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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습격(3)
쐐애애애―!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가르고 화살이 빗발친다.
“어, 어어!”
“화살이 돌아오···커억!”
퍼버버버벅!
발사될 때의 배 이상 되는 속도로 돌아가, 주인의 갑옷을 뚫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화살들.
번쩍이는 갑옷 사이로 선혈이 흩뿌려지고, 비명과 함께 선두의 대형이 우르르 무너졌다.
병사들의 비틀거림을 따라 어지럽게 춤추는 횃불들.
그 붉은 이글거림 사이로, 전사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파고들었다.
콰직!
내려찍은 손도끼가 투구를 가르고 틀어박힌다. 댈런은 좀 더 힘을 줬다.
우드득 찢겨나가는 갑주와 그 안쪽의 몸뚱이. 가슴께에서 방향을 틀어 옆으로 빠져나온 도끼가 곁에서 주춤거리던 병사의 목을 쳤다.
“커···!”
투구 쓴 머리가 빙글 하늘을 날았다. 잘려 나간 머리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댈런은 한 걸음 성큼 내디디며 붕 뜬 머리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의 도끼가 다시 밤공기를 갈랐다.
스각!
허무하게 툭 떨어지는 팔. 비명을 채 뱉기도 전에 머리가 그 뒤를 따라 추락한다.
목덜미를 노리는 검은 도끼날을 걸어 걷어내고, 악귀처럼 소리치는 병사의 얼굴에 가볍게 주먹을 먹여준다.
자루로 찍고 어깨로 부딪힌다.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넘어진 머리를 걷어차 목을 부러뜨리며 전진한다.
화살이 거꾸로 돌아온 혼란을 틈타, 적진으로 파고든 댈런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었다.
스스럼없이 적들의 종심을 돌파해, 진형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모습.
굳이 이곳에서 적들을 궤멸시키려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대충 압도적인 공포심을 느끼게 만들어 길만 뚫어낸 뒤, 일행과 함께 팔시온으로 달려가는 게 옳은 판단.
도시가 사흘째 공격받는 상황에서 힘과 시간을 낭비해봤자, 오히려 적들의 노림수대로 행동하는 꼴이 된다.
“끄아아악!”
앞길을 막아서던 병사 열댓 명이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지고.
콰득!
주먹질로 병사의 가슴팍을 흉갑째 함몰시킨 순간, 허리 아래쪽을 노리고 날카로운 살기가 흘러든다.
쩌어어엉!
도끼를 들어 가로막았음에도 조금 밀려난다.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니라, 검을 두른 검기의 파괴력이었다.
“······!”
이렇게 간단하게 막아낼 줄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다른 병사들 사이로 몸을 숨기려는 남자.
가볍게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 그걸 따라잡는다. 본능적으로 찔러오는 검끝을 쳐낸 뒤, 왼손을 뻗어 투구를 움켜쥐었다.
으지직!
“끄허···!”
조금 저항하는 듯하더니 으스러지는 투구.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장장이의 시체를 회수하며 무려 60에 도달한 근력 수치다.
일반적인 판금 갑주라면 그의 손아귀 힘을 잠시라도 견디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흑철 갑주인가.”
어둠 속에서 으스러진 투구의 단면만을 보고도 자연스럽게 그 재질이 머릿속에 연상된다.
대장장이가 남긴 야금술은 용골까지도 다룰 수 있는 만큼, 다른 재료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심도 깊은 지식을 주입해주었다.
“···거기에 마법검까지.”
남자의 손에서 떨어지는 검을, 자연스레 발끝으로 올려 차 손에 안착시킨다.
겉보기에 평범하게 생긴 검에는 상당한 수준의 풍계 술식이 내장되어 있었다.
댈런의 도끼가 순간적으로나마 밀렸던 게, 검을 두른 검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셈.
외견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흑철 갑주를 걸치고, 마법검과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집단.
댈런은 그런 집단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병사들 사이에 숨어서 들어온 건가? 새벽 기사단.”
“···감이 좋군.”
달려드는 병사들 사이로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든다. 댈런은 찔러오는 창을 부러뜨려 거꾸로 박아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병사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는 분명 외견상으로는 평범한 병사처럼 보였으나, 기세를 감추기를 포기했는지 그 존재감만큼은 누구보다 선명했으니까.
검을 들어 올려 댈런을 가리킨 남자가 소리쳤다.
“새벽 기사단― 놈을 갉아먹어라!”
***
새벽 기사단.
머릿수가 일만에 달한다는 제국의 기사단 중에서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두 개의 기사단 중 하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잠입, 침투, 암살, 첩보활동과 같이 평범한 기사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임무에 특화된 조직이었다.
허나 동시에 스스로의 몸을 완벽하게 다룰 줄 아는 기사가, 작정하고 살기와 검을 감추려 한다면 얼마나 완벽한 암살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집단이기도 했다.
‘전장에서도 적의 주요 인물을 타격하거나, 병사들 사이에 섞여들어서 혼란을 일으키는 게 주 임무지.’
대놓고 드러내놓은 검보다, 보이지 않는 검이 비교할 수 없이 위험하다던가.
새벽 기사단은 무장까지도 겉보기에 여타 제국 병사들과 구분하는 게 불가능했다.
얇은 철판이라고 생각했던 갑주가 화살이며 검을 죄다 튕겨내는 걸 보고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는 게 일반적이겠지.
허나 그렇게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검끝에서 능숙하게 발현되는 술식과 검기가, 목격자의 숨통을 끊어놓았을 테니까.
“어이가 없군.”
쿵!
화염이 넘실거리는 검을 손등으로 쳐내고, 뒤로 빠지려는 기사의 멱살을 잡아 패대기친 댈런이 말했다.
“나 하나 잡자고 부대 하나를 통째로 빼낸 것도 모자라, 기사단장까지 보낸다는 판단은 어디서 나온 거냐?”
“시셀라와 그의 대언자인 주교께서 명하신 일이다.”
“···미친놈들.”
으직!
짓밟힌 목이 부러지다 못해 끊어지고, 왈칵 넘치는 피가 부츠를 적신다.
가볍게 혀를 찬 댈런은 병사들의 머리 너머로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투구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놈이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새벽 기사단의 단장. 수준급의 암살자이자 검사이며, 동시에 5위계에 닿은 초월자.
또한 놈은 만신전에서도 주신급에 속하는 물의 신, 시셀라의 사제이기도 했다.
놈이 소리치자마자 병사들의 기세가 돌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만신전을 위해! 시셀라를 위해! 제국을 위해!”
“으아아아아!”
“죽어! 죽어!”
방금까지의 혼란과 두려움은 거짓이었다는 듯, 함성을 지르며 스스로의 목숨을 도외시한 채 달려드는 병사들.
눈을 반쯤 뒤집은 놈들의 머리 위에는 신성력의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담대함과 용기를 불어넣다 못해, 아예 이성과 본능마저 마비시키는 수준의 신성 마법.
이 정도면 저주에 가깝지 않을까. 고양감에 뇌가 절여진 병사들은 마치 부나방처럼 몰려와 사정없이 갈려 나갔다.
쉬이익―!
그렇게 팔다리가 떨어지고 몸통이 쪼개지는 사이로, 검기 어린 공격들이 쉴 새 없이 파고든다.
하나하나가 급소를 정밀하게 겨눈 검로. 검에 내장된 술식들은 없는 빈틈까지도 억지로 비집고 만들며 공격을 보조한다.
단순해 보여도 대응하기가 마냥 쉬운 건 아니었다. 새벽 기사단은 전원이 영역을 이룬 초인들.
정면승부에서는 단숨에 짓밟아버릴 수 있는 5위계 초월자라도, 끊임없이 빈틈을 파고드는 공세 속에서는 심력이며 체력이 소모될 수밖에 없겠지.
“쯧.”
댈런은 가볍게 혀를 찼다.
수백의 병사. 수십의 초인 기사. 5위계의 기사단장.
거기다 그들을 보조하는 마법사와 사제들까지.
미궁도시까지 달려가자마자 바로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만큼, 도착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힘을 아껴둘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 전력이라면 영역을 개방하지 않고서는 빠르게 끝내기 힘든 싸움이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그만큼 제국군의 전력이 분산되었다는 이야기지.’
원래라면 온전히 도시를 공격해야 할 전력이다.
그중 상당 부분을 이쪽으로 빼돌렸으니, 공성전의 공세는 다소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원래 계획대로 대충 추격을 뿌리치고 도시로 가는 것보다, 이곳의 적 병력을 깔끔하게 궤멸시키는 게 더 나았다.
판단을 마친 댈런이 종심을 돌파하는 걸 멈춘 순간.
같은 판단을 내린 그의 일행이, 마법사들을 가볍게 견제하는 걸 멈추고 대규모 마법을 시전했다.
[가라앉거라.]
영창이 아닌 선언.
지저룡의 뼈에 서린 신비가, 대마법사의 말에 담긴 의지를 곧 술식으로 치환시킨다.
“뭐, 뭐야!”
“늪지대다! 조심해!”
“끄아아악! 내 다리! 늪 안에 뭐가 있어!”
반경 수백 미터의 지대가 일거에 붕괴하고, 내려앉은 지면이 늪지가 되어 다리에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순식간에 허리까지 집어삼킨 늪지 안쪽에서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자라나는 석순이 병사들을 꼬챙이처럼 꿰어버렸다.
산 채로 하반신이 난도질당하는 고통에, 눈을 부릅뜨고 호흡을 꺽꺽거리다 죽음을 맞이하는 병사들.
홀로 단단한 땅을 딛고 선 댈런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단와 사제들만 남았군.”
“······.”
일대를 집어삼킨 대규모 마법에서 살아남은 건 두 부류뿐.
초인적인 민첩성과 힘으로 늪을 박차고 뛰어오른 기사들과, 최후방까지 물러나 있다가 가까스로 범위 밖까지 피신한 사제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지팡이를 슬쩍 들어 보이는 펠버가 보였다.
대장장이의 선물을 받은 지 고작 며칠이나 지났다고, 순식간에 적응을 끝내고 제 것처럼 활용하는 대마법사의 능력.
그렇다면 선물을 전달해준 이쪽 역시 분발할 필요가 있겠지.
“엑시.”
찌이이잉―
시동어를 뱉은 순간 희미한 파동이 퍼져나간다.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이질적인 마력의 울림.
그 근원이 고대 모래바람 왕조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주술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골렘 제작의 대가였던 모래바람 왕조는, 사물에 영혼과 의지를 부여하는 영혼 재단에도 도가 튼 이들이었다.
그리고 댈루카힘에게서 계승한 탄령(歎令)은, 그런 정교한 공정을 영창으로 압축한 결정체였다.
찌르르르···.
기사들이 뽑아 든 검이 제각기 검신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의지가 부여됨과 동시에 옛 소유자를 뿌리치고 주인의 명령을 듣고자 하는 몸부림.
물론 허공의 화살을 제어할 때와는 달리, 기사들이 완력으로 찍어누르는 이상 손아귀를 벗어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댈런 역시 그걸 노리고 있었다.
“룩스.”
두 번째 시동어가 늪지대 위에 울려 퍼진다.
동시에 찌르르 울던 검신이 일제히 침묵했다.
“······어?”
안간힘을 쓰며 검의 소유권을 지키던 기사 하나가, 느슨해진 검의 몸부림에 저도 모르게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쩌저적···콰아아앙!
그 눈앞에서 순식간에 실금이 쩍쩍 갈라진 검신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기사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콰과광! 꽈르르릉!
늪지대 곳곳에서 천연의 폭발이 터져 나온다.
수 미터 반경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화염과, 소유자의 전신을 얼려버리는 서리폭풍.
감전된 기사가 새까맣게 탄 숨을 토하며 쓰러지고, 갑옷 안쪽이 바람의 칼날로 난도질당한 남자는 힘을 잃고 늪지 안쪽으로 빨려들어갔다.
백에 가까운 기사들이 절명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기사단장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댈런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서 말했다.
“정정하지. 기사단장 한 명과 사제들만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