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26화 (226/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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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의 땅(2)

수백 회차를 플레이한 댈런이라도, 초월자의 경지에 오른 횟수는 열 번이 채 되지 않았다.

그중 지금까지 회수한 회차는 모두 셋.

종말이 닥쳐오는 속도를 감안했을 때, 남은 회차들 중에서 회수 가능성이 있는 건 둘 정도였다.

‘마지막 회차의 시체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위치라도 기억하고 있는 나머지와 달리, 마지막 회차는 종착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 논외였다.

어쨌든 다행스럽게도 둘 중 하나는 이미 확보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있는 곳이 바로 혈귀의 땅.

물론 그걸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댈런은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만신전에 혈령이 끼어들었다더군.”

“···댈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시아가 되물었다. 댈런은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요. 만신전의 주교회가 혈령을 새로운 주신으로 인정했소. 아직까지는 내부적으로만 결정된 이야기지만, 성전으로 혼란스러운 중에 구실을 만들어 대외적으로 공표하겠지.”

쨍그랑!

성기사의 악력을 못 이긴 찻잔이 산산조각났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뜨거운 찻물.

“···죄송합니다.”

루시아가 금발을 늘어뜨리며 사과했지만, 그렇다고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이 풀어진 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도 인류의 수호자라 자칭하던 만신전이?”

“성전도 모자라 대체 어디까지 타락하려는 건지······.”

“산 채로 폭약에 절여도 모자란 놈들! 결국 악마들과 한통속이었다는 거 아닌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파른과 펠버, 그 맞은편에서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비요른까지.

사실 성전을 선포한 것까지야 백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제국 황실과 유착 관계가 있는 만신전의 특성상, 정치적인 의도가 섞여 들어갔다 치부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혈령을 주신으로 인정했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

이 자리에 앉아있는 인물들 중, 혈령이 악신 테모므론의 화신체를 지칭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째서 예정되었던 혈귀전쟁이 일어나지 않나 했더니, 그런 뒷거래가 오갔던 거군요.”

[결국 악신의 꼭두각시들일 뿐. 언젠가는 본색을 드러낼 예정이었다.]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한 건 선각자 알리아트와 고룡 버번뿐.

그때 화를 삭이고 있던 루시아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악신의···꼭두각시라고 하셨습니까?”

[말 그대로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버번. 의문이 가득한 성기사의 표정을 분 용은 백안의 선각자에게 눈짓했다.

“만신전의 신들은 사실 진짜 신격이 아니랍니다.”

백발의 소녀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악신 에낙사구스가 만든 허상. 그릇에 담긴 가짜 신일 뿐이에요.”

***

“악신의 끄나풀···?”

아까부터 침묵하던 갈리오스 상단주, 볼크마가 마침내 넋을 잃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단주의 멍한 표정을 보며 댈런은 턱을 긁적였다. 하긴, 저 양반 물의 신 시셀라를 믿었으니까 충격이 더 크겠지.

강과 바다를 통해 거래하는 상인들에게 물길은 곧 목숨줄. 때문에 상인들 대부분은 물의 주신인 시셀라의 신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용병들이 미신을 곧잘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으니까.

상행에 오를 때마다 금도금한 보여주기용 성물을 하나쯤 지니고 다닌다던지, 돈이 좀 있으면 시셀라의 이름으로 만신전에 주기적인 헌금을 한다던지 하는 식.

“맞아요. 만신전의 신들은 사령술과 주술, 흑마법으로 만들어낸 가짜 신이랍니다. 팔백 년 전 남부 제국이 건립될 즈음 에낙사구스가 손을 썼고, 지금까지 국교로 이어져 오고 있죠.”

“······.”

“제국 황도에 있는 만신전 본성에는, 그 본체라고 할 수 있는 그릇이 숨겨진 지성소가 있어요.”

“하지만 황도는 너무 뻔하게 보이는 목표지.”

댈런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놈들의 뒤를 칠 생각이오.”

만신전의 성전은 종말로 달려가는 여정의 후반부에, 악신 에낙사구스가 준비한 한 수.

종말을 앞두고 인류가 집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800년 동안 종교라는 이름으로 인류사에 침투해 만들어낸 철저한 안배다.

한 번의 침공으로 미궁도시를 완전히 함락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청동이나 순은 구역 정도는 망가뜨리려는 게 놈의 계획이었을 터.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는 놈의 예상과는 달라졌지. 예상치 못한 시점에 크게 한 번 패퇴했으니,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격을 꾀할 거요.”

“하지만 만신전의 힘은 이 전투에서 한풀 꺾였고, 성기사단과 주변 국가들에 이미 양면전선까지 펼쳐둔 상황이니까···.”

“그렇소. 혈령의 힘, 정확히는 뱀파이어 백작의 군세를 개입시키겠지.”

만신전의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였다.

제국은 이미 사백 년 전, 뱀파이어 백작에게 큰 침공을 받은 적이 있는 바.

뱀파이어들의 신을 주신으로 모시겠다는 주교회의 선포가, 기존의 신도들이나 제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칠지야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허나 전쟁의 광기는 종종 상식마저도 잊게 만드는 법.

성전이라는 명목하에 대대적으로 일어난 제국군이 크게 휘청이는 순간, 기적처럼 뱀파이어 백작의 군대가 그들을 지원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뱀파이어 족속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다툼 정도야 잊어줄 수 있을 테였다.

“교묘하군요. 전쟁의 혼란을 이용해서 마치 구원군처럼 등장시킨다니······.”

[약해진 틈을 타 다시 침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부터, 아군이라는 걸 보증하는 거나 다름없겠군.]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그 누구라도 반가울 테죠. 정말로 목마른 이에게 시원한 냉수가 주어진다면, 그게 흙탕물이든 시체 썩은 물이든 상관없는 법이니까요.”

진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선각자. 댈런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까 그랬었지. 어째서 두 번째 혈귀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나 의문이었다고.”

“네. 그랬죠. 이제 알겠군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테모므론과 에낙사구스는 경쟁을 내려놓고 서로 협력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맞소.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오?”

댈런은 씩 웃었다.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빌어먹을 악신 새끼들이 우리를 위협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지.”

거짓말이 아니었다.

수십만의 제국군에 만신전의 광신자들, 거기다 시체만 있으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뱀파이어의 군대까지.

아주 환장의 콜라보이긴 했다. 사령술의 달인인 순혈 뱀파이어의 특성상, 주변의 약소국들을 정리하면서 군대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겠지.

허나 악신들에 대해 잘 아는 입장에서, 이건 더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본디 악신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의식한다.’

대륙이 진작에 멸망하지 않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하나하나가 대지옥의 강대한 힘과 권세를 가진 악신들이지만, 기본적으로 놈들은 극도의 경쟁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

그건 같은 목표를 놓고 달려가는 선의의 경쟁 따위가 아니라, 하나뿐인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사이의 피 튀기는 경쟁이었다.

악신들은 때에 따라 최소한의 거래는 주고받아도, 전적인 협력은 좀처럼 하지 않는 존재.

‘대륙이 전부 불타고 미궁도시 하나만 남은 상황에서도, 대놓고 서로 물어뜯기를 주저하지 않는 놈들이지.’

그런 악신 중 둘이 힘을 합쳤다.

뱀파이어 백작과 제국의 만신전. 각자가 수백 년 동안 공들여 키워온 안배를 아낌없이 내걸고서.

이 정도로 악신 놈들이 똘똘 뭉친 게 언제였던가. 기억을 더듬어봐도 마지막 회차 이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물론 에낙사구스는 이 와중에도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 같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비요른.”

“뭔가?”

”에클라힘 궁전에서 약속했었지. 악신들을 죽이겠다고.”

“···그랬지.”

난쟁이의 눈이 잘게 떨렸다. 댈런은 느릿하게 원탁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혈령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상, 테모므론은 화신체로 직접 뱀파이어의 땅에 강림할 거요.”

“400년 전 혈귀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펠버가 낮게 중얼거렸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혈령이라는 이름으로 강림한 놈의 화신체를 쓰러뜨리고, 그 시체를 밟고 다음으로 나아가겠소.”

[다음 목표라면?]

“악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놈들의 대지옥을 멸망시키는 것.”

얼마 전 부크반과 싸우며 확인할 수 있었다.

반신의 경지라 일컬어지는 6위계는 더 이상 높기만 한 벽이 아니었다.

처음 차리나를 봤을 때의 위압감이나, 쑴의 화신체를 대면하고 느꼈던 중압감은 어느새 흐릿해졌다.

지난 몇 달간 초월자들과의 사투를 숱하게 겪어오며, 댈런 역시 가파른 성장곡선을 딛고 올라온 것.

‘게임에서 봤던 능력들을 생각하면, 승산은 대충 반반쯤 되겠지.’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다. 그리고 댈런의 육감은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한없이 클리어에 가까웠던 마지막 회차, 다섯 악신이 모조리 뭉쳐 대항했던 때만큼의 저력은 아직 갖추지 못했지만.

두 악신이 결탁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한 번을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이 클리어에 가깝다는 증거.

“좋아요. 그렇다면 미궁도시도 그대를 돕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선각자 알리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의 침략을 응징하기 도시연합의 군대를 일으킬 겁니다. 저희와 함께 진군하시다가 때를 봐서 따로 움직이시면 될 거예요.”

“하, 할망구? 중앙 의회의 동의도 없이 그렇게 막 결정하면···.”

“조용. 의회를 대신해서 에버론 그대가 나온 게 아니었나요? 그대가 동의하면 된 겁니다.”

당황한 얼굴로 선각자의 소맷자락을 붙잡는 에버론과, 그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는 소녀.

“아무리 그라도 혼자서 제국 국경을 가로질러 뱀파이어 백작의 영토까지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아요. 만신전의 눈을 가릴 만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미끼를 자처하겠다는 건가. 지금까지 금강궁이 보여왔던 행보와는 사뭇 다르군.]

“···첫 포효께서 걱정해주실 줄이야. 허나 운명의 강물이 이렇게나 비틀리고 범람하는데, 저희도 언제까지나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답니다.”

소녀는 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어깨 너머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이번 제국군의 침공으로 결계책률이 크게 해제되었으니, 몇몇 동료들에게 바깥 바람을 쐴 기회를 주어야···.”

쾅!

그때 회의실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복도와 출입문 주변에 우수수 내려앉는 깃털들. 둥지의 주인인 시에나였다.

“후우, 후······.”

“급한 일 때문에 늦는다고 들었어요. 첫 포효께서 대신 자리하셨으니 천천히 와도 되었을 텐데···.”

“후우. 그 급한 일 때문이야. 회의가 끝나기 전에 이야기해야 해서.”

선각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댈런도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만신전에 혈령이 합류했다는 소식이나, 놈들을 향해 반격하겠다는 금강궁의 결정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 있다고?

어리둥절한 시선들 사이에서 시에나는 빠르게 숨을 골랐다. 그녀는 평소의 침착한 어조로 루시아를 향해 말했다.

“고위 기사 카스타챌드. 지금 성기사단이 공격받고 있어.”

“만신전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아니. 만신전이 아니야.”

마른 입술을 축인 정보상이 입을 열었다.

“균열에서 용 군단이 올라오고 있어.”

시발. 둘이서 뭉친 줄 알았는데 용신까지 셋이었군.

***

[도시연합군 용병 모집.]

[과욕으로 타락해 성전을 선포한 만신전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그 허황된 논리에 동조하는 황제의 폭정이 자유로운 도시연합의···.]

촤악!

광장 한쪽에 수십 장씩 못 박혀있는 모병 지원서. 댈런은 한 장을 뜯어내어 죽 훑어보며 길을 걸었다.

위쪽이 반쯤 찢어졌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마지막에 적혀 있는 법이니까.

[보수는 전쟁 용병의 통상 기준에서 지급. 자세한 사항은 모병관과 합의할 것.]

반격의 당위성과 명분에 대해 길게 나열한 모병서의 끝에는, 보수 안내 곁에 큼직한 인장이 찍혀있었다.

금강궁에서도 가장 깊고 높은 곳.

도시를 움직이는 초월자들이 기거하는 스물여섯 전당의 인장.

‘흔히 보기 어려운 인장이지.’

최후의 항전이 아니고서야 모니터 너머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인장.

전쟁에 대한 예측이나 근거 없는 소문으로 골목마다 시끌거리고, 칼밥 좀 먹었다 하는 용병들 사이에서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흐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인장이 찍힌 문서에, 다름 아닌 초월자들 본인이 직접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으니까.’

미궁도시가 설립된 지 천 년이 넘게 흘렀음에도, 금강궁 심처의 초월자들이 움직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물론 미궁도시가 대대적인 반격을 결정했다는 것도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지만, 초월자들의 준동은 그걸 아득히 뛰어넘는 초유의 소식.

모병서를 대충 훑어보던 댈런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에게는 도시를 떠나기 전에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깡―! 깡―!

기기긱! 쿠르르륵!

끊임없는 망치질 소리와 알 수 없는 기관장치의 소음이 뒤섞인 거대한 건물.

확장을 거듭해 이제는 청동 구역에서 제일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장간.

[미스릴 제련소.]

큼직한 간판을 올려다보며 댈런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가 아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남긴 깨달음이, 손끝에 차갑게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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