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28화 (22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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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의 땅(4)

[진룡의 탄탄한 골격이라. 첫 포효에게 감사해야겠군. 이로써 네가 내 배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구나.]

저건 또 뭔 개소리야. 심상 너머 적창의 웃음에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번부터 노망이라도 나셨소? 수천 살 먹고서 양심이라는 게 있으셔야지···.”

[뭐 어떠냐. 종을 초월한 이들에게 나이는 의미 없느니라. 백안의 선각자만 봐도 그렇잖느냐? 인간의 육신으로 천 년을 넘게 산 노괴라도 여전히 소녀의 형상을 띄고 있거늘.]

“이 미친 양반이.”

선각자는 예외로 쳐야지. 게임 설정상으로도 그녀의 외모는 자의와는 상관없는 저주였다.

너무 어릴 때 시간선을 내다보는 능력을 각성한 나머지, 그 대가로 스스로의 시간이 고정되어 버렸다던가.

초월자답지 않게 허약한 육체 능력도 그 때문이었다. 몸의 생장 자체가 10대 수준에 멈춰 있으니, 무슨 짓을 해도 근골이 발달할 여지가 없었던 것.

[하여간 입이 갈수록 거칠어지는구나. 상관없다. 반항적인 연하라도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

아예 말이 안 통하는군. 댈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노룡에게서 귀를 닫았다.

하늘은 종일 맑았다. 도시연합군이 출정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팔시온을 떠난 군대는 어떤 마찰도 없이 순조롭게 남하하는 중이었다.

낮에는 국경선까지 죽 뻗은 대로를 중심으로 진군하다가, 밤이 되면 자리를 잡고 야영하는 식.

도시연합의 영토에도 곳곳에 마물이 판을 치긴 했지만, 머리가 달린 이상 칠만 대군을 건드릴 배짱이 있는 놈은 없었다.

가끔 머리가 없는 마물이 덤벼들면 그건 그거대로 치안 유지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고.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제국군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마을들을 지나갈 때면, 마을 재건을 위해 한두 부대를 남겨둔 뒤 다시 내려가곤 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 선선한 바람이 코끝을 간질인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 댈런은 상태창을 열어봤다.

―――――――

이름 : 댈런

레벨 : 45

[근력 : 68] [기량 : 65] [체력 : 63]

[감각 : 58] [지능 : 59] [마력 : 61]

스킬 : 데하만의 갑주격투(D), 야간 시야(E), 도약(E), 불꽃 화살(D), 라판텔라의 분쇄검(C), 헤갈레우스의 화염의 비(C), 쏘아지는 번개(D), 저주막이의 인장(D), 레레도나라의 비검(B), 성화의 불씨(C), 검붉은 용의 피(A), 지옥문의 열쇠(C), 아커만의 작도법(C), 필즈의 바람 결계(C), 화영창술(D), 살아 움직이는 뿌리(D), 급속 발아(D), 룰리아의 샘물(C), 영혼 착취(B), 치유의 기도(D), 스카디의 해일(B), 카스마의 붉은 바람(B), 모래바람 왕조의 탄령(B), 용골 가공(B)

*고유 스킬(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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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45. 60대에 접어든 능력치가 벌써 넷.

용골의 효과가 굉장하긴 했다. 한 달간 청동 구역의 시체를 모조리 회수하고 얻은 능력치가 스물 남짓인데, 반나절 수술로 인해 오른 능력치가 그 절반쯤 될 정도.

물론 전신의 뼈를 들어내고 다시 짜 맞추는 과정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긴 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싸움터만을 전전하던 그로서도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마지막 회차는 모든 능력치가 100을 뚫었었지.’

수백 회차의 플레이 동안 누적된 모든 데이터를 그러모아, 최선의 결과만을 골라가며 키워낸 마지막 회차의 캐릭터.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약을 섭취하고, 강해질 수 있는 길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좇았다.

물론 완벽한 회차는 아니었다.

시간을 아껴야 했기에 동료 영입은 진작 포기했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과 물자를 투자해야 하는 세력 양성은 꿈도 꾸지 못했던 회차였기에.

다만 그렇게 첨예하게 쪼개고 쪼갠 시나리오를 따라간 끝에, 일신의 능력 하나만큼은 그 어느 회차보다도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손짓 한 번으로 숲을 불태울 벼락과 화염의 폭풍을 불러내고, 가볍게 내리그은 일검은 제국 황도의 성벽을 쪼갤 정도.

‘마법사로서 정점을 찍었던 전격술사인 댈타리온보다도 몇 수는 위였지.’

지금의 그라도 승산은커녕 도주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악신 다섯이 똘똘 뭉치지 않았다면 분명 첫 클리어 회차가 되었을 터.

물론 그랬다면 지금처럼 이 땅에 떨어질 일도 없었겠지.

이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일에 한숨을 내쉬며, 댈런은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르비바흐! 르비바흐다!”

약초꾼들의 도시가 코앞이었다.

***

도시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성벽은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고, 건물들은 삼분의 일 가까이가 전소되거나 무너진 상태.

만신전의 깃발이 펄럭이는 중앙 광장에는 수백 구가 넘는 시체들이 불타버린 채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화마의 흔적이 가득한 광장 한가운데.

만신전의 깃발을 꺾고 도시 연합의 깃발을 세운 아래에서, 댈런과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생존자를 찾았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막 병사들을 시켜 정찰을 끝낸 에버론이 말했다.

천변만화의 얼굴이라 불리는 그는, 수십 기의 의체를 다룰 수 있는 특기를 살려 군대의 전반적인 지휘를 맡고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끌고 갔다더군요.”

“제국의 방식입니다. 오백 년쯤 전, 놈들이 한창 확장 전쟁을 펼칠 시기에도 이런 식이었죠.”

다섯 세기 전의 역사를 마치 어젯밤 일어난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 여자 역시 금강궁의 초월자.

아룡을 길들여 자신의 마차를 끌게 만든 위업 때문에, 용두마차의 주인이라 불리는 5위계 전사였다.

“죽일···제국···놈들······.”

말 한마디마다 입에서 불길이 치솟는 남자 역시, 수백 년을 살아오며 결계탑을 유지해온 초월자 중 하나.

염열궁 룩타베스라고 했었지. 설정에 따르면 정령과 인간이 반쯤 결합된 존재라고 하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일단 하루는 쉬고 내일 출발하도록 하죠.”

에버론이 냉정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르비바흐를 재건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병력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소도시라도 마을 규모는 한참 뛰어넘었기에, 이전에 지나온 마을들처럼 한두 부대 남겨놓는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생존자를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병력은 상주시켜야겠지만, 그 이상은 군대를 소집한 목적 자체에 어긋나는 일.

“갈리오스 상단주의 소개로 의원을 방문한 게 엊그제 같은데···그사이에 이렇게 되다니.”

한탄 가득한 펠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군대는 도시 전체에 걸쳐 야영지를 세웠다.

댈런은 일전에 머물렀던 여관방에 자리를 잡았다.

재의 마녀를 썰어버리러 갈 당시에 머물렀던 바로 그 여관이었다.

“양갈비 약초 찜은 좀 아쉽군.”

댈런은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침대는 오랫동안 짚을 갈지 못한 터라 그리 편안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화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잠자리였다. 병사들 대부분은 거리에 천막을 치고 야영 중이었으니까.

“약주도 그렇고.”

펠버가 영역의 능력까지 사용해가며 아껴줬던 약주 몇 병이, 이제 정말로 대륙에 몇 안 남은 르비바흐 특산품이 될 줄이야.

높은 도수에 톡 쏘는 씁쓸함이 마음에 들었는데. 댈런은 입맛을 다시며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좀 더 빨랐다면 구할 수 있었을까.’

도시 하나가 사라졌다.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도륙된 주민들.

수천이 넘는 마물을 썰어왔고 사람 역시 꽤 많이 죽인 그였지만, 그렇다고 학살의 현장 앞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광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은 더 이상 모니터 너머의 폴리곤 덩어리가 아니었으니까.

“···썩을.”

그들은 누군가의 자식이거나 부모였고, 연인이며 친구였다.

목숨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가 일말의 안타까움마저 덜어내주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사지를 숱하게 전전한 지금에도, 내면에는 서른넷 먹은 아저씨의 유약함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변하지 않는다는 게 꼭 정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니라, 댈런.]

“남의 속 못 읽는다며. 뻥이었소?”

[아니. 네 속은 여전히 들여다볼 수 없구나. 하지만 슬퍼하는 건 알겠느니라. 네 심상의 하늘이 울고 있으니.]

“······.”

댈런은 말없이 천장의 어둑한 나뭇결을 응시했다.

심상이라. 차리나는 심상이 미래를 그리는 것이라 했었지.

전격술사 댈타리온은 온 세상의 벼락을 전부 모아낸 하늘을 그렸었다.

차리나는 스스로가 얼어붙은 북부의 하늘과 대지가 되어, 차르국의 앞날을 지키고자 다짐했었고.

‘선택하면 돼요. 어떤 미래를 바라볼 것인지.’

머릿속을 스치는 여왕의 목소리. 스스로 바라보는 미래는 과연 어떤 그림일지, 이제껏 고민해보지 않은 게 아니다.

소원의 돌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려 마음먹었고.

이 땅에서 얻어낸 힘으로 소중한 이들을 지켜내고자 했다.

심상 속 그려내는 미래가 또렷할수록 가진 영역의 정경 역시 확고해지겠지.

그건 분명 스스로의 세계를 완전하게 전개해, 있는 그대로 현실에 덮어씌우는 6위계의 마지막 관문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먹구름은 과연 그의 어떤 부분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이 많아질 때는 소일거리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더구나.]

“······.”

[소일거리가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수련이라던가. 아니면 마음을 알아주는 연인과 침대 위에서 달콤한 속삭임을 주고받는다던가···.]

“침대 위에 누울 몸뚱이도 없으시면서, 퍽이나 설득력이 있겠소.”

댈런은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자연스럽게 무장을 챙기고 방을 나섰다.

소리 하나 없이 여관을 빠져나가는 발걸음. 거리의 그림자를 따라 도시를 가로지르고, 부서진 성문을 통과해 오래된 흙길로 접어든다.

풍영결계에 몸을 숨긴 그의 흔적을 뒤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속도를 높이자 머지않아 울창한 수목이 그를 반겼다.

‘르비바흐 숲.’

수년 전 그가 마녀의 머리를 두 쪽으로 갈라버린 곳.

댈런은 거침없이 수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들 사이의 간격은 넉넉했고, 발밑에는 풀만큼이나 흔하게 약초가 짓밟혔다.

마녀와의 싸움에서 만드레이크를 몰살시킨 영향으로, 그 양분이 땅 위에 넘쳐흘러 한동안은 약초가 풍년일 거랬지.

안타깝게도 그 한동안의 풍년이 끝나기도 전에, 르비바흐는 전란에 휩쓸려 폐허가 되어버렸다.

사박. 사박.

깊이 들어갈수록 곳곳에 타버린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이끼와 약초에 뒤덮이긴 했어도 분명히 그 당시 싸움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저 흔적들이 보인다는 건 숲의 중심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 댈런은 걷는 속도를 줄이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시각 대신 다른 감각들이 뻗어나가며, 수천 미터 바깥의 자극들을 전달해왔다.

‘신께서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근처의 폐허 도시에 인간들의 군대가 모여 있다고 합니다.’

‘찍! 이건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다. 도시에 불을 지르자. 나오는 놈들은 산 채로 잡아먹자!’

‘잠깐. 시궁쥐들의 말에 따르면 역겨운 금강궁의 노괴들이 넷이나 있다고 한다. 여섯째 손가락을 죽인 전사도 말이야.’

‘그게 뭐 어때서? 죽을까봐 겁이라도 먹었나? 겁쟁이는 일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빠져라! 겁쟁이! 고양이 같은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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