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20화 (220/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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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선택(1)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소녀가 입을 달싹였다.

그녀의 뒤쪽으로는 드넓은 평원과 군데군데 우거진 풀숲, 간간이 뛰어다니는 야생동물의 모습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쉬이이이···!

지구에서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의 창밖을 내다봤을 때나 보이던 풍경.

귓가에 스치는 희미한 바람 소리 역시,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창문을 아주 조금 열었을 때 들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이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백안의 선각자를 포함한 일행 전원이 말을 탄 것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만나는 것이 옳을지. 만난다면 어떤 순간에 만나야 할지. 그 만남으로 인해 빚어질 운명의 괴리는 과연 어떤 방향일지······.”

나직하게 말끝을 늘이면서도 순백의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는다.

소녀의 등 뒤에 떠오른 빛무리 역시, 끊임없이 현실을 비틀고 왜곡시키는 중이었다.

댈런은 자연스럽게 몇 시간 전을 떠올렸다.

제국군의 습격으로 인해 타고 왔던 말을 잃어버린 뒤, 어떻게 미궁도시를 제시간에 지원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소녀는 간단하게 대답했었다.

‘그리 멀지 않으니 좀 걸을까요?’

피난 중인 상인이나 인근의 마을에 들러서 말을 구하는 대신, 그냥 두 발로 걸어가자는 것.

팔시온까지는 말을 타고도 꼬박 하루를 더 달려야 했기에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그녀가 빛무리를 소환하기 시작하며 일행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각자의 시간선을 개별적으로 가속시키고, 걸어가는 여정에 국한해 시간개념을 왜곡하면 된답니다. 가벼운 부작용으로 며칠쯤 쉬지 않고 걸은 듯한 근육통이 생기긴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즉시 빛무리가 흐릿한 장막으로 일행을 둘러쌌고.

그 결과 지금처럼 수십 배는 빨라진 속도로, 이 드넓은 평야를 걸어서 주파하고 있는 것이었다.

“호오···시간선의 개념을 객체마다 분리시킨 뒤 이렇게 이중으로 뒤틀어서···토미, 좀 알겠느냐?”

“예, 스승님.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방식입니다. 놀랍군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탄성과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들.

발렌티노 사제는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자신들을 둘러싼 장막을 유심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펠버가 5위계에 오르면서 이뤄낸 영역 역시, 시간선에 직접 손을 대는 규격 외의 권능.

그 능력으로 진룡이었던 청린의 시간선을 돌려버리기도 했으니, 이 기회에 많은 영감을 얻어가면 이후의 활약을 더 기대할 수 있겠지.

백안의 선각자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과는 다소 느낌이 다르기는 했지만, 시간 계열의 능력 자체가 굉장히 드문 만큼 그들에게도 좋은 영감이 될 테였다.

“후우, 후······.”

“괜찮소?”

“괘···후우, 괜찮습니다. 아···주 멀쩡해요. 어쨌든 계속 말하자면······.”

문제는 그 힘을 쓴 장본인이 지금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시간선을 주무르는 술식의 한계가 아니라, 단순히 허약한 몸뚱어리의 한계 때문이라는 점이 황당한 일이었고.

근육통 정도 부작용이야 별거 아니지 않냐는 식으로 말해놓고서, 정작 본인이 가장 힘들어한다니.

갈수록 가빠지는 소녀의 호흡.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

보다 못한 댈런은 결국 헛웃음을 지으며 소녀를 들고 대충 어깨에 걸쳐 멨다.

“무, 무슨!”

“그쪽 덕분에 편하고 빠르게 가고 있지 않소. 택시 요금이라 생각하시오.”

“택시···가 뭔데요······.”

“그런 게 있소. 강철로 만든 마차 겸 말 같은 거.”

택시 요금이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앞날을 관측하고 시간선을 다루는 선각자의 힘 덕분에, 일행은 말을 타고도 꼬박 하루가 걸릴 길을 몇 시간까지 단축시킬 수 있었던 것이니까.

애초에 그녀가 없었다는 상황을 가정했을 때, 말을 구할 수 있을지부터가 미지수였다.

전쟁통에 근방에 제대로 된 마을이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고, 피난길에 오른 상인들 역시 팔기보다는 자신들이 타려고 했을 테였기에.

“···고맙습니다.”

소녀 역시 이내 버둥거림을 멈추고, 편안하게 호흡을 고른 뒤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당신은 흐름을 뒤트는 존재였습니다. 거쳐 간 모든 장소에서 운명의 물길은 비틀리고 범람했죠. 그런 당신을 만나는 게 과연 옳은 일일지, 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찾아왔군.”

“얼마 전에야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었거든요. 당신이 저 먼 북녘에서 파멸궁전의 주인을 제 지옥으로 돌려보냈을 때였어요.”

전성이 아닌 육성이었음에도, 선각자의 목소리는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드넓은 평원 위를, 마치 텅 빈 방처럼 웅웅 메아리치는 목소리.

“비록 무리한 강림을 위해 스스로 영락함을 택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언의 선고자입니다. 그를 죽인 건 당신이라는 변수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의미였어요.”

“되게 빙빙 돌려 말하는군. 악신 죽였으니까 우리 편이다 이거 아니요?”

“···정해진 결말을 피할 가능성을 봤다고 해두죠.”

“그게 그거군.”

“어휴.”

작은 한숨. 나직한 웃음.

등 뒤에서 소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결정이 옳았다는 걸요.”

“어째서요?”

“비잘리나 요스코브. 대륙 북부의 마지막 여왕이 당신에게 자신의 힘을 넘겨줬으니까요.”

스으으······.

자그마한 손짓을 따라 검집 틈 사이로 희미한 한기가 새어 나온다.

성검에 새겨진 차리나의 힘이, 부드럽게 흘러든 선각자의 권능에 반응한 것이었다.

“기껏해야 삼십 년 남짓 산 걸 생각하면, 그녀의 재능은 팔시온의 설립자들과도 비견될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운명의 강물 위에서 그녀는 바람 앞에 선 등불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

“꺼질듯 말듯 위태로이 흔들리면서도, 모든 분기점에서 극적으로 운명이 갈라지던 존재.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의 힘을 누군가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에요.”

“차리나를 잘 아나 보군.”

“댈런, 저는 모두를 잘 알아요.”

소녀가 웃었다.

“제가 모르는 건 이 세계 밖에서 온 존재들 뿐이죠.”

“악신들 말이오?”

“아니요. 그들도 결국 이 세계에서 비롯된 부산물들. 운명에 예속되는 걸 피해 갈 수 없는 존재랍니다.”

“무슨 점쟁이랑 이야기하는 기분이군.”

“저는 미래를 점치지 않아요, 댈런. 그저 관측할 뿐이죠.”

그게 그거 아닌가? 댈런은 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어느새 청동 성벽을 따라 크게 돌며 걷고 있었다.

라이칸트 강을 건넌 뒤, 도시 동쪽을 따라 남하하는 발걸음.

북쪽 성문을 통해 끊임없이 빠져나오는 피난민들을 지나치고, 아직 공격당하지 않은 동부 지구 성벽의 경비병들이 잔뜩 긴장한 채 경계 근무를 선 모습을 엿본다.

‘상태창.’

―――――――

이름 : 댈런

레벨 : 43

[근력 : 61] [기량 : 58] [체력 : 52]

[감각 : 51] [지능 : 56] [마력 : 57]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급속 발아(D), 룰리아의 샘물(C), 영혼 착취(B), 치유의 기도(D), 스카디의 해일(B), 카스마의 붉은 바람(B), 모래바람 왕조의 탄령(B), 용골 가공(B)

*고유 스킬(22)

――――――――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자 댈런은 자연스럽게 상태창을 열었다.

시셀라가 죽은 뒤 얻어낸 시체는 셋. 그들의 능력치는 출발하기 전에 계승했지만, 레벨업으로 얻은 능력치는 아직 분배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근래 들어 얻게 된 B등급 이상의 스킬들도 슬슬 연구해봐야겠군.’

6위계의 두 자격 중 하나인, 신비를 비틀어서 자신만의 힘으로 삼는 기적.

레레도나라의 비검을 기초로 한 대장장이의 훈련을 통해, 댈런은 마침내 그 자격을 손에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용혈 역시 적창과 꾸준히 호흡을 맞춰가고 있는 만큼, 계기만 있다면 고유 스킬로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감이 있었다.

다만 예의 두 스킬과 용골 가공을 제외하더라도, 모래바람 왕조의 탄령을 포함한 B등급 스킬들만 무려 넷.

‘그동안 아무리 여력이 없었다고는 하지만···억지로라도 여유를 만들지 않으면 휩쓸리고 말겠지.’

그저 모니터 너머에서 키웠던 캐릭터들을 계승하는 것만으로, 닥쳐오는 종말을 완벽하게 막아내겠다는 건 굉장한 오만이다.

어떻게든 틈을 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닦은 끝에야, 수없는 사선을 넘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가능성이라는 건 단순히 찾아내기만 하면 끝나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올라, 새로운 결실을 꽃피울 즈음에야 의미가 맺어지는 법.

특히나 조만간 계승하게 될 초월자 캐릭터의 능력을 생각하면, 영혼 착취만큼은 어떻게든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게 좋겠지.

‘그러고 보니···아직까지도 흡혈귀 놈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군.’

원래라면 제국이 성전을 선포하기 이전, 혈귀전쟁이 먼저 발발하는 게 정상적인 게임에서의 흐름이다.

제국의 어중간한 확장정책으로 혼란이 빚어지고, 그 여파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온 것이 바로 혈귀전쟁.

사백 년 동안 침묵해온 뱀파이어 백작이 황도 앞까지 진격해오고서야, 제국은 그동안의 미적지근하면서도 거만했던 태도를 벗어던지고 성전을 선포했다.

‘물론 그건 겉으로 내비친 현상일 뿐이긴 하지. 사실은 국가와 종교 간 알력다툼을 이용해, 대륙에 혼란을 일으키려 하는 악신들의 교묘한 술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앞뒤가 이렇게 바뀌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서 몇 번이나 겪어온, 뭔가 단단히 꼬였다는 느낌.

등골을 스쳐 지나가는 서늘함은 정신없던 북부의 전투가 끝난 뒤, 저도 모르게 잠시 느슨해졌던 감각을 바짝 조여온다.

물론 당장은 공성전이 끝난 다음에야 생각할 일. 댈런은 상념을 잠시 접어놓으며 잔여 능력치를 체력에 분배했다.

“음?”

어깨 위에서 흠칫하는 움직임. 잠시 후, 가느다란 손가락이 등을 톡톡 두들겼다.

“뭐요?”

“그, 방금 당신의 격에 변화가···.”

“······.”

이런 시발. 새 발의 피만큼 오른 능력치가 그렇게 훤히 보이나?

선각자가 괜히 선각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댈런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것도 참 피곤한 일인가 보군. 조금만 피곤하면 헛것까지 보게 되다니.”

“허, 헛것이라니! 제 눈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괜찮소. 사실 나이 좀 먹으면 누구나 다 그렇다더군. 천 년을 더 살았으면 오히려 늦게 온 거지.”

“그건 또 무슨······!”

말문을 잇지 못하는 선각자. 댈런은 낮게 웃으며 반쯤 넋이 나간 그녀를 어깨에서 내려주었다.

드넓은 미궁도시를 바깥으로 크게 돌아온 끝에, 저 멀리 남부 지구의 청동 성벽이 보였다.

쿠궁. 쿠르르······.

피어오르는 연기와 아득하게 메아리치는 폭발음.

화살비와 포화.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와 공성탑. 비명과 함성들. 여명을 뚫고 번쩍이는 주문의 정광.

“다 왔군.”

그리고 그 모든 걸 뚫고 감각을 찌르는 죽음의 냄새.

전장이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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