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22화 (222/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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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선택(3)

만신전의 광전사, 후아르프는 눈알을 뒤룩 굴렸다. 그는 다가오는 성기사를 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흐으.”

제대로 된 년이었다.

갑옷 안쪽에서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신성문신은 물론이요, 검을 뒤덮은 순백의 광채와 그 모든 것을 망라하는 날카로운 기운까지.

성벽 위로 투입된 뒤로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들만 상대하다가, 드디어 제대로 된 전사의 피를 맛보는 건가.

초월자들의 도시라기에 한껏 기대했던 마음이 살짝 식으려 했는데, 다시 한번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흐···크흐흐.”

“이런 개씹···자꾸 예전 입버릇 나오게 하네.”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파른. 내 뒤로.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예.”

루시아는 신성 문신을 최대로 활성화하며 외눈의 소년을 뒤로 물렸다.

미친놈처럼 침을 줄줄 흘리는 모습이었지만, 저 광전사의 실력은 분명 진짜였다.

투박한 칼날에 거칠게 휘감긴 검기. 붉게 충혈되어 마력을 줄기줄기 흘리는 눈.

주위에 널브러진 병사들의 시체는 하나같이 멱이 그인 채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광전사의 입가에 흥건한 핏자국을 생각하면, 수십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모두 저 한 놈에게 죽었다는 소리겠지.

‘피를 마셔서 힘을 증폭시키는 혈술······. 그런 권능을 가진 신이 만신전에 있던가?’

온갖 것에 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만신전이니만큼 없다고 확언할 수는 없겠지.

신도의 숫자를 떠나서 말파리의 신이나 모기의 신까지도 존재하기는 할 테니까.

다만 루시아는 눈앞의 광전사가 지닌 힘을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저 광전사는 일시적이지만 분명 5위계에 한 발쯤 걸친 초인.

신도조차 몇 없는 허접한 신격이, 종을 초월할 수준의 힘을 내렸다고 보기는 힘들었으니까.

‘혈술하면 떠오르는 건 뱀파이어긴 하지만, 백작은 제국과 수백 년 동안 적대관계인데······.’

아무래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의문은 아니겠지. 루시아는 상념을 갈무리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입가를 슥 닦은 광전사 역시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상처투성이 몸을 뒤덮고 폭발적으로 피어오르는 암적색 기운.

쾅!

발밑의 석재에 금이 쩍 가는 것과 동시에, 근육덩이 거체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의 속도로 놈이 달려들고.

스아아악―

신성력이 넘실거리는 검끝이, 짐승에 가까운 광전사의 궤적을 따라 쏘아진 순간이었다.

[당신이 그 성기사군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악마 살해자.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백색 검. 예언의 주역을 지켜내기 위해 초월의 자리에 닿은 수호자.]

아니, 분명 아주 잠깐이지만 시간이 멈췄다.

날카롭게 뻗어나가던 검격이 멈춘 건 찰나.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자연스러운 간극이었지만.

“···금강궁의 초월자시군요.”

한껏 예민해진 성기사의 감각은, 그 간극을 어렴풋하게나마 짚어낼 수 있었으니까.

“네. 맞아요.”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공중에서 얼어붙은 광전사의 곁.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뻗어냈던 검을 천천히 회수했다. 소녀의 키는 자신보다 못해도 두 뼘 이상 작아 보였다.

제국군이 침공하는 이번 위기에서, 결계책률이 해지된 금강궁의 초월자는 모두 열둘.

성벽을 사수하며 싸운 지난 사흘 동안,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의 얼굴은 모두 한 번씩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눈앞에서 광전사를 단숨에 제압해버린 저 소녀가, 댈런과 일행을 구하러 갔다는 마지막 한 명.

금강궁의 초월자들 중에서 가장 강대하고, 가장 오래 살아온 존재라며 에버론이 말하던······.

“심문관님, 저분께서 설마 그 할망구라는···?”

“···파른?”

“그, 아니, 절대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하아······.”

우드드득!

“크허···어윽······.”

허공에 박제된 듯 고정되어 있던 광전사의 사지가,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사정없이 뒤틀렸다.

비쩍 마른 나뭇가지처럼 몇 번이나 꺾이고 비틀리는 광전사의 육체.

“···힉.”

실수한 걸 깨닫고 제 입을 틀어막은 소년의 얼굴이, 그 광경을 보고 하얗게 질려갔다.

“오해하지 말아요. 저 아이에게 악감정은 없으니까.”

“······.”

“에버론 라크탈라 이 빌어먹을 새끼. 밖에서까지 그딴 소리를 하고 다닌다 이거지?”

우지지직!

파들거리다가 축 늘어지는 만신전의 광전사.

루시아는 없던 오해도 생겨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

다행히도 오해가 커질 일은 없었다.

루시아와 파른에게 선각자의 이상한 별명을 알려준 장본인이 머지않아 합류한 것이었다.

“고생했어, 할망구.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설마 외부인 앞에서까지 그렇게 부를 줄은 몰랐군요. 어릴 때처럼 매라도 맞아야 정신 차리겠습니까?”

날카로운 기색으로 쏘아대는 말. 허나 새침하게 흘리는 눈빛마저, 젖살도 안 빠진 얼굴 때문에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오롯한 초월자의 존재감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외견은 파른과 비슷한 연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어찌됐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떠나, 선각자의 등장 이후 공성전의 판도는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꽈광― 쿠르르르!

제국군의 포탄이 성벽을 부술 때마다 동틀녘의 하늘에 별 하나가 나타난다.

여명의 햇살 사이로 내리쬐는 별빛이, 성벽의 부서진 부분에 닿자마자 시간이 역행.

별빛은 무너진 곳을 순식간에 원래대로 수복시키고, 한술 더 떠서 포탄을 날아온 궤적을 되짚어 날려 보냈다.

그뿐 아니라 지난 며칠 동안 엘가이아 마탑과 샤니아 필로폰이 애써 보수해낸 부분들마저, 내리쬐는 별빛 아래에서 아예 피해를 입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 덕택에 끝없는 성벽 보수 작업에서 자유로워진 마탑이, 펠버와 함께 공격에 가세하면서 적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중이었고.

“···와아.”

무거운 석재들이 저절로 일어나 붙는 모습을 보며 작게 탄성을 뱉는 소년 성기사.

드넓은 성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괜히 반신이라 불리는 게 아니니까.”

꾸르륵―

비둘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등장한 시에나가 말했다.

“5위계 초월자가 단신으로 군대와 맞서는 게 가능하다면, 6위계 초월자는 전장 전체를 홀로 주무를 수 있지.”

가볍게 어깨를 두들겨 주며 파른을 지나친 그녀는 세 사람 앞에 섰다.

“남부 지구의 낮은 거리 거주민들은 최대한 대피시켰어. 동쪽과 서쪽의 경계선 마을에 임시 난민촌을 꾸렸고.”

“고생하셨습니다, 시에나.”

“안쪽 치안은 가웨인이 침묵중대를 직접 이끌고 담당하기로 했고, 외곽은 내 까마귀들이 경계하는 중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만 단위의 거류민들을 대피시키느라 적잖이 피로가 쌓인 걸까. 시에나는 거멓게 내려앉은 눈두덩을 문지르며 성벽의 타구에 걸터앉았다.

성벽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녀에게 백발의 소녀가 다가갔다.

“오랜만이에요, 시에나 에클라시아. 많이 자랐군요. 우리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잘 성장해주다니, 고마울 따름이에요.”

“안 잊었어.”

날 서린 한마디. 소녀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세 사람 앞에 섰을 때 역시, 시에나는 그녀를 향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당신들은 내 어머니가 죽는 걸 방관했지. 그런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고, 막을 힘 역시 있었으면서도.”

“시에나, 전지가 곧 전능이 아니라는 건 당신도···.”

“어떤 구실 좋은 이유를 대봐야 희생자에게는 핑곗거리일 뿐이야. 알잖아?”

소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에도 화살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을 내려다볼 뿐. 펠버와 선각자가 합류한 뒤, 서서히 이쪽으로 균형추가 넘어오고 있는 전장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러더라고. 자기는 잃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고. 잃는 게 두려워서 물러나는 순간, 더 쉽게 잃을 뿐이라면서.”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잃어버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지. 결국 선택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이야기야. 도시를 집어삼키는 마녀가 될지, 아니면 힘없는 자들을 돕는 친구가 될지.”

“운명의 강물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해도, 뻗어나가는 갈림길을 선택하는 건 자의를 가진 존재의 특권이죠. 종국에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지는···.”

“할망구, 빌어먹을 주문쟁이처럼 이야기하지 말아줄래?”

선각자가 입을 다물었다. 소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그 말투 어딘가 익숙하군요. 필로폰이 한 이야기가 맞나봐요.”

“샤니아? 그 약에 취한 노인이 하는 말을 믿어? 차를 술처럼 들이키는 인간이 대체 뭐가 좋다고···.”

쿠르르릉······.

저 멀리 제국군의 진형 한가운데. 먹구름이 서서히 짙어지고 있었다.

먹구름이 드리운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시에나의 눈이 문득 이채를 띄었다.

“···설마.”

“댈런 때문인가요? 그는 지휘체계를 한 번 쓸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무리인 것 같으면 바로 빠지겠다고 했으니 큰 걱정은···.”

“아니, 그게 아니야.”

시에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어디선가 나타난 수십 마리의 크고 작은 새들이 순식간에 그녀를 둘러쌌다.

[잠시만 다녀올게.]

“시에···!”

작은 회오리처럼 비행하는 새들 안쪽에서, 마녀의 나직한 전성이 흘러나왔고.

푸드드득!

이윽고 사방으로 흩어진 새들 사이에,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두두두두···!

거세지는 말발굽 소리. 위협적으로 불어닥치는 저릿한 살기의 파도.

좌우로 넓게 갈라진 병사들 사이로, 말에 오른 수십 명의 기사가 진형을 갖추고 몰려오는 게 보였다.

‘황혼 기사단이군.’

기사들의 갑옷은 황동빛이었다. 전신에 빼곡하게 새겨진 룬 문자와, 흉갑 한가운데 박힌 큼직한 수정이 눈에 띄는 전신갑주.

‘황동 자체는 그리 단단한 금속이 아니지만, 마력 효율은 순은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나지. 방호능력을 갑주 자체가 아니라 새겨진 룬 마법에 의존하는 방식이군.’

대장장이에게 용골 가공술을 계승한 이후로, 무구들을 보기만 해도 이런저런 지식이 머릿속에 흘러들어온다.

소유한 병장기는 종종 상대방의 수준과 능력에 직결되는 바, 이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런 자잘한 지식의 효용은 꽤나 높았다.

한편 저 갑옷은 제국의 아인종 천시 문화에도 불구하고, 난쟁이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아인종들이 거주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물론 그 대부분이 노예나 하층민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지만.

“공격 중지! 명령 없이 공격하는 자는 내가 직접 참수하겠다!”

상념을 흘려넘기는 사이 어느새 기사단은 댈런을 크게 둘러싸고 있었다.

병사들로 구성된 넓은 진형 한가운데, 수십 미터 반경으로 원형의 포위망을 구축한 기사들.

공격 중지를 외치는 기사는 나머지 기사들의 지휘관이겠지.

제국 내에서 황혼 기사단이 가지는 위상을 생각하면, 저자가 이 군대 전체의 총지휘관이라 생각해도 무방했다.

철컥!

말 위에서 서슴없이 뛰어내리는 기사. 다른 기사들보다 조금 더 화려한 문양의 투구를 보며, 댈런은 자연스레 허리띠에 손을 얹었다.

“백금패 용병 댈런. 맞습니까?”

“맞다.”

화려한 투구의 기사가 묻고,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허리띠의 손은 이미 도끼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쥐고 있었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사이 호흡을 끊고 도끼를 던지는 건,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워진 동작.

느껴지는 기운이 5위계의 초인쯤 되어 보이는 만큼, 조금 더 대화에 어울려주며 틈을 찾는다면···.

“반갑습니다. 황혼 기사단의 단장, 부크반이라고 합니다.”

“···뭐 시발?”

은패 용병 부크반?

내가 이름 팔아먹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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