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23화 (223/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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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선택(4)

“···황혼기사단장 부크반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떨떠름한 듯한 어조로 다시 이름을 말하는 기사단장.

통성명을 하자마자 욕을 들어먹은 것치고는 그래도 무던한 반응이었다.

철컥.

화려한 투구를 벗어들자, 길게 기른 적갈색 머리가 폭포처럼 어깨로 떨어진다.

청년과 중년의 경계에 걸친 듯한 나이대. 곳곳에 흉터가 또렷한 선 굵은 얼굴. 개중에도 왼쪽 눈 위아래를 가로지른 가장 큰 흉터의 존재.

댈런은 사내의 얼굴을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은패 용병 부크반.

댈런은 그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었다.

‘미궁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시에나와 접선하기 위해 이름을 팔아먹었었지.’

당시 댈런은 까마귀 둥지를 방문하자마자 비밀 암호를 사용해 시에나를 호출했었다.

문을 두드리는 횟수와 박자로 구성된 비밀 암호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 그녀가 진정한 친구라고 여겨지는 상대에게만 알려주던 것.

어떻게 알았냐는 그녀의 추궁에, 당시 댈런은 부크반의 이름을 팔아 상황을 무마했었지.

누구보다 뛰어난 정보상인 그녀 앞에서, 대놓고 남의 이름을 팔아먹을 수 있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부크반은 원래 중반부쯤에 이미 사망했어야 할 인물이니까.’

부크반의 신분은 사실 처음부터 은패 용병이 아니었다.

그는 황혼 기사단의 일원으로, 기사단 내부의 정보부에서 일하던 제국 기사.

시에나가 알고 있던 은패 용병이라는 신분은, 정보부의 임무를 맡아 미궁도시로 파견을 나가며 임시로 만든 가짜였다.

시에나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건 그녀가 부크반과 교류하던 당시, 까마귀 둥지의 정보망은 미궁도시 바깥으로 크게 뻗어나가기 이전이었기 때문.

‘원래대로라면 파견이 끝나고 기사단으로 복귀한 뒤, 정찰대장의 직위를 받고 뱀파이어 백작의 영토 접경지를 순찰하게 된다.’

이후 그는 순찰대를 이끌던 중 의문의 집단에게 습격당해 죽음을 맞이하고, 사인을 조사한 제국은 습격이 뱀파이어의 소행이라는 걸 알아낸다.

그리고 후반부의 서막을 여는 제 2차 혈귀전쟁은, 부크반의 죽음이라는 불씨에서부터 피어오르게 됐고.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시간조차 없었지. 튜토리얼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중반부랑 후반부가 이어졌으니까.’

수백 회차의 플레이 중에도 이번 종말의 진행 속도는 독보적으로 빨랐다.

혈귀전쟁 급의 거대한 사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밖에 생략된 주요 이벤트만 수십 개에 달할 지경.

게임과는 달리 현실은 굉장히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만큼, 그 변화 속에서 죽었어야 할 인물이 살아남게 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부크반 역시 펠버나 볼크마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

본디 죽었어야 했으나 살아남았다.

뿐만 아니라 게임에서는 좀처럼 꽃피우지 못했던 재능을 활짝 피워내기까지 했다.

마물의 대대적인 습격과 전란의 기운은 기존의 위계질서가 변화를 맞이하기 좋은 환경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기사단장의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필시 그만한 재능의 결실을 선보였거나, 제국의 운명을 뒤흔들 수준의 전공을 올렸을 터.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요. 기사들을 왜 물린 건지 궁금한 겁니까?”

“···그런 거라고 해두지.”

“제가 모시는 빛의 신께서 당신의 수급을 직접 취하기를 원하시거든요.”

얼씨구. 거기다 사제까지 됐어?

기사단장의 살벌한 선언에, 댈런은 피식 웃으며 허리춤에서 도끼를 뽑아 들었다.

“그러고 보면 항상 궁금하긴 했지.”

“뭐가 말이죠?”

“내가 만들어낸 가능성이 과연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이 세계에 떨어지고서 그가 손에 넣은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모니터 너머의 반복된 실패들을 회수하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키워나가는 스스로의 육신과 심상.

다른 하나는 그렇게 손에 넣은 힘을 사용하며 비튼 분기점들 사이에서, 의도치 않게 움트고 자라나는 다른 영혼들의 가능성.

전자는 말 그대로 자신의 힘이기에 그 성장과 한계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으나, 후자는 아무리 모니터 너머의 정보들을 줄줄이 꿰고 있다고 해도 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백안의 선각자가 말한 것처럼, 지옥의 대악마라도 비틀 수 없는 게 운명의 강물이라면.

이미 그로 인해 한 번 비틀리고 범람한 강물 속의 운명들은, 과연 그 가능성을 어디까지 뻗어낼 수 있을까.

과연 범람해서 강둑에 흘러넘치는 것으로 끝일까. 아니면 아예 새로운 지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종국적으로는 한 번 비틀린 이상 댈런의 도움이 없더라도, 그 스스로 결말을 피해 나가는 또 하나의 지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최선을 다하는 것과는 별개로, 모든 결과를 알 수는 없는 법이지.”

끝으로 치달을수록 승패는 점점 불투명해져만 간다.

수백 회차의 반복된 시도들 사이에서, 현재의 시점까지 살아남은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은 한 번도 디뎌보지 못한 미답의 영역.

전무후무한 가능성을 손에 넣은 지금이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 세계는 내가 실패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그게 궁금해졌다.”

스스로의 생존만을 위해 달려오던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자리 잡았다는 건.

그만큼 이 땅에 떨어진 후 맺어온 인연들이 소중해졌다는 의미겠지.

“그렇다고 노인장이나 대장장이 영감을 팰 수는 없는 노릇이잖냐.”

“···예언의 주인공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더니, 아주 기고만장함이 도를 넘어섰군요.”

“파웰의 종자라고 했지? 그럼 죽이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겠군.”

“이교도다운 답변. 과연 그렇게···!”

쉭―

어절과 어절 사이 호흡. 손끝을 떠난 도끼가 그 간극을 끊어놓는다.

공간을 가르며 사라진 도끼가 다시 나타난 곳은, 십수 미터쯤 떨어져 있던 부크반의 눈앞.

「회명(回冥) : 발화(發火)」

시퍼런 도끼날이 성화를 머금은 채 번뜩이고, 도끼에 내재한 유물의 힘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였다.

콱!

“이런 잔재주···!”

억센 손아귀가 그 움직임을 잡아 멈춘다.

성화가 타오르며 손과 팔뚝을 통째로 집어삼킬 지경임에도, 파르르 떨리는 도끼를 놓지 않는 부크반.

댈런의 신형 역시 어느새 원래의 자리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회명(回冥)」

일렁이는 잿빛과 함께 공간을 넘어 그가 나타난 곳은, 다름아닌 부크반의 등 뒤.

꽈광―!

지르밟은 발밑에서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상대는 못해도 5위계 이상.

거기다 만신전에서 가장 제일가는 주신, 빛의 신 파웰을 따르는 사제였다.

반쯤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기 전에 쓰러뜨리는 게 상책.

쉬이익―

공간을 넘나든 가속을 남김없이 더해내어, 뽑아든 성검을 벼락같이 내리긋는다.

반의 반 호흡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에, 부크반 역시 몸을 틀며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르고.

쩌──────

검과 검이 만난 순간, 땅이 반으로 뚝 갈라졌다.

***

쿠과과과과······!!

지면이 뒤집히고 토사가 치솟는다.

파도처럼 일어난 흙더미와 그 사이에 뒤섞인 박살난 기반암 조각들.

충격이 땅 아래를 휩쓰는 것과 함께, 근방 수십 미터의 지면이 순차적으로 뒤집히며 부서진 잔해들을 토해낸다.

그 광경은 마치 가파른 절벽에서부터 시작된 산사태가, 산 아래를 덮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뭐, 뭐야!”

“으아아악! 다들 피해!”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뒤덮어버리는 토사의 파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제국군의 진형은, 수 미터 높이로 휘몰아치는 급류 속에서 일거에 무너졌다.

흙더미에 파묻힌 사람만 수백 명 이상. 수박만 한 돌덩이에 맞아 쓰러지거나, 폭발의 여파로 먼 거리를 날아가 내동댕이쳐진 경우도 수두룩할 지경이었다.

“부상병! 여기 부상병 있다!”

“끄아아아! 마법사들은 대체 뭐하고 있는 거···!”

상당한 규모의 지진이라도 난 듯한 재해의 현장.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저 광경이 단 한 번의 격검으로 만들어진 거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만들어낸 두 초월자는, 이 순간에도 재해의 중심부에서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검과 검이 얽힌다. 그건 단순한 검격만의 교환이 아니었다.

빈손으로 검을 쥔 손을 밀어내고, 밀어낸 손을 잡아서 꺾으며, 어깨로 들이받아 관절기를 풀어내고, 들이받는 몸뚱이를 그대로 흘려내며 땅바닥에 메다꽂는다.

손과 발이 모두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공방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싸움.

재능과 단련, 둘 모두를 거머쥐고 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들의 박투다.

찌이이잉···!

머릿속을 얇은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

오감과 육감이 상대방과 주변 환경을 끊임없이 훑어내리며, 인간의 두뇌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정보량을 실시간으로 때려 넣었다.

계산과 수 싸움을 넘어선 직관의 대결. 허나 그 직관을 빚어내는 것 역시 숱한 계산이라는 모순의 교차.

후끈 달아오른 두뇌와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의 반사신경은,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열 수 앞을 내다보고 모든 동선과 궤적을 예측해낸다.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놀랍군요! 북녘의 이교도 야만인의 손에서 신성한 불이 피어오르다니!”

일 초에 수십 번씩 공방이 오가는 와중에도, 입꼬리를 삐뚜름히 들어 올리며 비아냥대는 부크반의 조소.

댈런 역시 마주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격검의 소음 사이로 마력을 실은 목소리가 오갔다.

“불만 있냐?”

“글쎄요! 솔직히 성기사단의 전쟁신이나 서리고원 너머에서 숭배받는 야만신이나, 제 눈에는 그게 그거처럼 보이는지라.”

“그 말 성기사들이 들었으면 발작하겠는데.”

“그래봐야 수백 년 전에 퇴물이 된 전쟁광들! 제가 악마였어도 그치들은 두렵지 않았을 겁니다!”

악마의 심장만을 노려 꿰어버리는 금발 성기사의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댈런은 부크반의 마지막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피식 웃으며 상념을 흘려넘기는 동시에, 입술을 달싹여 나직하게 시동어를 읊어낸다.

“엑시.”

머나먼 서쪽 대사막의 고대 문명이 만들어낸 탄령.

영혼 재단술의 정수가 녹아있는 단어에 의지가 담긴 순간, 무형의 파동이 주변 일대를 훑었다.

투확―

직후 사방에서 수백 자루의 병장기들이 일제히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몇 차례나 일어난 토사의 파도로 땅에 파묻히거나 널브러진 무구들 뿐만 아니라, 생존한 병사들이 들고 있던 무기들까지 제멋대로 주인의 손을 뿌리치고 날아가는 광경.

나름대로 초인 집단인 황혼 기사단은 끝까지 제 무구를 붙잡고 있었지만, 병사들의 평범한 악력으로 탄령의 힘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촤르르르···!

수백 정의 창칼이 동틀녘의 햇살을 받아 주홍빛으로 번뜩인다.

토사의 파도에서 살아남은 황혼 기사단은 물론이고, 부크반마저도 입을 살짝 벌릴 정도의 충격적인 광경.

댈런이 손가락을 까딱이는 순간, 무구에 깃든 의지가 주인의 뜻에 반응하고.

쐐애애애액!

하늘을 수놓은 병장기들이 일제히 낙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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