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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의 땅(3)
“크으.”
시원하게 톡 쏘는 청량함. 목구멍을 간질거리는 뒷맛.
르베론의 수제 맥주는 여전히 명품이었다. 큼직한 잔을 단숨에 비워버린 댈런의 곁으로 땅딸막한 근육질의 사내가 다가왔다.
“한 잔 더 하겠나?”
“얼마든지.”
“크흐흐, 마음껏 들게. 자네가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하실의 맥주통을 전부 꺼내왔으니까.”
르베론은 댈런의 잔을 가져가 가득 채운 뒤 돌려줬다.
거품이 넘실거리는 잔을 천천히 들이키며, 댈런은 집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대장간의 정경을 죽 훑었다.
땅! 땅! 땅! 땅!
치이이익! 부그르르···!
미스릴 제련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러웠다.
드넓은 공간에 불길 넘실거리는 화로만 서른 개 이상.
화로 주변을 오가며 바쁘게 손을 놀리는 장인과 도제들은 백여 명이나 되었다.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는 모루들 뒤쪽에는, 비요른이 제작한 기관장치들이 벌겋게 달궈진 쇳물을 거푸집 안으로 흘려 넣고 있었다.
이 정도면 대장간이라기보다 공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
댈런이 기관장치를 보며 가만히 턱을 쓰다듬고 있자, 그 시선을 눈치챈 르베론이 말했다.
“외눈의 명공께서 도움을 많이 주셨다네.”
맥주로 살짝 목을 축인 뒤 내뱉는 안도의 한숨.
“그분이 만들어주신 기관장치가 아니었다면, 이번 수주 기한을 맞추지 못했을지도 몰라. 감사하다고 전해주겠나?”
“그러겠소. 잠은 좀 주무시오?”
“당연하지.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는 눈을 붙이려고 노력한다네.”
끌끌 웃으며 대답하는 르베론.
서너 시간이라. 눈 밑에 그림자가 짙은 게 다 이유가 있었군.
휘하에 도제와 장인들을 수십 명씩 뒀다고 해서, 대장간 주인의 일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대장간의 규모가 커지고 생산량이 늘어난다는 건, 곧 문제가 터지거나 불량품이 나올 확률도 증가한다는 이야기.
르베론은 공장 수준으로 커진 미스릴 제련소를 총체적으로 관리하고 감독하면서도, 자신의 작품 역시 꾸준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서너 시간 자는 것마저도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겠지. 몸이 몇 개나 되는 게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거 아나?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네. 금화 몇 푼 때문에 거리에 나앉을 위기였던 때. 하루하루가 지옥 같던 나날들을 말이야.”
고작 맥주 몇 잔에 술기운이 올라온 걸까. 뺨이 살짝 붉어진 르베론이 대장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닐세.”
“영감. 취하셨소?”
“어허, 무슨 소릴! 내가 이 정도에 취할 사람처럼 보이나?”
“피로가 쌓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댈런이 낮게 웃었다. 르베론은 고개를 내저으며 탁자 위에 잔을 올려뒀다.
“그나저나 줄 게 있다네.”
잠시 손가락을 꿈지럭대던 대장장이는, 이내 집무실 한쪽 구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큼지막한 금고 앞에 섰다.
그는 금고의 자물쇠를 풀고 사슬을 끌러내리며 말했다.
“성검의 주인에게 또 다른 검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네. 그래서 검을 제외하고 준비해봤지.”
끼익―
금고가 열리고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광택 없는 은빛의 갑주와 무구들.
르베론은 갑옷 곁에 걸려 있던 창과 손도끼를 댈런에게 내밀었다.
“···미스릴이군.”
“알아보는군. 맞네. 동부에 상륙한 엘프들이 가지고 온 물건이지.”
신의 금속이라 불리는 미스릴.
가볍고 단단하며 마력 전도율이 높은 동시에, 불어넣는 마력에 따라 그 무게를 달리할 수 있는 전설적인 재료.
대륙에서는 오래전 광맥이 고갈된 터라, 현시점에서 미스릴은 엘프들의 땅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엘프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전략물자나 다름없는 미스릴을 인간에게 쉽사리 넘길 리 없겠지.
때문에 보통은 게임 후반부에 접어들어서야, 악신 라필렘에게 고향 땅을 잃은 엘프들이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미스릴이 조금씩 풀려나게 된다.
시에나의 정보망에 따르면, 이번 회차에 엘프들이 상륙한 시점은 차르국의 에클라힘 전투가 마무리되었을 무렵.
미스릴이 도시연합에 흘러들어온 것 자체야, 시기상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지만······.
“이걸 나한테 줘도 되는 거요?”
아무리 엘프 난민들의 손으로 대륙에 풀렸다고 해도, 미스릴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게임 최후반부에 이르러도 쉽게 구할 수는 없는 물건. 더군다나 이 시점이라면 웃돈을 얹어주고도 구하기 힘들 테였다.
물론 르베론의 명성이 전례 없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갑옷과 무구를 모두 만들 만큼의 미스릴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라도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겠지.
이걸 아무 대가 없이 준다는 건 댈런이라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말했잖나. 과거에 내가 어떤 신세였는지 잊지 않았다고.”
“······.”
“당연히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게 누구인지도 잊지 않았네. 자네가 없었으면 나는 지금도 텔리아 상회에 쫓기고 있었을 거야.”
텅.
굳은살 박힌 대장장이의 손이 탁자 위에 창과 도끼를 내려놓았다. 댈런은 잠시 망설이다 그것들을 손에 쥐었다.
“내가 지금껏 만져왔던 그 어떤 금속보다도 다루기 어렵더군. 손에 맞을지 모르겠네.”
“아니오. 완벽하군.”
댈런은 손도끼를 허리띠에 끼워 넣고 양손으로 창을 잡았다.
미스릴의 감촉은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가벼운 깃털을 들고 있는 듯하다가도, 조금만 마력을 불어넣으면 묵직해지는 무게감.
매끈하게 뻗은 창대와 단단하게 결부된 창날, 유려하게 휘어지는 선은 이 창 하나에 르베론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오랜 시간 미스릴을 다뤄온 엘프들조차 주로 조악한 검이나 방패, 화살촉 따위의 무구를 만들어낼 뿐.
당대에 이 정도로 섬세하게 가공할 수 있는 건 미스릴의 제련자라 불리는 르베론이 유일했다.
‘영감도 꽤 멀리까지 왔군.’
하수도의 길잡이로 의뢰를 함께했던 페니를 따라갔다가, 그녀가 사실 르베론의 조카딸인 걸 알게 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가 직접 제작한 미스릴 무구들이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새삼 감회가 새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아무리 모니터 너머에서 수십 번씩 얻었던 미스릴 무구라 해도, 직접 쥐어본 건 이번에 처음이니까.
‘그리고 게임에서는 보통 이 정도가 영감의 한계치였지.’
미스릴을 능수능란하게 가공하는 건 물론 역사에 남을 만한 일.
허나 댈런은 한 번뿐이지만 그걸 뛰어넘은 인물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줄 게 있소.”
댈런은 품속에서 손때 묻은 망치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미스릴 갑옷을 입기 편하게 분리해 탁자 위에 늘어놓던 대장장이의 앞에 내려놓았다.
“내가 아는 대장장이가 영감에게 전해달라더군.”
이번 회차의 르베론 아하킴은, 다른 회차에서 부딪혔던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다.
미스릴의 제련자를 넘어선, 용골과 용린을 다루는 장인으로서.
***
금강궁이 제국을 향해 대대적인 반격을 선언한 이후, 군대가 소집되기까지 대략 한 달가량의 시간이 소모됐다.
애당초 군대라는 건 소집령을 내렸다고 바로 뚝딱 만들어지는 물건 같은 게 아니었다.
각 도시에 전령을 보내고, 그 도시들이 다시금 병력을 모아 보내는 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
모든 도시에서 병력이 도착하고 편제를 개편하는 데까지, 고작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놀랄 일이었다.
‘스물여섯 전당의 인장이 지닌 효력 때문이겠지.’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초월자들이 전면에 나섰으니, 그동안 몸을 사리던 도시들이라도 부랴부랴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
어쨌든 팔시온에서 머무는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댈런은 그동안 못다 한 일들을 마무리했다.
미스릴 제련소에 들러 댈루카힘의 깨달음이 담긴 망치를 넘겨준 건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댈런, 이건···.”
“지저룡의 용굴에서 가져왔소. 놈을 따르는 난쟁이들이 사용하고 있더군.”
그가 미스릴 제련소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외눈의 명공, 비요른 칼라드라쿰이 운영하는 공방.
머지않아 벌어질 악마와의 전투를 내다보며 칼을 가는 장인에게, 댈런은 지저룡의 용굴에서 얻어낸 전리품들을 건네주었다.
유선형의 구릿빛 탄환과 가지각색의 총기들. 거기에 더해 기관장치로 이루어진 가짜 난쟁이 왕의 잔해까지.
“악마를 죽일 무기를 만든다지 않았소. 도움이 되면 좋겠군.”
“···고맙네. 한번 연구해보지.”
출정까지 남은 여유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는 외눈의 명공이라면 충분히 일신의 능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댈런에게도 마찬가지. 남은 시간 동안 그가 매진한 일은, 청동 구역에 즐비한 시체들을 회수하는 작업이었다.
[한겨울에 굶어 죽은 검객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기량 +1]
[갱도 깊은 곳에 매몰된 광부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체력 +1]
[뒷골목에서 살해당한 노예상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
남부 지구의 시체들은 일전에 시에나를 통해 의뢰를 받으면서 모두 회수를 마쳐뒀었다. 남은 건 서부와 동부, 북부 지구의 시체들.
모두 합쳐서 열다섯 구에 가까운 시체들은, 도합 20이 넘는 능력치를 선사해줬다.
‘초월자의 시체를 회수해봐서 그런가. 감질나긴 하는군.’
물론 능력치 하나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법.
기억을 더듬어가며 시체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댈런은 B등급 이상의 스킬들을 연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중간에 경매장에 들러 온갖 유물 무기들을 사들이고, 틈틈이 까마귀 둥지를 방문해 제국의 동향을 살피니 한 달은 금방 지나갔다.
어느덧 출정까지 사흘 남은 시점. 마지막으로 찾은 건 까마귀 둥지의 바텐더 버번이었다.
용신의 첫 포효라 일컬어지는 대룡,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이 연락을 넣어왔기 때문이었다.
***
[급격하게 성장하는 좌완 갑주 꼬마를 진단해달라고 했지.]
“맞소. 진룡이라는 족속이 원래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오.”
[네 생각이 옳다. 일반적인 진룡은 인간보다도 느리게 성장하지. 반면에 꼬마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거의 아성체에 근접했구나.]
바텐더의 녹갈색 눈동자가 소년을 위아래로 훑었다. 청백색 머리칼의 소년, 아카샤는 살짝 긴장한 기색이었다.
댈런은 테이블 위에 드러누운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도 봐서 알고 있소만. 이유가 궁금해서 찾아온 거요.”
[···안 그래도 그 이유를 말하려던 참이었느니라. 성질머리 한번 급하구나.]
“한국인들이 일 처리 빠른 걸 좋아하긴 하지.”
[······.]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힌 용은 별말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고룡의 말에 따르면 아카샤의 성장 속도는 일반적인 진룡보다 수십 배나 빨랐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어미 청린용의 안배 때문이었다.
전대 청린이 알을 낳았을 무렵은, 나무의 저주와 기사단장에게 입은 상처로 인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점.
자신이 죽은 뒤에도 알에서 깨어난 새끼용이 살아남고, 끝내 자신을 대신해 설욕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성장해야만 했다.
[용의 생장을 촉진시키는 건 전례가 없는 마법이다. 마법에 능통한 전대 청린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그 정도요?”
[그래. 알을 품고 자신의 마력에 동조시킨 채, 수십 년간 지극정성을 들인 끝에야 마법을 완성했을 터. 그녀가 기사단장에게 복수심을 품었다는 건 알았으나, 그 크기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위스키 잔을 흔들며 말끝을 늘이는 버번. 댈런은 그 설명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청린용이 남부의 대재앙이 될 수 있었던 거군.’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성장기만 통상 백 년 이상 걸리는 진룡이, 어떻게 알에서 한 왕국을 멸망시키는 성체가 되기까지 수년밖에 걸리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
생각해보면 게임에서 청린용 아카샤는 단 한 번도 아군이 된 적이 없었다.
노리아 왕국의 왕도를 통째로 얼려버려 ‘왕국을 얼린 숨결’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였고, 악신들을 제외하면 최악의 보스몹 중 하나로 손꼽혔으니까.
그 숨결에 성기사단이 무너진 회차만 두 자릿수. 댈런이 잡아먹힌 것만 해도 다섯 번이나 됐다.
[대륙 남서부의 투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대전쟁에 참가한 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암월의 귀족 사냥꾼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빛을 잃은 용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올곧은 성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과거의 흔적들은 지금까지도 소년의 머리 위에 선명하게 남아있었고.
언젠가는 저 시체들을 회수할 때가 올지도 몰랐다.
[서론이 길었군. 활성제의 약효가 충분히 돌았을 시간이니, 슬슬 수술을 시작하도록 하지.]
위스키 잔을 내려놓은 버번이 말했다. 허공에 스르르 수놓아지는 수십 개의 마법진.
댈런은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드는 걸 느꼈다. 버번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공간에서 몇 가지 재료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용신의 오른쪽 권갑, 타테앙카트 파르지움의 골수와 심장이라. 골격을 갈아엎기에 좋은 재료구나. 잘 가공되었으니 별 탈 없이 이식될 거다.]
“···그건 좋은데. 나한테 듣는 마취제는 아직도 못 만드셨소?”
[그래. 그러니 이번에도 좀 많이 아플 거다.]
“이런 씹···!”
바텐더의 미소와 함께 마법진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골격 이식은 심장 이식보다 몇 배는 더 아프고 후유증도 오래 남았다.
댈런이 오랜만에 몸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실감하는 동안, 출정식까지 남은 사흘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금강궁의 초월자 넷을 포함한 도시연합의 칠만 군대가, 남쪽 제국의 땅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