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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선택(5)
두두두두두―!
이미 몇 차례나 갈아엎어진 땅이 다시 한번 뒤집힌다.
점이나 선이 아닌 면 단위의 융단폭격.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떼처럼, 수백 정의 창칼이 거센 포물선을 그리며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투웅― 사아악!
방패가 운신을 제약하고, 장검이 급소를 노린다.
쉭! 카각···!
투창이 사각을 찔러오는 동시에 재빠르게 관절부를 긁어내는 날 선 단도.
원래라면 평범한 창칼 따위로 황혼 기사단의 룬 갑주를 뚫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허나 고대 모래바람 왕조로부터 전승된 탄령은 신비라고 불리기에 부족함 없는 스킬.
수백 정의 병장기는 단순히 댈런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걸 넘어서서, 그의 마력을 원시적인 검기의 형태로 희미하게나마 머금고 있었다.
콰직!
갑옷의 룬이 하나씩 빛을 잃어간다. 흉갑 한가운데 박힌 큼직한 보석이 기운을 잃어가듯 빠르게 점멸했다.
룬 마법으로 부여된 자가 수복 기능은 갑주를 부분적으로 고치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파괴되는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
실시간으로 너덜너덜해져 가는 갑주에 부크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가 외쳤다.
“파웰이시여! 당신의 종복에게 이 역경을 극복할 힘을 주소서!”
파아아앗―!
저 동쪽 지평선에서 빛의 물결이 파도처럼 쏟아진다.
동틀녘의 강렬한 빛살에 일그러지듯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과 대지.
반쯤 넝마가 된 갑옷 차림의 부크반은, 그 햇빛과 비슷한 색채의 신성력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시셀라가 만신전의 주교에게 강림했던 것처럼, 빛의 신 파웰이 직접 자신의 힘을 부크반에게 쏟아붓고 있는 것.
“제 영과 육을 모두 바치오니! 이 전장을 굽어아아악―!”
이내 신을 찾는 절절한 외침이 비명으로 뒤바뀌고, 곧이어 목구멍 안쪽에서 솟아오른 화염이 그 비명마저 삼켜버린다.
입과 코, 귀와 눈.
얼굴의 모든 구멍을 비집고 나와, 아예 머리를 통째로 불태우기 시작하는 화염.
머지않아 부크반의 전신이 불꽃에 삼켜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적창이 조용히 말했다.
[댈런, 저자에게서 둘 이상의 기운이 느껴진다. 만신전이라는 놈들이 아주 작정한 것 같구나.]
‘맞소.’
황혼 기사단은 제국의 최대 전력 중 하나.
5위계에 닿은 초월자인 기사단장을 불태울 정도의 강림은, 하나의 신격만으로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빛의 신 파웰과 불의 신 나라. 못해도 두 주신의 힘이 부크반에게 동시에 쏟아지고 있는 광경.
그건 만신전의 주신들이 이 자리에서 댈런을 끝내버리기로 작정했다는 뜻이겠지.
놈들의 뒷배를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후으······.]
소리 없는 처절한 비명이 끝나고, 전장 위에 부크반의 가쁜 신음이 아스라이 울린다.
녹아내린 성대 대신 놈의 목소리를 전하는 전성.
댈런은 문득 고개를 동쪽으로 돌렸다. 동틀녘의 태양은 지평선을 막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영역 완전개방 : 단말마로 타오르는 황혼의 영광」
떠오르던 해가 반전했다.
***
[···필멸자가 창천을 비추는 위대한 존재와 가까워지는 순간은, 하루가 저물어가는 황혼녘뿐이죠.]
중후하게 울려 퍼지는 부크반의 전성.
그 목소리와 함께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지금 시간대가 이른 새벽이라는 걸 생각하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허나 불타는 듯 새빨간 이글거림을 머금은 태양은, 왔던 길을 역행해 다시금 지평선의 끄트머리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땅에서 바쳐진 고통의 비명은 다 만신의 영광과 제국의 번영을 위한 제물.]
녹아내린입술이 달싹거린다.
그 순간 태양에서부터 방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성광이 뻗어져 나왔다.
쯔아아아아──
햇빛이 닿는 모든 곳에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사람이며 사물을 집어삼키기 시작하는 붉은 화염.
[황혼 아래에서 스러진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화르르르르···!
반경 수백 미터 안쪽에서 불에 타죽은 시신들이 완전히 바스러지며, 고통스레 일그러진 영혼들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주휘거령(朱輝巨靈)」
회오리바람이 주변의 사물을 빨아당기듯, 일대를 뒤덮은 원혼들이 순식간에 부크반의 발아래로 빨려 들어간다.
곧이어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희끄무레한 붉은 거인의 형체.
집채만 한 거인은 곧장 네 쌍의 팔을 휘둘러 사방으로 열기를 뻗어냈다.
쿠과과과과···!!
그 손짓에 따라 열기가 진득한 파도가 되어 몰려오고, 돌과 흙마저 불태우며 일대를 말 그대로 불바다로 만든다.
“끄아아아! 뜨거워! 뜨거워···!”
“장비에 불이 붙었···아, 아니 내 몸에도 불이 붙는다!”
“햇빛이야! 해를 피해라!”
적아를 가리지 않는 새빨간 화염의 장막,
적색 거인이 만들어낸 건 문자 그대로의 불지옥이었다.
제국군 진영 한가운데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공성 장비와 병사들을 집어삼키며 군대 전체를 붕괴시켜간다.
근방 수백 미터의 지경을 완전히 살라 먹고도,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더 넓게 퍼져나가며 제국군을 집어삼키는 화마.
우우우우······.
녹아내린 대지 위에서 원혼들의 신음이 끊임없이 맴돌고, 그 영혼을 흡수할수록 붉은 거인 형태의 영체는 점차 덩치를 키워간다.
처음에는 10미터쯤 되어 보이던 체고가, 어느새 미궁도시의 청동 성벽과 눈높이를 맞출 수준까지 성장할 정도.
「빙정(氷晶)」
「개화(開花)」
댈런은 손안에서 얼음꽃을 피워올려 햇빛과 열기를 막아내며 짧게 혀를 찼다.
‘···돌이킬 수는 없겠군.’
본신의 힘만으로도 부크반의 무력은 이미 5위계의 끝자락에 닿아있었다.
아군이 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이 자리에서 죽이기보다 제압해서 포섭하려던 게 원래의 계획.
동료로 삼은 적도 몇 번쯤 있었기에, 일단 무력화시키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구슬릴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만신을 강림시켰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부크반이 영역의 완전개방에 성공한 건, 두 주신이 강림하면서 막혔던 벽이 뚫렸기 때문.
그건 단순히 만신전을 믿거나 사제로 섬기는 행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강림이라는 건 결국 대상과 의식을 공유하는 일.
둘이나 되는 주신을 받아들인 이상, 만신전의 뒤에 도사리는 존재에 대해서도 당연히 인지했을 테였다.
‘그 모든 걸 알고서도···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지금의 선택을 내렸다는 거고.’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만신전의 목적은 인류의 존속이나 구원 따위에 있지 않다.
놈들은 미궁도시뿐 아니라 대륙 전체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사실상 여타 악마들과 다르지 않은 존재들.
그 의지에 동조하는 이상 부크반은 명백한 적이었다.
그리고 상대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백향근(百向根)」
얼음꽃이 수백 가닥의 뿌리를 뻗어낸다. 대충 딛고 설 땅을 만들어낸 댈런은 검을 고쳐 쥐었다.
슬쩍 확인해보니 도시 쪽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선각자를 포함한 초월자들이 만신전의 힘을 상쇄하고 있는 것.
‘뒤는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군.’
「영역 개방 : 닫힌 설산의 하늘」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검붉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과 동시에, 댈런의 발밑에서 무채색의 파동이 번져나간다.
「답보(踏步)」
얼음의 뿌리로 만들어진 땅에 내딛는 한 걸음.
꽈광―!
그리고 흐릿해지는 신형에 뒤이어 폭발하는 얼음뿌리 대지.
「뇌조(雷條)」
「말원(抹原)」
왼손에는 새파랗게 타오르는 전류의 가지를, 오른손의 성검에는 검기마저 지워버리는 잡음을 맺은 채 동시에 휘둘러낸다.
「영역 개방 :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격돌의 순간 잿빛 음영이 일대의 하늘을 회백색으로 물들이고.
「회명(回冥)」
「구연답산(九聯踏散)」
붉은 거인의 팔방을 점한 채, 아공간에서 꺼내든 유물 무기들을 내지르는 여덟 개의 인영.
우우우우우···!
거인의 영체가 함성을 지르며 네 쌍의 팔을 뻗어왔지만, 댈런은 굳이 정직하게 대응해주지 않았다.
“룩스.”
그를 제외한 여덟 인영이 일제히 무기를 손에서 놓고 물러난다. 붉은 거인이 주인 잃은 무구들에 손을 댄 순간, 유물 무기에 담긴 힘이 일제히 폭발했다.
꽈과과과과―!
삽시간에 지근거리에서 연달아 터져 나오는 마력의 파도.
다시 한번 흐릿해진 댈런의 신형이, 그 폭발을 가로질러 부크반의 면전에 도달했다.
[이교도···!]
후─욱!
0에 수렴하는 간격. 대화의 호흡을 비집고 들어가는 검끝.
검과 검이 한순간에 수십 차례 교차하고, 신성력과 주문이 각자의 정광을 토해내며 흙먼지의 폭풍을 오색으로 비췄다.
무기와 손발, 신성 마법과 술식이 뒤섞이며 서로를 물어뜯고 허공에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풍영결계(風影結界)」
바람의 장막 사이로 몸을 감추고 틈을 빚어내면.
「여래주광(如來周光)」
지평선을 따라 내달리는 햇빛이 응달을 걷어내고 장막 너머를 꿰뚫어 비춘다.
「백요적명(百曜賊命)」
기사단장의 검끝에서 피어오른 빛살이, 백 갈래로 갈라져 사방을 점하고 숨통을 조여오는 순간.
「술식갑주 : 백풍갑(伯風甲)」
전신을 두르고 휘몰아치는 돌개바람이 수백 갈래로 쪼개지며, 빛살을 굴절시키고 튕겨내 통로를 열어젖혔다.
“후우···!”
머리 안쪽이 달아오르는 듯한 기이한 고양감. 저도 모르게 끌어올려지는 입꼬리.
내지른 검격이 소리의 속도를 짓뭉개며 파공성을 빚어내고, 걸음마다 발밑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기묘한 마찰음이 새어 나온다.
초월자 간의 전투는 단순히 위계의 숫자로만 우열이 가려지지 않는다.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서로의 가능성을 적재적소에 투사하는 싸움에서는, 쌓아 올린 기예와 타고난 직관만큼이나 가능성의 가짓수 자체도 중요하기 때문.
투가가가가각!
그렇게 상대방의 밑바닥을 드러내기 위해, 공방의 속도는 갈수록 변칙적이고 빨라져만 간다.
서로의 위치를 거듭 뒤바꿔 점해가며, 두 사람의 신형이 갈지자로 얽힌 순간이었다.
「영역 공명」
「닫힌 설산의 하늘」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두 하늘이 함께 포효했다.
「쌍천(雙天)」
검붉은 먹구름과 잿빛의 천구가 공명하며 일대의 공간 자체를 격리.
「뇌람(雷濫) : 공명」
동쪽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쓸어 담아 가둔 채, 수십 줄기의 새파란 낙뢰가 먹구름을 뚫고 지면을 강타한다.
「뇌령신수(雷零神樹)」
━━━━━━━!
수십 줄기 벼락이 한 다발로 모여들어 만들어진 거대한 나무가, 거인의 정수리를 꿰뚫고 그 안쪽에 뿌리를 내린다.
성벽보다도 훨씬 커진 덩치를 안에서부터 깨뜨려 부수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전격의 뿌리.
우어어······.
거인이 무너지고, 전장을 비추던 햇빛의 기세가 줄어든다.
부크반의 몸뚱이는 뇌전의 뿌리 끝에 쓰러져 있었다.
[커허···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부크반은 낙뢰를 이겨내지 못하고 전신의 반쪽이 까맣게 타버린 상태였다.
불에 탄 나뭇가지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불타버린 놈의 육신.
두 주신의 힘을 빌려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선 게 아니었다면, 전신의 절반이 바스라진 지금 숨이 붙어있을 수조차 없었겠지.
[끄···으······.]
고통스럽게 달싹이는 입술. 댈런은 망설임 없이 성검을 들어 놈의 목을 잘라주었다.
생각보다 싱겁게 마무리된 싸움이었다.
6위계에 올라 영역을 완전히 개방했지만, 부크반의 감각은 폭증한 힘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어찌됐건 단신으로 6위계의 초월자를 꺾었다는 건 꽤나 큰 수확이었다.
지저룡은 상성 상 적창이 완벽한 우세를 점해줬고, 시셀라의 화신체는 시간만 끌었을 뿐 선각자가 알아서 마무리하지 않았던가.
쑴의 화신체와 싸울 때 역시도 차리나가 목숨을 바쳐가며 놈에게 상처를 입혀두었고, 하이 오크의 대선조로 추정되는 존재에게 미지의 힘을 내려받은 끝에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허나 완전한 신위에 오른 악신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반신격 정도는 가볍게 때려눕힐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바.
‘이제 몇 걸음 안 남았나.’
까─악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득 까마귀 울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댈런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곁을 돌아봤다.
까만 깃털이 흩날리는 가운데, 시에나가 착잡한 눈으로 부크반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