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16화 (216/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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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신(1)

“···시셀라시여.”

기사단장이 중얼거렸다.

늪지 위를 뒤덮은 형형색색의 폭발들 사이, 놈의 투구에는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본관은 오래전 검사로서 종을 초월했지.”

기사단장의 검 역시 탄령의 힘을 피한 건 아니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검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허나 다른 기사들과 달리 그의 검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작은 떨림이 전부였다. 기사단장은 폭발이 가라앉아가는 늪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본관은 검의 의지를 들을 수 있고, 검도 본관의 마음을 알아듣는다오.”

판금 갑주로 두른 손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더해지자, 이내 검신을 울리던 희미한 떨림이 완전히 멎었다.

“황실조차 발굴하지 못한 고대의 언령을 어떻게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본관에게 그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을 거요.”

“잔재주라니. 그 잔재주에 당한 부하들이 억울해하지 않겠나?”

“···대의에는 때로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

기사단장이 두 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희생을 딛고서야 신의 뜻은 완성되기 마련이라오.”

“지랄.”

그리고 댈런이 웃은 순간, 놈의 신형이 사라졌다.

뻐어어엉―!

반 박자 늦게 일대를 울리는 충격파.

반쯤 늪지가 되어버린 땅이 퍽 하고 터져나가고, 흐릿해진 금속광이 큰 호선을 그리며 측면으로 달려든다.

「영역 개방 : 미명의 빛을 머금은 만신의 암검」

기사단장은 영역을 개방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갑옷을 입었음에도 날렵한 발걸음을 따라 흐릿한 빛이 차오르고.

갑주 전체를 둘러싼 빛의 향연 한가운데, 들고 있는 검만이 새까만 검기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가진 패를 하나씩 까 보이며, 수읽기 싸움으로 돌입하곤 하는 초월자들과는 꽤나 상반된 태도.

기사로 서임 받았으나 맡은 역할이 암살자인 만큼, 속전속결로 목표물을 제거하려는 습관 탓일까.

어쨌거나 저쪽에서 먼저 그렇게 나와준다면, 이쪽 역시 패를 아낄 이유는 없었다.

「영역 개방 : 용의 숨결이 흩어지는 대장간」

늪지를 부수고 대장장이 댈루카힘이 남긴 유산이 솟아오른다.

우뚝 선 굴뚝 형태의 대장간 안쪽에서 수십 정의 무구가 일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새까만 장창. 물결 형태의 날을 가진 도끼.

전격을 한가득 머금은 태도(太刀). 수십 가지 술식진으로 도배된 판금 갑주.

쐐애애애액―!

댈런의 손짓을 따라 일제히 비산하며 기사단장의 사각을 노리고 거침없이 파고든다.

「만병지주(萬兵之主)」

사후에도 망치와 검을 놓지 않은 대장장이가, 영겁에 가까운 세월 속에서 닿은 기적.

아직 완전하게 익혀내지 못한 비기였으나, 지금만큼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효과적인 한 수였다.

까아앙!

기사단장의 흉갑이 묵빛 장창을 흘려보낸다. 도끼날을 갑주의 어깨 부분으로 튕겨내며 전진하는 놈의 신형.

“밝아오는 여명의 빛에 날붙이는 통하지 않소이다!”

포효하듯 외친 기사단장이 낮은 자세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 짧은 돌진 사이에 열 정이 넘는 병기가 갑주를 두들겼지만, 갑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전부 튕겨 나갈 뿐.

“말해줘서 고맙군.”

댈런은 사납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 내리그었다.

쉬이―퍽!

그러자 둘 사이를 가로막고 지면에 틀어박힌 태도가, 눈앞이 새하얘질 수준의 전격을 방출했다.

콰지지지지직―!

뇌전의 파도가 일대를 휩쓸어버린다.

늪처럼 변했던 지면의 수분을 죄다 날려버리고, 딱딱하게 굳은 돌덩이를 퍽퍽 깨뜨리는 녹옥빛 전격의 폭풍.

댈런은 성검을 가볍게 거머쥔 채, 그 폭풍 한가운데서 삐딱하게 서있었다.

댈타리온의 힘을 흡수하며 뇌전계 술식의 극한을 거머쥔 그다. 세기의 전격술사가 남긴 지식과 능력은, 스스로가 터뜨린 전격에 휩쓸릴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꽤 버티는군.”

다만 허술하지 않은 건 검으로 5위계에 다다른 기사 역시 마찬가지.

전격의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 위, 기사단장은 몇 미터쯤 밀려났을 뿐 상처 하나 없이 서 있었다.

“···본관의 암검이 베어버린 수급 중에 마법사의 것이 없었을 거로 생각하시오? 이런 잔재주 따위 몇 번이고 받아낼 수 있소이다.”

기사단장이 투구 틈 사이로 자신만만한 눈빛을 내비치고.

“그럼 그 잔재주를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확인해볼까.”

시선을 맞춘 댈런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순간, 허공에 둥둥 뜬 채 대기하던 무구들이 다시금 빗발쳤다.

쯔각!

나무로 만든 손방패가 어두운 검기에 세로로 쪼개진다.

쩌엉―

술식이 도배된 갑주는 정면에서 들이받혀 우그러진 채로 무너졌다.

두두두두두두!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무구들.

그 하나하나가 유물 무기 수준의 병기들이다.

술식이 폭발하고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몇 번이나 뒤집힌 땅이 끝내 우르르 무너져내리는 아수라장의 한가운데.

빛의 갑옷을 입은 기사단장은 피할 건 피하고, 받아낼 건 받아내면서 끊임없이 전진했다.

[···호오.]

그 기세는 가만히 지켜보던 심상 너머의 진룡마저 나직하게 감탄할 정도.

그야말로 검 한 자루에 의지해 대영역을 이뤄낸 기사다운 모습이었다.

사실 기사단장이 싸우는 방식은, 댈런이 지금까지 겪어온 초월자들과의 전투와는 미묘하게 결이 달랐다.

이건 광범위한 술식으로 일대를 뒤엎는 마법사와의 싸움이 아니다.

체구와 힘의 크기 자체가 남다른 악마에게 맞서는 건 더더욱 아니었고.

‘힘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 응축되어있어.’

자신만의 세계를 현실화하는 영역의 권능.

힘의 총량 자체는 영역이 개방되었다 할 법했음에도, 그 크기는 자신이 걸친 갑주와 검 수준에 국한되어 있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이건 하나의 새로운 법칙을 설립할 정도의 심상이, 검과 갑옷에 결집되어 녹아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

대체 어떤 심상을 품어야 저런 정경을 꿈꾸게 되는 걸까.

현재의 위계를 딛고 그 다음으로 손을 뻗는 댈런의 입장에서, 이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허나 상념을 이어갈 시간은 없다.

이미 두 차례나 대규모 술식을 시전한 펠버는, 댈런을 지원하기 위해 남은 사제들에게 또 다른 주문을 퍼붓고 있는 상황.

전투에서 무른 마음을 가진다면 동료에게 폐가 되는 건 자명한 일이다.

생각을 정리한 댈런이 고개를 든 순간, 기사단장의 신형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적을 앞에 두고 한눈을 팔다니!”

쉭―

검이 닿는 거리.

쭉 뻗은 어깨와 팔, 그 끝에서 내질러진 장검.

눈부시게 빛나는 갑주와는 상반된 색채로, 검에 맺힌 어둠이 순간 뭉클하며 더 짙어졌다.

댈런은 물 흐르듯 도끼를 들어 올렸다. 검을 걷어내고 후속타를 이어가는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내 승리외다.”

허나 검끝과 도끼날이 닿은 순간, 기사단장의 투구 안쪽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촤아악―!

허상처럼 도끼날을 통과한 놈의 검이, 댈런의 가슴팍을 그대로 꿰뚫었다.

“······.”

순간적으로 정적이 내려앉은 일대. 우뚝 멈춰선 두 신형.

묵빛 검기를 머금은 채 목표에 도달한 검. 그 검을 쥔 기사단장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놈이 쓴 투구 틈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런 능력이었나. 참신하군.”

***

“이···어떻게······.”

고장난 인형처럼 뻣뻣하게 돌아가는 고개.

기사단장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댈런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날붙이를 죄다 막아내는 갑옷에, 날붙이를 죄다 통과해버리는 검이라. 아주 환상의 조합이야.”

“분명 진짜였는데. 도끼는 결코···허상이 아니었는데.”

“단지 튼튼한 갑옷만 믿는다기에는 너무 저돌적인 돌격이었다. 누가 봐도 그 검에 숨겨진 수가 하나 더 있는 게 확실하지 않나?”

후욱!

말을 맺자마자 무너지는 댈런의 몸.

「영역 개방 :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언제부터였는지 발밑의 지면에서는 회백색 동심원이 파문을 그리고 있었고, 하늘의 먹구름은 잿빛으로 물든 채였다.

「팔연답산(八聯踏散)」

검에 찔린 육신은 순식간에 회백색 그림자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디선가 여덟 명이나 되는 댈런이 나타나, 기사단장을 둘러싸고 포위했다.

“무, 무슨. 환상인가? 아니야. 전부 진짜···어떻게 된 거지?”

제각각 다른 무기를 들고 선 신형들.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암살자인 기사단장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놈은 알지 못했지만, 애당초 그 하나하나가 물리력을 가진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들고 있는 유물 무기들 역시 대장간에서 나온 것들이기에, 영역이 유지되는 동안만큼은 유물 무기로 무장한 초인 부대나 다름없는 전력.

“상대방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뚫어가며 최후의 일격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방심한 채 가볍게 걷어내려는 적의 무기를 무시하고 급소를 찌르는 일격이라. 꽤나 괜찮은 블러핑이었어.”

“······.”

“하지만 되려 그 능력에 의존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군. 빗발치는 마법 무기들을 피하다 보니, 눈앞의 적이 진짜인지 아닌지 구별할 여력도 없어졌겠지. 그래서 오히려 들고 있는 무기가 진짜인지에 집중한 거야.”

댈런은 피식 웃었다. 어째서인지 이 상황이 재밌어서였다.

5위계 검사를 앞에 놓고 훈수를 두는 자신이라니. 다만 이건 단지 적을 농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의 승리는 단지 힘의 우열로 얻어낸 게 아니었다.

‘닫힌 설산의 하늘’이나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혹은 ‘용의 숨결이 흩어지는 대장간’.

그가 보유한 영역의 정경이 개중 어느 하나뿐이었다 해도, 과연 지금처럼 손쉽게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숱한 난관을 뚫고서라도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모아온 지난날이 아니었다면, 이번 싸움 역시 큰 부상을 각오해야만 했겠지.

「회검(回劍)」

스팟!

땅에 떨어져 박혔던 도끼가 사라지더니, 댈런의 빈 왼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댈런은 도끼를 허리띠에 꽂아둔 채 두 손으로 성검을 쥐었다.

세 번째 성검의 주인이었던 성기사단의 영웅 레레도나라. 그리고 그녀의 오랜 수행 끝에 만들어낸 비검.

이 둘을 모두 아는 존재라면, 댈런이 신비의 힘을 뒤틀 수 있는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걸 알아챘을 테다.

그리고 그가 굳이 이를 내보인 건, 앞서 기사단장의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은 것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

어딘가 스산해진 공기.

초토화된 대로변과 주변의 숲에 뜬금없는 미풍이 불어온다.

코끝을 간질이는 짭조름한 바닷내와, 입안에 맴도는 역한 소금기.

댈런은 쓰러진 사제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까지 항전을 이어가던 사제들은, 용골 지팡이를 쥔 펠버의 주문에 처참하게 박살 난 상태였다.

“연기는 그만하지.”

그 시체 더미를 향해 댈런이 말했다.

“네 신실한 신도가 내 손에 목이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거냐?”

[제국의 온 신민이 만신전의 신도요, 온 세상이 만신의 교리에 엎드리나니.]

시체 더미에서 울려 퍼지는 전성.

곤죽이 된 수십 구의 시신 사이에서, 피떡이 된 여사제 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곧 온 대륙이 만신전의 자비로움을 알게 될 터. 신도의 머릿수가 하나 줄어드는 건 큰 상관이 없느니라.]

찰박.

물 위를 딛는 것 같은 발소리.

[허나.]

단단한 땅 위로 퍼져나가는 단조로운 물결.

꺾이고 으스러진 몸이 순식간에 씻은 듯이 치유된다. 여사제는 깊게 눌러썼던 두건을 걷고 얼굴을 드러냈다.

[신앙을 위협하는 이교도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지. 그 이교도가 한낱 필멸자의 몸으로 심상에 다수의 정경을 품고 다루며, 반신의 위계에 반쯤 발을 걸치기까지 한 상태라면.]

맑은 물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일견 창백해 보이면서도 신성한 광채가 뿜어지는 얼굴.

품 넓은 복장으로 두 팔을 넓게 펼친 여사제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며 말을 이었다.

[만신을 대표하는 일곱 주신 중 하나이자, 모든 강과 바다의 어머니인 나 시셀라. 오늘 이 자리에서 내 종복의 몸을 빌려 친히 이교도를 징벌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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