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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신(2)
“시, 시셀라시여······.”
만신창이가 된 기사단장이 중얼거렸다.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여사제를 쳐다봤다.
[이단 낙인을 받고 처형된 사제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만신전에 저항한 고위 신관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교리에 불복한 새벽 기사단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일렁이는 지난 회차의 흔적들.
댈런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저 알림창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무력화된 기사단장을 앞에 두고, 굳이 시간을 끌어가며 스스로가 위협임을 드러낸 이유이기도 했다.
차라리 이곳에서 그녀와 담판을 짓는 쪽이, 차후 미궁도시 근처에서 싸우게 되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었으니까.
“···댈런. 조심하게. 저 여사제는 더이상 평범한 사제가 아니네. 만신전의 주신인 시셀라의 화신이야.”
“알고 있소.”
이곳은 신들이 실재하는 세상이다.
대륙을 호시탐탐 집어삼키려 노리는 악신들뿐만 아니라, 그 악신에 맞서는 신들 역시 존재하는 세상.
성기사단이 섬기는 전쟁의 신이 그러했고, 북방인들의 투신 역시 악마들을 찢어 죽이고 승천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댈런은 신앙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쪽은 아니었다.
애당초 지구에서도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의 숫자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많지 않았던가.
사제의 기도 한 번이면 눈앞에서 찢어진 상처가 회복되고, 성기사가 신의 힘으로 악마를 썰어 죽이는 세상이라면.
오히려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이 몰상식하다고 여겨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만신전은 예외지.’
남부 제국의 국교, 만신전.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신의 이름을 붙이고, 모든 신에게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하는 종교.
일전에 시에나를 통해 지명 의뢰를 받을 당시에도, 댈런은 만신전의 의뢰는 하나같이 거절해왔다.
그 신앙이나 교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이유였다.
‘인류의 편에 서는 척하면서, 그 누구보다 종말을 향해 달려가길 원하는 위선자들.’
아니, 위선자보다는 오히려 배반자에 가까울까.
그 기원을 생각하면 애초부터 인류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존재하는 놈들이었으니, 배반이라는 말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종말의 주역인 악신들만큼이나 까다로운 상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곱 주신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만신전이라고는 하나, 그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악신의 진체에 버금가는 존재는 아예 없다 해도 무방했으니까.
[허나 가벼이 여겨도 좋을 상대는 아니니라, 댈런. 악신들과 달리 만신의 화신체는 본신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아. 신위에 오른 건 아니라 하나, 상성상 내 숨결이 그리 유효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중을 나직하게 울리는 적창의 경고.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룡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상대는 명확한 반신격의 존재이고, 이쪽은 아직 그 문턱에 한 발짝을 간신히 걸친 상황.
어떤 의미에서는 쑴의 화신체와 싸울 때와 비슷한 양상이다.
문제는 차리나의 희생이 있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사실상 일 대 일의 싸움이라는 것.
아마 전력을 투사해도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겠지.
그나마도 시셀라의 격이 영락했던 쑴의 화신체보다도 낮기에 거머쥘 수 있는 승산이었다.
“노인장. 상단주와 토미를 데리고 물러서시오.”
“자네 혼자 상대하기는 힘들 걸세.”
뒤돌아보지 않았음에도 느껴지는 걱정 어린 시선. 댈런은 대답 대신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주저앉아 있던 기사단장의 머리가 툭 하고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스르르 고꾸라지는 기사의 육신. 댈런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금방 끝날 테니.”
“···알겠네.”
뒤쪽에 있던 일행의 기척이 빠르게 멀어져간다. 댈런은 그들의 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여사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셀라의 힘과 인격이 덧씌워진 여사제 역시, 일행의 움직임을 저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저 사람 키 정도 높이의 허공에 뜬 상태 그대로, 댈런을 가만히 마주 보고 있었을 뿐.
[방자함이 끝을 달리는구나.]
여사제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당겼다.
[이교도는 최대한 빠르게 즉결처분하는 것이 옳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
[네 녀석의 태도를 보아하니 쉽게 끝내줘서는 안 되겠어. 차라리 지옥이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겠다.]
광대한 제국의 주신이라기에는 한없이 저열한 도발.
그에 반응해주는 대신, 댈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한밤중의 공기는 눅눅했다. 짙어진 소금기가 콧속을 따끔거리게 했다.
성검을 조금 고쳐 쥐자 손아귀가 서늘해졌다. 검신을 따라 흘러내리는 새하얀 냉기.
댈런은 그 차가움을 느끼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가 말했다.
“진짜 신도 아닌 주제에 폼은 있는 대로 잡는군.”
[···뭐라?]
“참, 아직은 비밀이었나? 너와 네 만신전이 악신의 끄나풀이라는 사실 말이다.”
까드득.
일그러지는 얼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둔탁한 소음.
[너, 너 대체 어떻게······.]
반응을 보니 아직 비밀이 맞는 것 같았다. 웃긴 일이었다.
성전이랍시고 이 정도로 난장판을 벌여놓고서, 언제까지 인류를 수호하는 포용적인 만신 놀이를 할 생각이었는지.
[정정하지. 너는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지워진다. 고통은 지옥에 가서 받도록.]
“줏대 한번 없군. 신도들이 고생하겠어.”
[그만!]
여사제가 노성을 토해낸다. 그녀의 주위로 신성력이 휘몰아쳤다.
넓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위쪽으로 뻗어낸 두 손.
그 너머에서 밤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망망대해에 잠겨 익사하거라. 이교도.]
이글거리는 푸른 눈으로 노려보며 전성을 내뱉는다. 댈런은 재빠르게 허리춤을 훑었다.
쉬이이익―!
도끼가 공간을 가르고 날아가며, 백수십 개로 쪼개져 여사제의 코앞에 들이닥친 순간.
갈라진 하늘 틈에서 어마어마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대로변과 일대의 숲을 덮치고.
쿠르르르르···!
눈앞에 보이는 온 세상이 물속에 잠겨 들었다.
***
깊고 어두컴컴한 물속.
얼마나 깊은지 빛이라곤 한 점도 들지 않고, 그 암흑을 꿰뚫는 시선에조차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아래에서 발목을 잡아끌고, 온몸을 에워싼 채 코와 입을 파고들려 하는 물줄기.
한 방울이라도 허용하는 순간 돌이키는 건 불가능하다.
신성력을 머금은 물이 몸 안쪽에서 날뛰는 충격은, 어지간한 초인이라도 순식간에 내장부터 으스러뜨릴 게 분명한 일.
「술식갑주(術式甲冑)」
「백풍갑(伯風甲)」
“푸후.”
바람의 갑옷으로 물을 밀어내고서야, 댈런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성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빌어먹을 바다를 또 보게 되는군.”
[이곳을 아느냐?]
적창이 물었다.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모니터 너머에서 시셀라와 맞붙을 당시에, 이런 능력에 몇 번쯤 당해본 적은 있었다.
화면 한가득 물이 쏟아지고서, 순식간에 익사해버린 탓에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던 초인들.
이 능력에 당하고도 살아남은 건 초월자 캐릭터로 플레이하던 경우뿐이었다.
다만 곧바로 영역을 개방해서 싸운 터라, 정확히 어떻게 이겨냈는지는 알 수 없는 일.
[여긴 시셀라의 신역(神域)이니라.]
“신역?”
[필멸자들이 영역이라는 그릇을 가지고, 악마가 지옥이라는 거처를 가지듯 신도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지. 여긴 환상세계에 있는 시셀라의 세계니라. 정확히는 그 세계를 현실에 강림시킨 것이라고 해야겠지.]
대충 규모가 엄청나게 큰 영역 개방으로 보면 되는 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초월자 캐릭터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도 쉽게 이해가 갔다.
세계와 싸우기 위해서는 세계를 불러내야 하는 법.
초월적인 힘으로 저만의 법칙을 다시 써 내려가는 존재들의 싸움은 으레 그런 것이었다.
[나를 불러내거라. 비록 상성이 맞지 않아 놈을 쓰러뜨리지는 못한다 해도, 네 한 몸 빼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니라.]
“굳이 그럴 필요 없소. 미궁도시를 지원할 여력은 남겨둬야지.”
[이 상황에서 힘을 아끼려 하는 것이냐?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란···.]
“아니, 정말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오.”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만신전의 주신과 대면하는 건 이번 회차에서 처음이니, 시간만 적당히 끌면 알아서 해결될 거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지금의 시셀라는 그저 이벤트 몹이라는 이야기지.”
만신전이 인류의 적으로서 본색을 드러내는 건, 게임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치명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만신전의 사제나 성기사로 플레이하기라도 했다면 그동안 쌓아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고.
그런 상황이 아니라도 후반부의 위기가 되는 만신들의 존재는, 부조리 그 자체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설정.
때문에 만신전의 일곱 주신 중 하나와 처음 대면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이벤트로 지원군이 등장하곤 했다.
‘인류 최후의 보루. 그 깊은 심처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지.’
펠버에게 물러가라고 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건 애초부터 생사를 걸고 이겨내야만 하는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일종의 이벤트전이다.
물론 만신전의 주신이 상대라면, 그렇게 시간을 끄는 것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강과 바다의 신이자 물의 수호신, 시셀라.’
상념을 갈무리한 댈런은 성검을 눈앞에 곧게 세웠다.
상성상 댈런이 자주 사용하는 염열계 술식은 봉인된 거나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대책도 없이 시셀라를 도발했던 건 아니다.
지금처럼 다짜고짜 놈의 바닷속에 처박히는 상황이 오더라도, 어떻게 대처할지는 한참 전부터 준비해두고 있었으니까.
물의 신을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무기는 처음부터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단지 지금까지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힘이기에, 지금껏 조용히 감각을 가다듬고 있었을 뿐.
스으―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검을 비틀어낸다.
아까부터 검신을 따라 줄기줄기 흘러내리던 냉기가, 그 비틀림에 반응하며 결 자체를 뒤바꿨다.
우우웅······.
성검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새하얀 동심원의 파문.
그건 일신의 무력을 쌓아 올려 만들어낸 힘도, 지나온 회차들을 되짚으며 회수한 능력도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홀로 왕관의 무게를 짊어진 여왕이, 백성을 지키고자 하는 한 가지 염원으로 손에 넣은 기적.
악신의 발밑에 짓밟혔음에도, 사후의 의지를 통해 다시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권능.
「영역 개방 : 창공 위 서릿발의 수호자」
얼음 나비.
시작은 어디선가 날아온 한 마리 푸른 날개의 나비였다.
나비의 가냘픈 날갯짓을 따라, 희미한 빛줄기가 머리 위에 드리운다.
아득하게 먼 수면 위쪽에서부터 새하얀 정광이 흩뿌려지듯 내리쬐고.
심해의 어둠을 뚫고 아스라이 스며든 빛이, 한 줄기로 모여들어 성검의 검신에 깃든 순간.
「수백동토(粹白凍土)」
쩌저적───!
끝이 보이지 않던 심해의 드넓은 면적이 얼어붙더니, 단단한 지면이 되어 댈런의 발을 지탱하고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