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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의 땅(7)
맑은 밤이었다. 은하수가 가로지르는 천구 아래, 푸르스름한 달빛과 횃불의 주홍빛 열기가 어지러이 뒤섞이며 춤췄다.
댈런은 에버론을 따라 진영 끄트머리로 향했다. 진영 밖에서는 이미 떠날 채비를 마친 일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즈라가 제국군 진영을 기습하며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당분간 추적이 붙을 일은 없을 겁니다.”
“고맙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건 당신만의 싸움이 아니니까요.”
말의 고삐를 풀어 넘겨주며 고개를 숙이는 에버론. 정중한 손짓에는 귀족가의 기품이 자연스레 묻어나온다.
“······.”
새삼 감회가 새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에버론 라크탈라는 ‘천변만화의 얼굴’이라는 이명을 지닌 초월자.
스물여섯 전당 중 하나를 맡은 미궁도시의 지배자이자, 금강궁에서 나고 자란 천생 귀족이다.
그런 그가 저토록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만큼이나, 댈런이 지금껏 걸어온 길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증거는 또 없겠지.
미궁 관리청의 고위 공무원으로서 대면했을 때까지만 해도, 에버론에게 그는 덜떨어진 악마를 때려잡은 전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갓 순은 성벽을 넘어 순은 구역의 중앙 광장을 바라보던 그에게, 노인의 모습으로 끌끌 웃으며 다가왔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대륙을 구해낼 희망인 양 대우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오.”
모니터 너머에서야 몇 번이나 경험했던 일.
허나 코드와 폴리곤 덩어리를 살아 숨 쉬는 세계와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편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리 없는 에버론은, 괜스레 머리를 긁적이더니 걱정 어린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조심하십시오. 혈령은 북부에서 상대하셨던 쑴의 화신체와는 완전히 다를 겁니다.”
“알고 있소.”
악신의 화신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흑마법사 캐릭터도 적지 않게 육성했던 댈런이기에, 에버론이 이야기하려는 부분을 모르지 않았다.
쑴은 부족한 제물과 여건을 무시한 채, 스스로의 격을 깎아가면서까지 억지로 강림했었다.
마치 승패는 하등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 그건 싸움에 미친 악신답게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지난 혈귀전쟁 이후 테모므론은 극도로 신중하게 행동해왔습니다. 불필요한 충돌은 최대한 피하고, 자신의 안배를 대륙에 마련해두는 데 집중했죠.”
제국이라는 거대한 힘을 옆에 두고도, 뱀파이어 백작의 영토가 400년간 유지되어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지난 수백 년간 인간의 고혈과 비명을 짜내며 축적해온 힘은, 악신의 화신체를 온전한 상태로 강림시키기에 차고도 넘칠 양이리라.
“주제넘은 걱정이겠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괜찮소. 이미 충분하오.”
천 년간 축적해온 제국의 힘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아무리 금강궁의 초월자들이 인리를 뛰어넘은 존재들이라도, 그런 제국과의 전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결계탑으로 억제해둔 미궁의 힘 역시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강해지는 바. 금강궁의 초월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역할을 넘치도록 다해주고 있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에버론은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진영 안으로 돌아갔다. 댈런은 그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말고삐를 끌고 일행에게 걸어갔다.
인사를 나눌 사람은 에버론만이 아니었다.
떠날 채비를 마친 일행들 중, 두 사람은 그와 다른 방향으로 갈 계획이었으니까.
“···댈런.”
“루시아.”
동쪽으로 떠나는 댈런과 달리, 루시아와 파른이 향하는 곳은 서쪽이었다.
다름 아닌 성기사단 본단을 향해서. 용 군단에 의해 본단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이상, 그녀가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댈런. 용 사냥이 끝나는 대로 찾아가겠습니다.”
루시아가 말했다.
살짝 떨리는 입술. 푸른 눈동자에 맺힌 물기.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전 더 이상 미궁에서 헤매던 어리버리한 수습 기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꾹 억누른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은 척 지어내는 당당한 웃음.
“······.”
모니터 너머에서나마 두 악신 모두를 상대해본 입장에서, 더 까다로운 적이 뭐냐고 말하면 단언컨대 용신이었다.
수백의 아룡과 수십의 진룡을 필두로, 대룡들의 호위를 받는 용신의 군단.
균열을 틀어막은 기사단의 성채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고, 사상자가 수천에 달한다는 보고도 전해졌다.
본단이야 단장이 직접 지키는 만큼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법.
용 사냥이라고 가볍게 말하는 것과 달리, 실상은 북부에서의 전면전에 버금가는 대전투겠지.
용들의 공격으로 성기사단이 무너진 회차는 꽤나 빈번했고, 그중 루시아 카스타챌드가 사망한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령을 잡고 본단으로 가겠소.”
당장은 그녀를 떠나보내는 게 정답이었다.
잃지 않기 위해 그저 움켜쥐고 있어봐야, 결국 멸망에 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질 뿐.
초월자로 성장한 루시아 카스타챌드는 성기사단에서 손에 꼽히는 전력이고, 이 시점에 성기사단이 무너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미궁은 지상보다 비교적 악마들이 손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이며, 성기사단이 지키는 균열은 미궁으로 이어지는 통로 중 하나.
용신이 본단을 공격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겠지.
균열을 틀어막은 성기사단의 봉인을 부수고 나면, 지옥의 힘을 대륙 위에 투사하기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댈런은 몇 주에 걸친 야영으로 조금 푸석해진 금발을 가만히 바라보다, 아공간에서 얇은 갑옷 한 벌을 꺼내 건넸다.
“이건···.”
“지저룡의 비늘로 만든 갑옷이오. 내가 아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손수 만들었지. 성기사단의 갑주 아래에 받쳐 입으면 좋을 거요.”
“···감사합니다.”
결국 틀어막기만 해서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다.
머지않아 지옥에 직접 쳐들어가, 다섯 악신의 본거지를 뒤집어야 하겠지.
혈령을 꺾고 테모므론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 역시, 그 얼마 남지 않은 싸움을 위한 초석 작업의 일환이었다.
갑옷을 넘긴 댈런은 말에 올랐다. 언제나 생각했지만, 작별은 짧을수록 좋았다.
“몸조심하세요, 댈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그는 말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여섯 인영이 한밤중의 어둠을 뚫고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두 성기사와 갈라진 이후, 댈런과 일행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향했다.
댈런과 발렌티노 사제, 비요른, 아카샤, 시에나까지 총 여섯 명으로 구성된 일행.
머릿수가 많지 않은만큼 속도를 더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가도를 피해 인적 드문 숲과 산을 가로지르는 여로는 만만치 않았다.
제국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횡단하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아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전이라는 명목으로 만신전은 제국의 실권을 깊이 장악한 상태.
황제마저도 만신전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였으니, 제국은 곧 에낙사구스의 수족이나 다름없어진 셈이었다.
‘이미 도시마다 광장이며 여관에 현상수배 의뢰서가 붙어있다지. 현상금이 금화 다섯 궤짝이랬나.’
금화도 아닌 은화 몇 푼에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세상이다.
궤짝 단위의 금화라면 주점 여급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
도시건 마을이건 들어가는 순간 모두가 적이라고 보면 되는 상황이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전부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어찌됐건 시에나의 새들이 주변을 실시간으로 정찰했기에, 일행은 큰 문제 없이 제국의 동쪽 국경에 접근할 수 있었다.
새들은 정찰병일 뿐 아니라 정보원이기도 했다.
근처의 마을이나 도시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까마귀들은, 여관과 주점을 오가며 능숙하게 소문과 정보를 수집했다.
“도시연합과 제국의 전쟁 양상이 자잘한 국지전으로 바뀌고 있어. 아마 머지않은 시일 내에 휴전 협정을 맺을 것 같아.”
모닥불을 앞에 두고서 시에나가 말했다. 댈런은 소시지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겉면이 좀 탔군. 루시아의 요리가 그리워지는데.
“윽, 이거 안 익었는데? 오늘 요리 당번 누구야?”
“나요.”
“···댈런 자네는 내일 당번 아니었나? 오늘은 시에나였고.”
“새들 풀어서 정보 수집하느라 바빠 보이더군. 그래서 나랑 바꿨소.”
난쟁이의 얼굴이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건량 주머니를 주섬주섬 여는 그를 두고, 시에나는 새들을 통해 건져낸 정보를 계속 풀어나갔다.
“용두마차의 주인이 마지막으로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지가 꽤 됐다지. 아마 대규모 회전이 없어진 것도 같은 이유일 거야.”
“결계책률이 다시 효과를 발휘할 때가 됐다는 거군. 맞소?”
“맞아. 도시연합의 주력은 초월자들이지. 그들이 금강궁으로 돌아가고 나면, 주 전력이 제외된 군대로 전쟁을 지속할 수는 없으니까.”
시에나가 스튜 그릇을 휘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댈런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거 아까부터 젓기만 하고 뜨는 걸 못 봤는데, 착각인가?
“흠흠,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구만. 그러면 제국 입장에서는 역습할 기회 아닌가?”
“글쎄···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해야겠네요. 북쪽에서는 도시연합에게 땅을 빼앗겼지만, 대신 남부의 대수림 근처에 있는 나라들을 전부 먹었어요. 북부보다 기름진 건 물론이고, 도시연합에 뺏긴 땅의 두 배쯤 되는 영토죠.”
“굳이 도시연합과 다시 크게 한 판 붙느니, 정복한 점령지를 안정화하겠다는 거구만.”
“그런 것 같아요.”
댈런과 일행이 제국 영토의 절반을 횡단하는 동안, 전쟁의 그림자 역시 점점 짙어졌다.
대수림 인근의 자잘한 국가들은 죄다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제국 북부에서는 대규모의 회전이 몇 번씩이나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제국의 총사령관이 두 번이나 사망해 교체되고, 금강궁의 초월자들 중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지.
“도시 분위기는 어떻소?”
“삭막해. 음울하고. 사람들은 의욕을 잃은 것 같아.”
전선이 치열할수록 후방의 분위기 역시 음울해지기 마련.
허나 이 근방 도시와 마을들의 공기가 삭막한 건, 비단 전쟁의 여파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보다는 뱀파이어 접경지 특유의 분위기에 가깝겠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뱀파이어의 땅 어딘가에 강림한 혈령의 존재가, 물과 공기를 침식하며 광범위한 일대의 생기를 빼앗아 가기 때문일 테였다.
“정황상 혈령은 이미 강림했소.”
댈런은 반쯤 남은 소시지를 불 속에 던지며 말했다.
옳다구나 스튜를 불에 쏟는 시에나를 외면한 채, 그는 땅을 쓸어 흙 한 줌을 쥐어 들었다.
손틈 사이로 푸스스 쏟아지는 검은 흙.
분명 촉촉한 수분기를 머금었는데도 불구하고, 토양에는 이상할 정도로 생기가 없다.
“그리고 그건 놈이 직접 군대를 모을 작정이라는 이야기지. 다만 아직 놈이 군대를 움직여 인근 왕국을 침공했다는 소식은 없소.”
에낙사구스와 협력 관계를 맺은 이상 제국을 침공하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면 놈이 움직일 방향은 북쪽의 삼왕국을 향해서였다.
“그렇다면 아직 군대가 결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겠구만. 규합 중인 혼란을 틈타겠다는 건가?”
“정확하오. 시에나의 말대로 시기가 잘 맞았지.”
타다닥.
바람에 흩날린 흙이 모닥불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댈런은 손을 털고 말했다.
”우리는 내일이면 국경선을 넘어가, 혈령의 제단이 있는 본거지를 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