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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의 땅(1)
자박.
바싹 마른 잔해들이 발밑에서 바스러진다. 시에나는 머리를 잃은 부크반의 시체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부크반과 연락이 끊긴 지 몇 년이나 지났어.”
초조한 듯 입술을 매만지며 꺼내는 말.
“까마귀 둥지가 제대로 자리 잡기 전부터 날 많이 도와줬었지.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난 낮은 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유감이오.”
“당신을 처음 본 날, 당신이 나한테 부크반의 친구라고 했던 거 기억나?”
“···그랬었나?”
댈런은 약간 과장을 섞어 어깨를 으쓱했다. 시에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었던 거 알아. 당신은 특이한 걸 많이 아는 사람이니까. 사실은 오늘 처음 본 사이지?”
그건 아니긴 한데. 댈런은 그렇게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모니터 너머에서 본 것까지 치면 질리도록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 2차 혈귀전쟁의 발단은 뱀파이어의 습격으로 인한 부크반의 죽음이었던 바.
습격을 저지해 혈귀전쟁을 막아보려는 시도도 몇 차례나 했었고, 나중에는 사전에 그를 납치하거나 살해해서 습격 사건 자체를 없애보려고도 했었으니까.
‘굳이 꺼낼 필요 없는 이야기지.’
댈런은 시에나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시에나는 타인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어주지 않지만, 한 번 친구로 생각한 이라면 결코 등 돌리지 않는 여자.
그녀의 경계심은 몇 년을 알고 지낸 이웃이라도 섣불리 믿을 수 없는 낮은 거리에서, 어린 시절을 홀로 살아남아야 했기에 만들어진 성격이겠지.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그런 장소에서 살아남았기에, 혼자만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뤄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 것일 터였다.
어찌 됐건 그녀의 입장에서 댈런과 부크반은 모두 목숨이 아깝지 않은 친구였다.
두 친구가 싸운 끝에 하나가 죽었으니, 그녀의 상심이 어떨지는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겠지.
아무리 전쟁이라 한들 모든 아픔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시에나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댈런의 예상마저도 한참 벗어난 종류였다.
“부크반은 배신자였어.”
“배신자···?”
“내게 신분을 속였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애초에 황혼 기사단에 연줄 하나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보다는······.”
잠시 말을 고르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댈런. 만신전의 주교회 내각에서 혈령(血靈)을 주신의 일원으로 인정했어.”
“···내가 아는 그 혈령을 말하는 거요?”
“맞아. 뱀파이어들의 신. 모든 사령술사들이 따르는 악신의 이명.”
혈령이 만신전에 합류했다.
그 짧은 한마디로, 불완전하던 퍼즐이 이제야 머릿속에서 맞춰졌다.
혈령은 뱀파이어의 신이자 사령술사들의 주인, 악신 ‘테모므론’이 부리는 화신체의 이름.
물론 대외적으로는 그저 뱀파이어들이 섬기는 신 정도로 치부되고, 사령술사나 악신과의 연관은 아는 이들만이 아는 진실이다.
시에나는 그 진실을 아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고, 혈령이 주신으로 합류했다는 것만으로 만신전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까지도 추측해낸 것.
“언젠가 함께 힘없는 사람들을 구하자고···맹세했으면서.”
목 잃은 시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
시에나가 부크반을 배신자라고 단언한 것 역시, 그가 자신의 몸에 만신전의 두 주신을 강림시키는 걸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신전의 주신을 강림시킬 정도라면, 혈령의 합류와 만신전의 배후에 대한 진실 역시 알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시에나는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고개를 위쪽으로 휙 젖히며 말했다.
“후우. 돌아가자. 아직 공격이 끝나지 않았어.”
“괜찮겠소?”
“안 괜찮으면 어쩔 거야. 일단 가게는 살리고 봐야지. 안 그래?”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지어내는 눈웃음. 댈런은 휘적휘적 앞으로 나서는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저 멀리 성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투는 슬슬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부크반의 앞뒤 가리지 않은 영역 개방으로 인해 제국의 지휘부는 박살이 나버렸고, 남은 건 만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성벽을 향해 무작정 달려드는 수만의 광신도들 뿐.
어떤 전략이나 작전, 지휘조차 없는 몸부림은 초월자들의 이능에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간다.
그렇게 패배해가는 제국군의 배후에서, 검은 깃털과 푸른 벼락이 동시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전쟁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
제국군의 대대적인 침공이 막을 내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흘 동안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이어진 공성전의 결과는 제국의 처참한 완패였다.
미궁도시의 일곱 성벽 중 어느 하나 무너뜨리지 못한 채 무위로 돌아간 십만의 군세.
다만 미궁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연합 역시, 아무런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땅땅땅! 쿠궁···!
무너진 건물의 석주를 들어내고, 쓰러진 벽에서 쓸만한 벽돌을 골라내는 현장.
“어이! 그 주변 지반이 약하니까 조심해!”
“형님, 이거 굴뚝 설계가 독특해서 고치려면 기둥부터 싹 갈아야겠는데요?”
“아래쪽! 돌 굴러간다!”
쿠르르르!
망치와 정이 부딪히고 무거운 자재들이 쏟아지는 공사 소음과, 그에 지지 않는 인부들의 고함이 뒤섞인다.
나흘간 셀 수 없는 포격을 얻어맞은 청동 구역의 대로는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댈런은 무너져내린 폐허를 해체하는 현장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날아간 지붕을 천막으로 대충 때워둔 여관을 지나치고, 내려앉은 지반을 메우는 현장을 피해가며 번화가로 접어든다.
전쟁의 폐해가 가시지 않았음에도 붐비는 거리를 지나, 댈런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대로변의 삼 층짜리 술집으로 향했다.
아래쪽의 두 층은 술집으로, 위쪽 한 층은 사무실로 쓰는 건물. 새로 단 건지 아직 페인트가 마르지 않은 듯한 간판.
[까마귀 둥지]
기척을 감추고 자연스레 인파 속으로 녹아들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사방에서 귀를 찔러왔다.
“정말일세! 하늘에서 창이며 칼이 마구 빗발쳤다니까!”
“이 사람 취했네, 취했어. 거짓말을 할 거면 좀 티가 안 나게 해야지! 안 그렇나?”
“어제 루카스랑 한잔했는데, 그 친구는 한술 더 뜨더군. 자기가 지키던 성벽 서쪽에서 웬 난쟁이가 용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대포를 쐈다고 하질 않나!”
“으하하하! 머리라도 한 대 맞고 헛것을 본 게 아니고서야···.”
큰 싸움이 끝나고 나면 술집은 떠들썩해지기 마련이다.
으레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믿기지 않는 일을 봤다고 증언하는 용병들이 손님의 대부분.
그런 이야기들 중 대부분이 과장된 헛소리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나, 때로는 오히려 진실이야말로 잔뜩 부풀려진 소문에 가까운 경우가 있는 법이다.
2층으로 올라간 댈런은 카운터 뒤쪽의 숨겨진 문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끼익.
비밀 문을 지나 다시 한번 계단을 오르고, 불안정하게 삐걱이는 복도를 걷는다.
익숙한 차향이 코끝을 간질일 즈음, 복도 저 안쪽의 문에서 두런두런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급하게 새로 단장한 것치고는 꽤 잘 꾸몄는데.’
댈런은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생각했다.
가게는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냐고 시에나가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까마귀 둥지는 공성전의 막바지에 포탄을 맞고 풍비박산 나버렸다.
평소라면 가게를 지키던 버번마저도, 하필이면 그 시점에 시에나의 부탁을 받고 낮은 거리 주민들의 임시 거처를 지키던 중이었다.
가게가 무너졌다고 정보상 일을 관둘 수는 없으니, 시에나는 임시방편으로 다른 술집을 사들여 영업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매입한 곳이 바로 지금의 술집.
청동 구역 뒷골목에 있던 이전의 술집과는 달리, 새 둥지는 대로변의 넓은 대지 면적을 가진 건물이었다.
“다행히 도시 자체의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아. 남부 지구가 가장 타격을 많이 입었지만, 다른 지구들은 상대적으로 멀쩡하니까.”
[일단 광업이나 농업, 수산업은 타격이 없다는 이야기군.]
“상인 길드 연합으로부터 라이칸트 강을 따라 이어지는 물길도 여전히 튼튼하다네.”
“기사단 지부를 포함한 순은 성벽 안쪽의 구역들도···아, 댈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원탁에 앉아있던 루시아가 손을 흔들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성전이 마무리된 지 일주일. 일행 전원이 모인 건 꽤 오랜만이었다.
루시아와 파른, 펠버와 토미, 비요른의 머리 위에 꼬리 끄트머리를 올린 아카샤.
북부에서부터 함께해온 이들의 곁에는, 미스릴의 제련자 르베론과 갈리오스 상단주인 볼크마도 함께 앉아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차가 맛있네요. 샤니아 필로폰이 아끼는 제자다워요.”
“둥지의 주인은 언제쯤 오실 예정입니까?”
[조금 시간이 걸릴 거다.]
원탁의 한쪽에서 눈을 빛내는 백안의 선각자, 알리아트.
그녀의 의전이자 중앙 의회의 대표자로 따라온 천변만화의 얼굴, 에버론 라크탈라.
그리고 입구와 가장 가까운 운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 세로로 죽 찢어진 눈동자를 숨기지 않는 바텐더 버번까지.
원래는 공성전이 막 끝난 일주일 전, 그저 앞으로의 여정을 놓고 잡았던 회의였지만.
어쩌다 보니 참가자가 한 명씩 늘어나더니, 이제는 일행의 여정을 넘어서서 도시연합의 현 상황과 앞날을 논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수천 년 전의 사랑을 잊지 못해 인간들 사이에 섞여 지내는 용이라. 언제 뵈어도 로맨틱한걸요?”
[이름을 걸고 계약을 맺었으니, 그 계약의 내용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이다. 그대들의 보루에서 머물 수 있도록 형편을 봐준 건 감사하게 생각한다.]
“첫 포효께서도 이번처럼 큰일이 있을 때면 항상 도와주시잖아요. 상부상조라고 생각합니다.”
각 조직이나 단체를 대표하는 이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의례상 주고받는 말들이 빠지지 않는다.
댈런을 잠시 반긴 것과 별개로, 원탁의 회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쨌든 남부 지구 보수 작업에 인력이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약속하신 지원은 언제쯤 기대할 수 있을까요, 마탑주님?”
“엘가이아뿐 아니라 대다수의 마탑 내부가 아직 어수선하답니다. 여력이 생기는 대로 말씀드리지요.”
“철거 작업이라면 인부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화약 기술을 전수해줄 수 있소! 무기로 사용되지 않을 정도로만 가르쳐주도록 하지.”
[그나저나 기사단 쪽 동향은 어떻지? 제국과 충돌은 없나?]
“지금까지의 충돌은 국지전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만, 단장님께서는 머지않아 큰 전투가 있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인도자의 예언이라면 틀림없겠죠.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도시연합의 지원군을···.”
제국의 침공이 가져온 여파와 앞으로의 계획을 두고 각자의 집단을 대변하는 목소리들.
금강궁과 중앙 의회, 성기사단과 마탑 연합.
설령 집단을 대변하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어느 하나 영웅이라 불리지 않을 이가 없었다.
댈런은 그 모습을 보며 김이 오르는 차를 훌쩍 들이켰다.
예정보다 몇 배는 빠르게 다가오는 종말. 남아있는 시간만 생각한다면, 그 어느 회차보다 절망적인 상황이겠지.
허나 반대로 지금만큼 승산이 높아진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각 집단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종말에 맞서려 노력하고 있고, 일행의 무력 역시 악마 군세와도 너끈히 싸워볼 만하다.
유일한 문제라면 악신들, 그중에도 에낙사구스 역시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
이쪽의 방어가 굳건한 만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를 쓰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인다.’
이 회의의 본 주제는 사실 그와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선각자 역시 그걸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집단 간에 조율할 부분에서 큰 맥락이 잡히고 나자, 그녀가 찻잔을 호록 비우고 운을 띄웠다.
“댈런, 일행과 함께 제국 동쪽 혈귀의 땅으로 가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맞소.”
“제국이 성전을 선포한 지금 시점에서, 대체 거기는 왜 가시려는 거죠?”
그야 다음에 회수해야 하는 초월자의 시체, 흑마법사 회차의 결말이 거기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