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19화 (219/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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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신(4)

[가짜 신이라니···!]

우드득!

한마디 도발에 곧장 분노에 차 손을 뻗으려는 여사제.

허나 다음 순간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이를 악문 채 호흡을 가라앉힌다.

눈앞의 소녀와 댈런을 동시에 상대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안 것일까.

그녀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의문을 표했다.

[···백안의 선각자. 어떻게 내가 여기에 온 걸 알았지?]

[가짜 신 주제에 제 눈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요?]

백발의 소녀가 가볍게 웃었다. 여사제는 표정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렸지만, 같은 도발에 두 번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 잘난 눈으로 봤다 이건가. 고정되지 않은 미래를 내다보다 미쳐버렸다는 소문이 있던데. 광인치고는 꽤 멀쩡하게 대화도 되는구나.]

[그렇게 쉽게 미쳐버리기에는 세상에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그리 많지 않답니다. 운명의 강물은 당신의 주인이라도 거스를 수 없으니까요.]

[······.]

[뭐, 적어도 그쪽은 노력이라도 하는 것 같지만···. 그 시간에 당신과 당신의 잘난 친구들은 뭘 했죠? 인간들의 고혈을 짜서 당신들의 탐욕 가득한 신역을 살찌웠나요?]

츠즈즈즉······!

공간이 뒤틀린다.

밤하늘을 뒤덮은 별들이 하나씩 이쪽으로 빛을 내리쬐면서, 여사제를 둘러싼 일대를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가벼운 대화 속에서도 의념의 발로는 끊이지 않고, 반신의 궤에 오른 존재들은 호흡 그 자체가 고위 술식이나 다름없는 바.

콰직! 쩌저적···!

언쟁과 신경전은 물리적인 뒤틀림으로 나타난다. 서로를 탐색하듯이 훑어내리는 두 존재의 권능.

갈라진 돌 틈 사이에서 솟아오른 물줄기가 허공에 화려한 성법진을 그리고.

내리쬐는 별빛이 그 성법진을 한 꺼풀씩 굳히고 벗겨내며, 여사제가 딛고 선 일대를 공간째로 점점 더 옥죄어간다.

어느새 천구의 절반을 뒤덮은 별의 바다와, 거친 파도를 일으키는 창공 위 해수면은 아까부터 서로를 끊임없이 갉아먹는 중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초월자의 전투를 겪어본 댈런마저도 어느 타이밍에 끼어들어야 할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은 싸움.

[쉽게 끝내면 좋을 것을. 아무리 저항해봐야 정해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요.]

[웃기지 마라. 우리는 마지막 때를 위해 숨겨진 패일지니!]

[쯧. 그래봐야 당신의 주인에게는 결국 버림패일 뿐인 것을. 그게 아니라면 진작에 옥좌를 내어주지 않았을까요?]

[감히 그런 망발을······!]

콰아아아아─!

소녀가 짧게 혀를 찬 순간, 하늘에서 수백 개의 별들이 일제히 빛줄기를 내리꽂는다.

아예 일대의 공간 자체를 휘감고 격리시켜, 댈런의 눈으로도 그 안쪽을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성광(星光).

[주인님···저거 사람 맞습니까?]

“······.”

악마의 질린 듯한 목소리에 댈런은 고개를 내저었다.

위계의 끝에 닿지 못한 가짜 신이라고 해도, 어쨌든 여사제를 통해 현현한 시셀라는 6위계의 반신격.

현실 자체를 자신의 신역으로 뒤덮어버릴 수 있는 존재를 저렇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는 것부터가, 저 가냘픈 소녀가 통상적인 이해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증거다.

‘이렇게 된 이상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게 낫겠군.’

댈런은 이글거리며 요동치는 별빛의 구체를 보며 검을 내렸다.

모니터 너머에서 봐왔던 경험상, 이 싸움은 그가 끼어들지 않더라도 싸움은 알아서 잘 마무리될 게 분명했다.

같은 5위계 초월자라도 그 꼭대기와 밑바닥은 격차가 까마득한 법.

반신의 경지라는 6위계는 그 편차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5위계보다 못하지는 않았다.

쑴의 영락한 화신체를 상대로, 차리나가 목숨을 내던지고서도 부상을 입히는 게 전부였던 건 그래서였고.

비록 댈런의 노림수가 결정적이었다고는 하나, 지저룡이 초장부터 속수무책으로 적창에게 밀린 것 역시 그런 이유.

‘경험치는 좀 아쉽긴 하지만···시체는 내가 굳이 직접 죽이지 않아도 회수할 수 있으니까.’

지저룡과의 전투가 끝나자마자 심상 너머에서 대장장이의 훈련을 거친 탓에, 댈런의 컨디션도 완전히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당장 벌어지고 있는 공성전과 그 뒤에 이어질 싸움을 생각하면, 아낄 수 있을 때는 힘을 아껴두는 게 맞겠지.

그렇게 생각한 댈런이 가만히 허리춤에 손을 얹은 순간, 허공에 황금빛 균열이 생기며 한 인영을 토해냈다.

***

“쿨럭! 쿨럭!”

“···노인장.”

신역과 영역이 겹치며 생겨난 이공간.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온 건, 댈런의 말에 따라 한참 전에 뒤로 물러났던 펠버였다.

“흐흐···미안하네. 자네 혼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어.”

“상관없소.”

보아하니 상단주와 토미를 안전한 곳에 둔 뒤, 최대한 빠르게 다시 돌아온 모양.

어찌 됐건 이렇게 돌아와 줬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임은 변함없었다. 만약 생사결단을 내야 할 상황이었다면 댈런 역시 그의 도움을 받았을 테였고.

이공간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온 여파를 추스른 뒤, 펠버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선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구만. 역사책에나 등장하던 백안의 선각자라니······.”

“그래도 누군지 바로 알아보시는군.”

“이미 죽은 지 오래됐다고 알려졌지. 마탑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서야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네. 그마저도 스물여섯 전당의 심처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소문은 항상 과장되기 마련 아니겠소.”

백안의 선각자.

세간에서는 오래전 죽은 역사 속의 존재로 여겨지는 인물.

살아있음을 아는 일부 초월자들 사이에서도 그녀가 광증에 시달린다거나, 결계책률의 여부와 관계없이 금강궁에서 나오지 못하는 신세라는 소문이 주류였다.

물론 그녀의 위명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뜬소문이 많은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유명세만큼이나 헛소문이 많아지는 건, 초월자들 사이에서도 변하지 않는 현상이었으니까.

‘도시가 세워질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지.’

백안의 선각자는 미궁도시 팔시온을 세운 설립자들 중 하나.

종말이 다가오기 천 년도 더 전에 인류의 마지막 보루를 완성해낸 선구자 집단의 일원이다.

그 위명이 어디까지 닿았는지는, 덩굴의 마녀와 사투를 벌일 당시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고대의 마녀가 노리던 게, 바로 그 설립자들 중 하나인 필로페린이 만든 마법진이었으니까.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군.’

도시의 설립자가 남긴 유산을 놓고 싸움을 벌인 게 엊그제처럼 느껴지는데.

어느덧 그들 중 하나와 직접 대면하는 날에 도달했다.

이 땅에 떨어진 지도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나.

정신없이 지나가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종종 세월의 흐름을 잊어버리는 듯하지만, 그럴 때마다 지금처럼 어디까지 왔는지 상기시켜주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만신전의 주신 중 하나가 자기 주교의 몸을 통해 강림하는 이벤트는, 종말이 진정한 후반부로 접어들어 종국을 향해 치닫는다는 징표 중 하나.

그리고 그 이벤트에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백안의 선각자는, 종말에 맞서는 인류의 저항 역시 본격적으로 구심점을 갖췄다는 이야기였다.

“···끼어들어서 미안하네만, 저거 저렇게 내버려 둬도 괜찮은 건가?”

“······.”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하기는 한데, 지금 우리가 싸움판 구경꾼이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네.”

그거 기분이 아니라 현실인데. 애당초 이 게임에서 클리어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이벤트 중 하나거든.

물론 그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 정해진 결과라는 걸 아는 입장에서도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고만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댈런은 허리춤의 도끼를 만지작거리면서, 쏟아지는 별빛으로 격리된 공간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노랫소리가 들리는군. 슬슬 끝나가는 것 같소.”

언제부터였을까.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은 별들이 노래를 시작한 것은.

어느새 신역의 삼분의 이를 침식하고, 머리 위를 빼곡하게 수놓은 수십만 개의 별들.

그 별들이 빛으로 일그러진 공간을 향해 나직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시간을 노래하는 별들의 연회장」

「성요태창주(星謠兌昌柱)」

머릿속을 몽롱하게 만드는 기묘한 합창.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심상을 직접 울리는 화음.

볼 수 없는 음계와 박자, 선율이 한데 모여, 선명한 정광을 비추는 기둥으로 화해 내리꽂힌다.

공간이 박리된 채 지직거리던 일대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현실을 일그러뜨리는 이질적인 노이즈가 사라지고, 나타난 건 빛 사이로 모습을 감췄던 두 사람.

[감히 그런 망발을······!]

[굳이 저항할 이유가 있었나요? 결국 이렇게 끝날 것을.]

빛의 장막이 걷혀나간 일대. 노랫소리의 기둥이 내리꽂힌 곳은 정확히 여사제가 선 자리였다.

조여들던 공간의 괴리를 떨쳐버리고, 당장에라도 거대한 파도로 적을 쓸어버릴 듯 눈을 부릅뜬 얼굴.

근처에서 소용돌이치는 막대한 규모의 압축된 수류(水流)는, 그녀가 마지막 수를 던지기 직전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

[감히 그런 망···!]

[지금처럼 종복의 몸을 빌려 화신체로 강림하는 건 한계가 명확해요. 발현할 수 있는 권능의 크기에는 큰 변함이 없더라도, 시공간의 비틀림에 취약할 수밖에 없죠.]

[감히 그런···!]

[물론 진짜 악신들과 달리, 만들어진 신인 당신들에게는 진체라는 것 자체가 없겠지만······.]

허나 한계까지 응축된 거대한 물보라는 그 자리에서 굳어있을 뿐이었다.

그걸 만들어냈을 여사제 본인은, 자꾸만 태엽이 되감기는 시계처럼 했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기만 했고.

[감히···!]

더불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시작점과 가까워지는 듯한 되감김의 순간들.

동영상의 구간 반복의 끝점을 끊임없이 앞으로 당기는 것만 같은 현상.

두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현실감이 전혀 없는 광경 앞에서, 팔짱 낀 소녀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게 누가 가짜 신 행세하랬나요.]

치지지지지직!

[감가가가······!]

반복의 시작점과 종점이 한없이 근접해지며, 여사제의 형체 자체가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파일이 깨진 영상을 재생한 듯, 지직거리며 그녀가 선 공간을 뒤덮는 거친 노이즈.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 같던 파도가 거짓말처럼 지워지고, 머리 위에 남아있던 신역 역시 빠르게 흩어져간다.

모든 권능이 지워진 뒤, 남은 건 여사제의 고장 난 육체뿐이었다.

[가···!]

치직―

거창한 단말마나 폭발은 없었다.

짧은 노이즈와 함께 여사제가 지워진 자리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내려앉았을 뿐.

하늘과 땅을 뒤덮은 망망대해의 신역을 보여준 것치고는, 지나치리만큼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건 시셀라의 권능이 약한 게 아니라, 눈앞의 선각자가 지닌 힘이 그만큼 규격을 벗어난 무언가라는 이야기.

백안의 선각자는 아군에 몇 없는 6위계 중에서도 정점에 다른 존재였다. 온전한 상태의 적창이나, 쑴의 대악마인 용인의 진체와도 맞붙는 게 가능하겠지.

단 한 가지 단점만 없었더라도, 한 번쯤은 그녀를 목표 삼아 캐릭터를 키워봤을 테였다.

“소멸한 건 아닙니다.”

선각자는 약간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입을 달싹였다.

“만신의 근원인 그릇은 제국의 황도, 만신전 본성 어딘가의 지성소에 있으니까요.”

“그래도 힘에 큰 타격은 입었겠지. 만신들은 힘을 공유하지 않소.”

“···역시 알고 계셨군요. 맞아요. 그릇을 깨기 전에는 소멸하지 않지만, 적어도 한동안 전면에 나서기는 힘들겠죠.”

머지않아 선각자의 영역 역시 해제됐다. 평범한 밤하늘과 쑥대밭이 된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흘러내린 땀을 닦은 소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댈런을 향해 돌아선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 천천히 물러서며 전성을 발했다.

[다시 인사하죠. 역천의 우물이 예언한 자이자, 운명의 강물을 범람시킨 이변의 존재여.]

선각자가 고개를 들었다.

흰자위가 있어야 할 자리에 뒤덮인 우주 같은 색채와, 그 가운데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눈동자.

[저는 알리아트. 별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은하수의 흐름을 읽어내리는 관찰자. 무한한 분기점을 내다보며 다가올 미래를 점치···으앗!]

“···무한한 분기점은 보시면서 등 뒤에 있는 돌부리는 못 보는 모양이오.”

[······.]

돌부리에 발뒤꿈치가 걸려 넘어진 소녀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댈런은 장난기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댈런이오. 반갑소.”

“네······.”

“방금 일은 못 본 걸로 하지. 혹시 방금 무슨 일 있었소, 노인장?”

“크, 크흠! 나는 무슨 상황인지도 잘 모르겠구만. 볼크마와 토미를 피신시키고 방금 도착한 터라······.”

짐짓 헛기침을 하며 능청을 떠는 펠버.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본 소녀는 이내 미간에 팍 주름을 만들었다.

첫 등장 때마다 만신전의 주신을 가볍게 압도하는 활약을 보여줬음에도, 댈런이 캐릭터 육성에 백안의 선각자를 목표로 잡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가 많은 회차를 근력캐 위주로 선택하고, 술사 캐릭터를 육성할 때도 육체 능력을 어느 정도 찍으려 했던 것 역시 같은 이유.

‘일반인 기준으로도 평범 이하인 육체 능력은···아무리 반신 수준의 경지에 올라도 커버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지.’

앞날을 내다보고 반신격 화신체의 시간선마저 어그러뜨리지만, 정작 본인은 몸치라는 말도 안 되는 설정.

아군 전력에서 가장 강한 이들 중 하나인 백안의 선각자는, 그런 지독한 모순의 결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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