 초월자 중 하나이자, 그들 중에서도 특히나 외부 활동이 잦은 에버론.
천변만화의 얼굴이라는 이명을 지닌 그가, 수십 개의 육신을 동시에 다루며 대륙 전역에 정보망을 펼쳐두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물론 덩굴의 마녀와 싸울 당시 영역을 개방하고, 육신 중 상당수를 불러들인 끝에 절반 가까이가 소실되긴 했었다.
다만 그로부터 일 년가량이 지났으니, 에버론의 능력이라면 손실을 상당 부분 메꾸고도 남았겠지.
“만신전의 광전사들이라···까다로운 상대긴 하겠군. 하지만 청동 성벽을 넘볼 정도는 아닌데.”
“맞습니다. 미궁도시의 위상이 고작 광신도들 따위에 함락될 리는 없죠.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제국 놈들의 본대는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확신에 찬 목소리에 댈런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현시점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 수집가인 시에나조차, 아직 제국의 동향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금강궁의 초월자들이 하나같이 비범한 존재들인 건 맞지만, 지금처럼 급변하는 제국의 동태를 한눈에 읽어낼 정도는 아닐 텐데.
댈런의 의문에 까마귀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저희 초월자들이 결계책률이라는 제약이 묶여있다는 사실을 한 번 말씀드린 적 있었죠.”
“그렇소.”
결계책률(結界責律).
천 년도 넘는 까마득한 역사 저편, 미궁도시가 설립되었던 시절부터 내려온다는 강력한 술식적 제약.
단순히 밸런스를 위한 게임적 장치로만 생각했던 책률은, 알고 보니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미궁의 마물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었지.”
“맞습니다. 팔시온이 세워진 곳은 대륙의 정중앙부. 원래는 미궁과 이어지는 가장 큰 구멍이 있던 장소였죠.”
까마귀가 부리를 딱딱거렸다.
“수천 년 전 고대의 대전쟁에서도, 가장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던 전장은 세 곳이었습니다.”
머나먼 북부의 서리고원 너머.
성기사단 본단이 지키고 있는 균열.
그리고 팔시온이 자리 잡은 미궁의 입구.
악신들의 패퇴로 대전쟁이 막을 내린 이후에도, 미궁에서는 마물들이 주기적으로 올라오곤 했다.
미궁도시의 초대 설립자들은 그걸 막기 위해서 거대한 결계탑을 세우고, 그 결계탑을 유지하기 위해 도시까지 설립한 것.
“결계탑의 힘은 미궁 전체를 망라하는 광범위한 공능입니다. 스물여섯 전당의 초월자들은 언제나 이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쏟아붓고 있죠. 하지만 저희 역시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결계책률이라는 대규모 술식제약을 걸고 스스로를 속박한다는 이야기지. 알고 있소.”
“···맞습니다. 종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일수록 인간의 상리를 벗어나기 쉬워지는 법이죠. 깍.”
에버론은 연신 부리를 씰룩거렸다. 까마귀의 구강 구조가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이번 제국의 선전 포고 이후, 스물여섯의 초월자 중 열둘이 제약에서 풀려났습니다.”
“열둘?”
“미궁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마물과 악마들보다도, 도시의 안위를 향한 외부의 위협이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제국이 칼을 갈았다는 이야기겠죠.”
열둘이라. 그거 쑴의 악마 군세가 차르국 박살내고 내려왔을 때나 나오던 숫자인데.
지금 미궁도시를 향하고 있는 제국의 창끝이, 적어도 악신의 화신체가 이끄는 악마 군대쯤은 된다는 이야기였다.
대륙에서 가장 드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제국이지만, 그 정도 위협을 행사하는 건 수백에 달하는 회차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만신전의 성전 선포라고 해도···아예 뒤가 없이 달려들기로 작정한 건가.’
제국의 국교, 만신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신의 이름을 붙이고, 화합과 포용을 추구하는 제국의 국교.
화합과 포용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전을 선포하는 건 상당히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만신전의 뒤에 도사리는 존재가 누구인지 아는 댈런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예 그 비밀 자체를 드러낼 생각인가.
그건 천 년 동안 세간에 꽁꽁 감춰온 진실을 드러내서라도, 대륙의 판도를 한 번 크게 뒤흔들고 싶다는 의지겠지.
“생각보다 싸움판이 커지겠군.”
댈런은 고삐를 가볍게 당기며 말의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어깨에 앉은 까마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심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제국이 당신의 명성을 듣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꾸준히 행보를 추적하고 있을 테니, 저희 쪽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따로 행동에 나서도 이상하지 않···.”
“그 행동이라는 거.”
“······.”
“아무래도 이미 나선 듯한데.”
다그닥. 다그닥.
고삐를 조금 더 당기자 말이 완전하게 멈춰 선다. 적막한 대로 한복판은 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댈런은 그 어둠을 뚱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다 보이니까 그만 나오지.”
***
진작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다.
대로변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던 난민들의 야영지가, 어느 순간 뜸해지더니 아예 사라져 버렸으니까.
거기다 대로를 덮은 어둠 역시 이질적으로 짙었다. 아무리 별과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해도 이상할 정도로.
물론 그런 이질감이 아니었더라도, 술식적인 환상은 파영의 마안에 포착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때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뛰어난 전사일 뿐 아니라 수준급의 술사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군.”
치지지지지···.
대로 위쪽 시계가 일그러지더니, 이내 종이처럼 이리저리 구겨지기 시작한다.
공간을 덮고 있던 장막이 흩어지고, 그 너머에서 나타난 건 대로와 그 주변을 완벽하게 점거한 군대였다.
눈대중으로 어림잡아도 천에 가까운 일단의 무리. 8할 정도는 단단한 갑주와 무기로 무장한 이들이었고, 나머지는 로브를 뒤집어쓴 채 뒤쪽으로 빠져 있었다.
어둠 뒤에 숨겨져 있던 횃불들의 이글거림은 눈이 아릴 정도였다. 수많은 날붙이와 판금 갑주가 그 불꽃을 머금고 불길하게 번쩍였다.
댈런은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몇 걸음 앞으로 나선 그가 말했다.
“이거 그냥 군대인데. 차라리 이 병력을 도시에 꼬라박지, 왜?”
“결계책률이 해제되었다 한들, 금강궁의 겁쟁이들은 도시 밖으로 멀리 나가지 않지. 혹여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기라도 할까 걱정하면서.”
말을 탄 선두의 기사가 대답했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 겁쟁이 중 한 명이 어깨 위에서 다 듣고 있는데. 슬쩍 돌아보니 역시나 까마귀의 푸른 눈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오히려 어디든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귀공이 문제였소. 도시로 합류하면 우리의 성전에 차질을 빚을 것이고, 어쩌면 우리 국경을 넘어와서까지 난리를 피울지도 모르니까.”
“나만 없으면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군.”
“당연하지. 우리라고 아무 생각 없이 미궁도시에 성전을 선포했을까?”
기사가 웃었다. 거친 목소리가 투구 안에서 둔탁하게 메아리쳤다.
“순은과 황금 성벽은 높고 단단하기로 유명하지. 허나 청동 성벽은 그렇지 않소. 초월자들 사이의 전투는 필히 성벽을 무너뜨릴 것이고, 그 틈바구니에 병력을 밀어 넣으면 청동 구역의 기반시설들은 모두 파괴될 터.”
스릉···.
말 위의 기사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한쪽 날이 톱날처럼 우둘투둘하게 각져 있는 검이었다.
“먹을 게 떨어지면 수백만의 도시가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오. 모래사장 위에 아무리 높게 성을 쌓아 올려봐야, 오히려 작은 파도에도 우르르 무너지기 쉬워질 뿐.”
“글쎄다. 미궁도시의 설립자들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은데.”
“귀공도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도시라는 허언을 믿는 건가.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한 번 지켜보시오. 저 거대한 도시가 어떻게 몰락해가는지.”
기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장전된 쇠뇌를 조준했다.
“물론 죽은 뒤에 지옥에서 올려다보는 걸로 하지. 이단은 천당에 가지 못하니까.”
파아아앗!
말을 끝맺자마자 군대의 후방에서 터져 나오는 맑은 정광.
사제들의 나직한 기도 소리가 화음이 되어 제국군을 뒤덮고, 화살이 장전된 쇠뇌 위로 신성력을 아지랑이처럼 피워올린다.
쉬이이익―!
화살비는 예고도 없이 쏟아졌다.
어두운 밤하늘을 백수십의 빛줄기가 가르고, 마물이라도 단숨에 꿰어 죽일 기세로 화망을 형성한다.
그 끝에서 허리춤에 손을 얹은 댈런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말할 뿐이었다.
“무너지지 않는 도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직한 웃음.
그 웃음에 대로 위로 침묵이 내려앉는다.
막지도, 튕겨내지도, 피하거나 주문을 시전하지도 않았다.
허나 쏘아진 백수십의 화살들은, 전사를 중심으로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듯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도 아니지.”
수백 번이나 도시가 무너지는 걸 봐왔다.
일곱 성벽이 차례대로 무너지고, 대륙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끔찍한 광경을.
황폐화된 대륙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최후의 보루도,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하지만 지금처럼 건재한 도시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싶다면 말이다.”
허공에 맺힌 화살이 조용히 돌아갔다.
댈런과 일행을 향하던 화살촉은, 어느새 쇠뇌를 든 사수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적어도 만신이 아니라 그 뒤에 도사리는 놈이 직접 와야 하지 않겠냐.”
투구 틈으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의 눈동자에 경악이 서리고.
“엑시.”
짧은 시동어가 대로 위에 울려 퍼진 순간, 화살비가 방향을 바꿔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