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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21화 (22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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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선택(2)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복도가 크게 출렁였다. 제국의 포탄이나 투석기가 쏘아 올린 돌이 성벽에 맞은 모양이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는 좁은 복도 한가운데. 루시아는 침착하게 균형을 잡고 검을 내리그었다.

스각―

깔끔하게 그어진 검이 가죽갑옷과 피부를 부드럽게 가르고.

“크헉···!”

손쓸 틈도 없이 상체가 비스듬하게 베인 제국군 병사가, 숨 막힌 듯한 비명을 지르며 앞쪽으로 허리를 푹 꺾는다.

“흐으, 흐······!”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갈라진 갑옷을 더듬거리는 다급한 손길.

갈비뼈가 뭉텅이로 쪼개지고 폐 하나가 피를 왈칵 쏟아대지만, 의외로 사람은 금방 죽지 않는다.

이미 그렇게 쓰러진 병사들이 이 좁아터진 복도에만 스물이 넘어갔다. 좁은 복도를 울리는 비명 소리는, 고작 1분 남짓한 사이에 벌어진 학살의 결과물.

“······.”

평소였다면 아무리 적이라도 재차 숨통을 끊어 고통을 줄여줬겠지.

다만 지금만큼은 루시아에게 그럴 여유 따위 없었다.

방금 전 마지막 병사를 베어 넘긴 순간, 찌를 듯한 살기가 그녀의 뒤통수에 내리꽂히기 시작했으니까.

“시셀라시여―”

신의 이름을 부르는 외침. 루시아는 곧장 몸을 틀며 검에 신성력을 덧씌웠다.

눈앞에서 살기를 흩뿌리는 민머리는 다름 아닌 만신전의 전투사제.

사제복 앞섶에 수놓아진 문양은 그중에도 고위 전투사제, 못해도 4위계 이상 가는 초인의 징표였다.

“이런 씹···!”

지난 며칠간 싸워본 경험상, 시셀라의 전투사제가 흩뿌리는 압축된 수류는 상당한 위력이었다.

고작 물을 쏘아대고 후려치는 것임에도, 그 결과는 어지간한 포탄에 버금가는 파괴력.

차라리 성벽 위라면 어떻게든 피해보겠는데, 하필이면 청동 성벽 내부의 좁은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다니.

허나 후회해봐야 늦었고, 판단은 그보다 빨랐다.

파아아앗―!

전신에 새겨진 신성 문신의 힘이, 시간 감각이 극도로 느릿하게 만들고.

“휘몰아쳐 적을 격살하는 급류를―!”

민머리 전투사제가 목소리를 높이며 두꺼운 고서 형태의 성법구를 앞으로 내뻗는다.

성벽 내부의 좁디좁은 복도는 이미 끝없는 포격으로 약해진 상태. 고위 성기사와 전투사제의 신성력이 충돌하는 순간 여지없이 붕괴하겠지.

각오를 다진 신의 두 종복이 각자 시선을 교차한 순간.

“······.”

“······.”

놀랄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어······?”

얼빠진 전투사제의 목소리. 행동은 루시아가 더 빨랐다.

타닷―

좁은 복도의 벽을 번갈아 걷어차며 쇄도.

콰지지직!

눈 깜짝할 사이에 전투사제의 곁을 스쳐 지나간 그녀의 검이, 새하얀 검기를 머금고 사제복 안팎의 모든 방호구를 찢어발긴다.

“커으···시, 시셀라! 시셀라시여······.”

제자리에서 상체가 사선으로 쪼개져 무너지면서도, 끝까지 자기 신을 찾는 전투사제의 부르짖음.

절절한 기도는 신음으로, 신음은 이내 피거품 끓는 소리로 변해 복도에 질척하게 내려앉는다.

“후우, 후우······.”

루시아는 그제서야 거친 숨을 내쉬며 복도 벽에 기댔다. 좁은 복도는 이미 제국군 병사들의 시체로 발 디딜 틈 없을 정도였다.

턱.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난 일주일간 벌어졌던 일들이 지나갔다.

댈런과 펠버라는 최대 전력을 떠나보낸 일행이 도시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그 날 제국은 미궁도시를 침공했다.

단 한 줄의 선전포고도 없이.

***

제국은 영악하고, 또 민첩했다.

그들이 첫 번째로 게시한 작전은, 행군 속도가 빠른 아인종 노예병단으로 재빠르게 접경지대를 돌파한 것.

노예병단이 미궁도시에 꾸준히 습격을 가하는 사이, 만신전의 광전사들과 제국군 본대가 차례대로 접경지를 건너 미궁도시의 면전까지 도달했다.

산발적인 습격을 넘어서서, 본격적인 공성전이 시작된 건 만으로 사흘 전이었다.

그리고 72시간이 훌쩍 넘게 지난 지금까지, 제국은 단 한 순간도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정신 나간 새끼들.”

제국군의 전략은 북부에서 경험했던 공성전과는 달랐다.

싸움에 미친 악신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물 군세를 한 번에 쏟아부었지만, 제국은 착실하게 이쪽의 체력 소모를 유도할 심산이었다.

물론 그 바탕이 되는 건 드넓은 땅덩이에서 나오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

놈들이 밑바닥도 없이 갈아 넣는 병력과 물자를 생각하면, 설령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이득을 취할 수나 있을지 의아함이 생길 정도였다.

“후우.”

어찌됐건 지난 며칠간 쉴 새 없이 이어진 전투는 아군의 체력을 착실하게 갉아먹는 중이었다.

초월의 위계에 닿은 그녀마저도 팔다리가 무거워짐을 여실히 느낄 정도로.

물론 그건 그녀의 영역과 심상이 철저하게 악마를 쓰러뜨리는 데 초점이 맞춰진 탓이기도 했다.

거기다 그녀가 가진 성검 레레도나텔은, 인간을 상대로는 날이 무뎌지는 이상한 특성을 가진 검이기도 했고.

“차라리 악마 새끼들이랑 싸우는 게 낫지······.”

쨍그랑!

실금이 거미줄처럼 번진 검을 던져버리고, 방금 죽인 병사들에게서 가장 좋은 검을 빼앗아 든다.

루시아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덜컹!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격전이 벌어지는 청동 성벽 위의 광경이었다.

“발사!”

“장전해! 장전!”

일제히 시위를 놓는 궁병대와 포신 안쪽으로 화약을 채우는 포병들.

“루터? 루, 루터어어!”

“씨발, 지옥에나 떨어질 광신도 새끼들!”

두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진 청동 경비단 병사와, 죽어가는 동료를 둘러싸고 오열하는 경비대원들.

[레니아! 달로레마!]

[이그넬― 셀티데오 라그레타.]

마른하늘에 수십 줄기의 날벼락이 내리꽂히고, 뒤따라 몰려온 먹구름으로부터 화염의 비가 쏟아진다.

꽈르릉! 콰과과과···!

수십 줄기의 주문이 허공에서 얽혀들며 빚어내는 장대한 폭발 아래, 수십 대의 공성탑 주변에서는 제국군과 미궁도시의 병사들이 한데 얽혀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

수천의 목숨이 덧없이 스러진다. 그것도 마물이나 악마의 손이 아닌, 같은 인간의 손에 의해.

종말이 코앞까지 닥쳐왔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북부의 결집된 힘이 악신의 군대를 몰아낸 지 얼마나 됐다고, 제국의 황제와 만신전은 이런 비극을 만들어내는가.

성기사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는 루시아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흘째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들었는데.”

“···에버론.”

하얀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 조금 떡이 졌지만 그래도 윤기가 흐르는 금발.

청년의 얼굴은 루시아도 알고 있었다. 덩굴의 마녀 사건을 기점으로 안면을 트게 된 미궁도시의 초월자, ‘천변만화의 얼굴’이라는 이명을 가진 사내.

물론 엄밀히는 그가 미궁도시의 관리 역할로 내세우는 저 의체 하나와 구면이라는 이야기였다. 아마 나머지 의체들은 지금도 성벽 곳곳에 흩어져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겠지.

루시아는 성벽 이쪽으로 다가오는 공성탑을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잠이 들려는 차에 제국군이 들이닥치더군요. 아마 외벽에 뚫린 구멍으로 침투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엘가이아 마탑의 마법사분들께 지원 요청을 넣어야겠군요.”

잠시 정신을 집중하고 어딘가에 있을 의체에 의사를 전달하는 모습.

며칠간 쌓인 피로로 눈 아래 그림자가 짙은 청년을 바라보며, 루시아는 다시 한번 얼마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금강궁의 초월자들은 미리 알고 있었다고 했지.’

예상치 못하게 시기가 빨라졌을 뿐, 에버론은 금강궁이 이번 침공을 이미 예견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갑작스런 제국의 기습에도 어떻게든 대응하고, 일곱 성벽 중 첫 번째에서 제국군을 저지해내고 있는 것이었고.

당장 성벽 위를 직접 공략하는 머릿수만 따져도, 제국군의 숫자는 이쪽의 몇 배나 되는 실정이다.

지난 사흘간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몰려온 군대의 머릿수는, 아무리 못해도 성벽 위를 지키는 이들의 열 배 이상.

아무리 팔시온이 거대한 도시라 해도, 대륙 남부의 거대한 땅덩이를 보유한 제국과 숫자에서 싸움이 될 리가 없다.

금강궁에서 나온 열한 명의 초월자들이 아니라면, 이토록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겠지.

“어쨌든···싸움을 마무리하려면 나머지 일행분들이 빨리 와야겠군요.”

에버론이 말했다. 어느새 공성탑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탑의 비좁은 창문을 통해 쏘아져 날아드는 화살들. 청년은 지팡이로 가볍게 돌바닥을 두드려, 두 사람을 두르는 보호막을 구축했다.

“할망구···아니, 저희 초월자들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이 일행분들을 구하러 갔습니다. 아마 하루 정도만 더 버티면···.”

꽈르르릉―!

불현듯이 제국군의 진영 저편에 내리꽂히는 낙뢰. 푸른 뇌전을 본 에버론은 말을 멈췄다.

그그그그극···쿠웅!

공성탑의 거대한 문짝이 도개교처럼 성벽 위에 내려앉아 길을 열고.

“시셀라를 위하여!”

“파웰! 파웰!”

“으아아아아!”

개미떼처럼 쏟아지는 수백 명의 광전사들을 본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항상 예상을 깨신다니까요.”

청년이 웃었다. 그 웃음 너머로 수십 발의 마력탄이 쏟아져, 몰려나오는 광전사들의 선두를 그대로 묵사발 냈다.

신성 문신에서 다시 빛을 뿜기 시작하는 루시아의 곁에서, 에버론은 빠르게 수인을 맺어내며 말했다.

“저쪽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저희도 끝까지 분발해보죠.”

***

꽈르르릉!

지면을 강타하는 한 줄기 빛기둥.

고위 사제를 위시로 한 열두 명의 사제들이, 낙뢰 한 번에 잿더미가 되어 스러졌다.

“시, 시셀라시···여······.”

그나마 마지막까지 형체를 유지하던 고위 사제만이, 신음 섞인 목소리로 신의 이름을 중얼거릴 뿐.

허나 물의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선각자에게 화신체가 통째로 소멸되며 상당한 타격을 입은 지금, 아마 하루이틀 정도는 휘하 사제들의 신성력 자체가 소실되겠지.

“괴, 괴물······.”

“악마다. 악마야.”

하얗게 질린 채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병사들.

좌우로 갈라지는 제국군의 진형 안쪽을 향해 댈런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잔챙이들 하나하나를 학살하며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제국군의 대대적이고 기습적인 침공을 버티기에, 청동 성벽의 내구성은 그리 믿음직하지 못한 편.

사실 사흘이면 슬슬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저 드넓은 장벽의 어느 한 구석도 완파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성벽 아래위에서 초월자들이 부단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청동 성벽을 포기할 생각이 아닌 이상, 이 싸움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어야 했다.

“엑시.”

우웅―

시동어를 내뱉는 순간 보이지 않는 파동이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스으으으···.

땅에 떨어진 무구들이 일제히 떠올라 댈런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댈런은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을 둘로 나눈 뒤, 홑몸으로 적진의 종심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펠버의 술식은 돌파보다는 수성에 적합하고, 허약한 육체의 선각자는 이 정도 규모의 적진 한가운데에서 활약하기 어려운 게 그 이유.

선각자와 펠버가 성벽의 방어를 지원해주는 사이, 그는 측면에서부터 제국군의 지휘체계를 직접 타격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작전이다.

애초에 시셀라와의 싸움에서 최대한 힘을 아낀 것도, 이 공성전에서 활약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이 정도 규모를 지휘하려면···아예 황혼 기사단이 직접 왔겠군.’

뿌우우우―

“기사단이다! 황혼 기사단이야!”

“우, 우린 살았어!”

그때 저 멀리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겁에 질렸던 제국군 병사들의 안색이 한결 나아진다.

시끄러운 소음 사이로 점점 커져가는 말발굽 소리와 철갑의 마찰음.

안 그래도 회백전도의 힘을 사용하려던 댈런은, 심상의 전개를 멈추고 마력을 갈무리했다.

이거 찾아갈 필요도 없었군. 경험치가 제 발로 와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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