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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의 땅(6)
군대의 출발은 사흘쯤 지체되었다. 성벽 안팎으로 산처럼 쌓인 쥐인간들의 시체를 불태우기 위함이었다.
화르르르!
구덩이를 파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모으고, 그 위에 반인반수의 사체를 쌓아 올린 뒤 불을 붙인다.
염열계 마법사들의 도움으로 불은 한 번도 꺼지는 일 없이 잘만 타올랐다. 그렇게 성벽 밖 수십 개의 구덩이에서 매캐한 연기가 사흘 내리 치솟았다.
한밤중의 습격에도 잘 싸워낸 병사들에게는 특식이 제공되었다. 사흘 동안 먹고도 남을 술과 고기였다.
“좆만 한 쥐쟁이 새끼들. 남부 대수림에 사는 놈들이 대체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거야?”
“큼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이놈들 정체가 암월단이라고 하더라고. 그 역사책에나 나오던 전설적인 암살자 집단 말이야!”
“푸하하! 암월단이라니! 헛소리도 정도껏 하게, 스벤. 역사책이 아니고 소설책이겠지.”
“제국군이 아인종을 납치해서 노예병으로 굴리는 게 하루 이틀인가? 이놈들도 다 그런 노예병이야. 전설적인 암살단이라면 뒈져나간 건 우리였겠지!”
불구덩이 앞에서 잘 구워진 양고기를 보급으로 나온 술과 곁들여 뜯으며 시시덕거리는 병사들.
처음에는 시체 타는 냄새가 역하다고 불평불만을 내뱉다가도, 취기가 살짝 오르고 나니 왁자지껄 웃으며 장난치고 떠들기 바쁘다.
“······.”
불구덩이에서 한참 떨어진 르비바흐의 성벽 위. 댈런은 성벽에 걸터앉은 채 약주를 홀짝이며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펠버가 선심 쓰듯 건네준 약주였다. 원래 이 도시의 특산품이었던.
“병사들에게는 국경선을 넘기 전 마지막 휴식이 될 거야.”
자박.
등 뒤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러진 돌조각이 가죽 부츠에 치이는 소음.
“제국령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속전속결로 진군할 예정이니까. 단숨에 황도를 점령하지는 못하더라도, 제국의 숨통을 조이려면 북쪽 일대 정도는 손에 넣어야겠지.”
먼지와 돌조각을 대충 쓸어낸 시에나는 댈런의 옆자리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그녀의 손에도 작은 술병이 들려있었다.
“···살다살다 술병에 차를 담아 마시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나는 이 부대 최고의 정찰자산 중 하나라고. 술에 취해서 한눈이라도 팔았다가, 국경선을 넘기도 전에 기습당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그러면 그냥 안 마시면 되는 거지. 술병은 뭣 하러 들고 돌아다니는 거요?”
“가끔씩은 분위기에 맞춰줄 필요도 있는 거니까.”
썩을. 한 마디를 안 지네. 댈런은 굳이 한 소리 더 얹어주는 대신, 입에 약초주를 가득 머금었다.
“당신,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푸웁!”
“···그렇게까지 격정적으로 반응할 건 없었는데. 아까워라. 몇 병 안 남은 약주 아니야?”
아깝긴 지랄. 댈런은 고개를 흔들며 시에나를 돌아봤다.
새까만 비단 같은 머리칼이 반쯤 가린 얼굴. 마녀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검었다.
해질녘의 하늘을 머금은 동공은, 마치 어두운 베일 사이에 드러난 보석처럼 반짝이는 중이었다.
눈동자 저 깊은 곳에서 타닥거리는 하얀 마력의 빛.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
시에나의 눈이 저런 빛깔로 번뜩이는 건, 모니터 너머에서도 몇 번쯤 본 적 있는 현상이었다. 댈런은 약주를 한 모금 넘기고 말했다.
“벽을 뚫었군.”
“좀 됐지. 뒤늦게라도 축하해줘서 고마워.”
“그러면 혈령과 싸울 때는 기대해봐도 좋은 건가?”
“이제 와서 괜히 모르는 척하지 마. 내 영역의 풍경에 대해서도 이미 다 알고 있잖아?”
···그건 정말로 모르는데.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화려한 이펙트와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각종 버프 등의 효과를 제외하면, 모니터 너머에서 영역의 능력이라는 건 미지나 다름없었다.
전후의 상황과 결과를 토대로 그 사이의 과정이 어땠는지 추측이나 할 수 있을 뿐.
예컨대 루시아의 영역이 악마를 대상으로 필중에 가까운 저격 능력이고, 전격술사 댈타리온의 영역은 다양한 색깔의 번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거나 하는 정도.
‘시에나가 영역을 개방할 때는 하얀 깃털과 까만 깃털이 뒤섞이는 효과가 나타나곤 했었지.’
약주의 씁쓸함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떠올려보는 장면들. 그 장면들을 봤던 회차 어디에서도, 그녀가 살아남는 미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시에나는 술병에 담긴 찻물을 홀짝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신기했어. 당신은 주변에 한없이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신기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척척 찾아내서 구해주곤 했었지.”
“···감이 좋다고 해두지.”
“보수를 받아야 움직이는 용병이지만, 돈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어. 눈앞의 적과 싸우면서도 먼 미래를 그리는 듯했지. 마치 커다란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말을 하나씩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야.”
반쯤 남아있던 병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주둥이를 뒤집어 탈탈 털어봐야 몇 방울 더 나오고 끝이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내가 마녀라는 걸 알고 있었어.”
확신했기에 무덤덤한 어조.
“거기다 버번이 내 시조와 계약을 맺었던 용이라는 것까지도 알았지.”
연심에 눈먼 바텐더 양반 같으니라고.
수천 년쯤 살았으면 입이라도 무거워야지, 손녀딸 앞에서는 비밀이고 뭐고 없다는 건가.
“엘가이아 마탑주는 당신을 회귀자라고 여기는 것 같던데, 내 생각은 달라. 단순히 수천 년을 사는 것과 수백 번의 인생을 반복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야. 후자였다면 당신의 인간성은 이미 남김없이 마모됐겠지.”
“···결론이 뭐요?”
“짬이 날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이런저런 장소들을 들쑤시고 다니는 버릇이나, 강대한 적을 쓰러뜨리고 난 뒤 급격하게 성장하는 능력.”
시에나가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미약하게 흐트러진 숨결.
뭐야, 자기 잘났다는 듯 다 떠들어놓고 또 왜 저래?
“역천의 우물은 수많은 시간선들의 가능성을 모아, 그 결말을 타파할 존재를 선택한다고 했지. 내 생각에 당신은 그 모든 세계를 경험했지만, 동시에 직접 살아내지는 않은 존재일 거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깃털의 마녀이기 이전에 뒷골목 정보상으로 살아온 그녀이기에 더더욱.
그 누구보다 진실에 가까워졌음에도,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댈런은 되려 침묵으로 일관했다.
“세계의 바깥에서 세계를 굽어살피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개입한 존재. 그건 성기사단이 섬기는 전쟁신, 수천 년 전 대전쟁에서 대륙을 구원했다는 영웅의 이야기와 똑같아.”
“내가 신이라는 소리요?”
“글쎄. 신? 승천자? 이계인? 나야 알 수 없는 일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리질하는 시에나. 길게 늘어진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을 베일처럼 얼굴을 가렸다.
거참 김빠진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북부로 떠나기 전에 당신이 나한테 그랬지.”
“음?”
“당신이 죽을까 봐 겁나냐고.”
스르륵. 어깨선을 따라 떨어지는 흑발. 고개를 든 시에나가 댈런과 눈을 마주쳤다.
“겁나.”
마녀의 눈에는 물기가 맺혀있었다.
“누구보다 이 세상을 아끼면서, 정작 자기 고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눈빛이. 싸움의 최전선에 나서길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그 태도가.”
“······.”
“당신이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 곁에 남아있지 않을까 두려워.”
***
사흘 내리 타오르던 시체 구덩이의 연기도 어느덧 많이 잦아들었다. 도망쳤던 피난민 중에는 그 연기를 보고 다시 돌아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정비를 마친 도시연합군은 도시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놓은 뒤, 르비바흐를 떠나 다시금 남하하기 시작했다.
잘 먹고 푹 쉰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거기다 르비바흐에서 목격한 참상으로 인해, 병사들의 가슴 속에는 제국군을 향한 복수심마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국경을 지키던 수비대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경선 바로 아래쪽의 렝클턴 마을이나, 그 뒤에 이어진 소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공격! 성벽을 무너뜨려라!”
“용두마차의 주인께서 함께하신다!”
“황제와 만신전을 무너뜨려라! 노예들을 해방시키자!”
금강궁의 수백 년 묵은 노괴들은 무력만큼이나 전략도 탁월했다. 그들은 초월자 개개인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성과 도시들을 공략했다.
시에나가 새들을 풀어 적들의 동태를 정찰하고 나면, 염열궁 룩타베스가 쏘아 올린 불기둥이 성벽을 강타해 무너뜨렸다.
대지 수호자 룩이 일으킨 골렘이 성문을 두드리는 사이, 용두마차의 주인 아즈라는 성벽 위를 농락하며 적들의 시선을 빼앗고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수십 명의 의체로 생각을 공유하는 에버론이 지휘체계를 맡은 이상, 난전이 벌어져도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까지 치닫는 일은 없었다.
정찰. 공격. 함락.
짧은 휴식과 보급 뒤에는, 다시 진군.
몇 주에 걸쳐 성채와 중소규모 도시들을 점령하는 동안, 만신전에 혈령이 합류했다는 증거 역시 속속들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제국군의 입장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뱀파이어와 언데드 병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돕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한 것.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성채의 수비 병력에 뱀파이어의 세력이 섞여 있는 모습도 종종 나타났다.
포로들을 심문해본 결과, 황도에서는 이미 공식적으로 뱀파이어 백작과의 동맹 선언이 공표된 모양이었다.
인근 소왕국들과의 전선에서는 뱀파이어들이 만신전의 우군으로 참전해, 누구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는 증언까지 나올 정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고혈을 빨아먹는 족속을 성벽 안으로 들이다니.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면 어떻게 그런······.”
“루시아 경, 전장만큼이나 인간이 비이성적으로 변하는 장소도 없다네.”
“······.”
“적의 적은 곧 친구가 되는 곳이 전쟁터일세. 이미 목젖까지 칼이 들어온 이상, 어제의 원수라도 오늘의 영웅이 될 수 있는 법이야. 하물며 기억도 잘 나지 않는 400년 전의 적이라면? 몇 개월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펠버의 말이 맞았다. 전쟁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분노를 촉진시킨다.
전쟁터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자녀를 끌어안은 부모에게, 거창한 대의나 명분은 너저분한 장식품일 뿐이었다.
만신전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를 무기 삼아 대중을 휘둘렀다.
황도에 가까워질수록 도시들의 저항은 거세졌고, 압도적인 무력으로 점령한 뒤에도 안정화하는 시간은 길어져만 갔다.
제국령을 넘어선 지 한 달하고도 보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던 도시연합군이라도 슬슬 그 기세가 한풀 꺾이려 할 무렵.
“댈런. 정찰대가 제국군 본대를 발견했습니다.”
보름달이 뜬 어느 밤, 에버론이 댈런의 막사 문을 두드렸다.
“사흘 내로 대규모 회전이 벌어질 겁니다. 뱀파이어 백작의 영토로 향하시려면, 오늘 밤이 마지막 기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