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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 잠입(2)
쿠르릉···.
아득하게 들려오는 우렛소리. 연회장의 벽과 바닥이 한바탕 들썩였다.
그 충격에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역시 이리저리 흔들렸다.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며 짤랑거리는 광경은 마치 빛무리가 춤추는 듯 보였다.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그 정신없는 춤사위를 보던 라비루스크 자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렸다.
그가 말했다.
“살다 보면 가끔 개 같은 일이 일어나곤 하지.”
연회장은 온통 피바다였다.
매일같이 하녀장을 닦달해가며 깨끗하게 닦아온 바닥은 내장과 살점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차르국산 원목으로 만든 탁자는 산산이 조각나 사실상 장작으로나 써야 할 판.
그리고 연회장 한가운데의 소파 위에서는, 이 모든 참상을 만든 장본인이 다리를 꼰 채 까딱거리고 있었다.
물론 다리만 까딱거리는 건 아니었다. 전사는 손에 들린 도끼도 함께 까딱거리고 있었다.
“사백삼십 년을 살아보면 그런 개 같은 일을 참 많이도 겪어보게 된다네. 인간으로 치면 대충 일고여덟 명분의 인생을 사는 셈이니까, 개 같은 일도 대충 일고여덟 배쯤 겪는다는 거지. 하지만 그거 아나?”
“뭐.”
“···그 하고많은 사건사고들 중에서도, 오늘처럼 어처구니가 날아가 버린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네.”
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뚱한 얼굴로 도끼를 까딱거릴 뿐이었다.
어떤 감흥도 내비침이 없는, 사람이 맞기는 한가 싶은 무감정한 얼굴.
그 무표정함을 보며 자작은 두 시간 전을 떠올렸다.
그때도 저렇게 뚱한 얼굴이었던 전사는, 분명 단단한 쇠사슬에 묶인 상태였었다.
‘자애로우신 라비루스크 자작님, 미리 허락받지 못한 방문을 용서해주십시오. 이번에 잡은 사냥감의 질이 너무나도 좋아, 최대한 싱싱할 때 진상하고자 허락 없이 찾아오게 되었나이다.’
고개를 조아리며 성문 앞에서 전사와 동료들을 끌고 왔던 남작.
그리고 등 뒤에서 성문이 닫히자마자, 곧바로 돌변해 성채의 경비들을 학살하기 시작하던 ‘사냥감’들.
거기까지가 두 시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뒤야 피바다인 연회장만 봐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전사와 동료들은 성문에서부터 가로막는 모든 걸 죄다 부수고 죽이며 연회장까지 쳐들어왔다.
그리고 연회장의 가신들마저 순식간에 전부 죽여버리더니, 저렇게 도끼를 까딱이며 협상인지 협박인지 모를 조건을 늘어놓고 있었다.
“자네, 이 성채가 뚫린 게 백오십 년 만인 건 알고 있나?”
“알아야 하나?”
“···백작님께서 정하신 법령에 따라, 합법적인 절차로 내가 전대 자작의 성채를 점령했을 때의 일이지.”
“안 궁금했는데. 왜 자꾸 협상 테이블에서 불필요한 정보를 나열하지?”
“······.”
불필요한 정보고 나발이고, 대화 자체를 이어갈 생각이 없으면서 협상은 무슨 협상?
협박이라 쓰고 협상이라 읽는 전사의 태도에, 라비루스크 자작은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사실 어지간한 상황이었다면 고위 뱀파이어에 5위계의 초월자인 그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협박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전에 내부에 침투한 적들을 빠르게 격살하고, 놈들을 안으로 들인 남작을 반역죄로 엄히 다스렸겠지.
자작과 그의 언데드 군세는 뱀파이어 백작 휘하의 자작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
어떤 방식이든 내부로 침투한 적은 몇 안 되는 인원일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방비 역시 아주 없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몇 안 되는 적들의 대다수가 5위계 이상의 초월자라는 사실이었다.
책임을 물어야 할 남작의 경우, 이미 소파 근처에서 머리만 남아 굴러다니는 중이었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결정이나 하시지. 할 거요, 말 거요?”
거기다 성채를 뒤엎으면서 들어온 전사가 요구한 조건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자네와 자네 동료들을 혈령의 제단에 진상하면, 그러면 날 살려주겠다고?”
“그렇소. 이 자리에서 죽는 대신, 살아날 기회를 주겠다는 거요.”
“혹시 자네의 발밑에서 굴러다니는 남작이나, 그 남작이 부리는 사냥꾼에게도 같은 조건을 걸었나?”
“그랬지.”
자작이 고개를 기울였다. 남작의 머리통을 날린 건 분명히 저기서 까딱거리고 있는 도끼였다.
그럼 나는 안 죽인다는 보장이 있나?
물론 그렇게 물었다가는 단번에 저 도끼가 까딱임을 멈추고 목표를 향해 날아갈 것 같았기에, 자작은 조금 다르게 이야기했다.
“···남작은 왜 죽였나?”
“살아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살려주겠다고는 안 했거든.”
“뭐?”
전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생각해보시오. 애초에 내가 살려줬다고 쳐도, 이놈이 살 수 있었을까?”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그가 직접 반역죄를 물어 죽였을 것이다.
“바로 그거요. 나는 그쪽한테 선택권을 주는 것뿐이오. 지금 여기서 죽을 건지, 아니면 내가 혈령이랑 한 판 붙을 때 도망칠 기회를 노려볼 건지 말이오.”
쿠르르릉······!
다시금 흔들리는 연회장. 자작은 입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뇌성은 눈앞의 전사가 개방한 영역의 일부였다.
불과 번개의 비를 쏟아대는 검붉은 먹구름. 그걸 성채의 주인 자신의 마력이 지배하는 성벽 안쪽에 소환하고서도, 전사는 겉보기에 딱히 힘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동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성채 곳곳에서 언데드 군세와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존재감과 능력으로 미뤄봤을 때, 명백한 초월자급의 강자들이 여럿.
반신격으로 추정되는 눈앞의 전사를 어떻게 따돌린다 쳐도, 초월자 여럿의 포위망과 추격까지도 뿌리칠 수 있을까?
계산은 빨랐다. 자작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끝으로 쓸며 입을 열었다.
“···혈령의 제단으로 안내해드리겠소. 준비할 시간을 주시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사백 년이나 살았다더니,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닌 모양이오.”
“······.”
“빈방에서 일행과 함께 기다리고 있지. 허튼 생각은 마시오.”
소파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나서는 전사. 자작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허공에서 사슬이 튀어나오더니 도끼를 넘겨받아 잘 닦고는 허리띠에 돌려놓는 광경이며, 문 앞에서 뒤통수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늘어놓는 모습까지.
“음? 사백 년이면 아직 새파란 애송이라고? 그거야 당신네 종족이니 그렇지. 인간 기준으로는 차고 넘칠 정도로 늙은···.”
쿵.
묵직한 연회장 문이 부드럽게 닫히는 것과 동시에, 창밖을 가득 메웠던 검붉은 먹구름이 스르르 흩어져갔다.
자작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저건 미친놈이라고.
“···제단이 어디쯤 있을지 모르겠군. 절차를 몇 개 생략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어.”
그리고 사백삼십 년 인생 경험상, 미친놈에게 함부로 개기면 안 되는 법이었다.
***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치고, 자작이 요구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댈런이 모니터 너머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혈령의 제단에 제물을 진상하는 건 꽤나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는 일.
제단 직속의 고위 뱀파이어들이 제물을 검증하러 방문하고, 검증이 끝난 뒤에야 접선할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자작쯤 되는 지위면 제물 검증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협상 아닌 협상을 한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작 사흘이라니. 제물 검증 절차까지 죄다 생략하고서.’
자작 본인의 목을 내걸고 제물을 보증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일 텐데. 그렇게까지 협상이 잘 먹혀들었던 건가.
확실히 오래 살아온 존재들을 대할 때는, 다짜고짜 도끼를 휘두르기보다 지긋하게 앉아서 대화하는 게 더 효율이 좋을 때가 많았다.
[댈런. 네가 저 뱀파이어에게 한 일은, 통상적으로 대화가 아닌 협박이라고 하느니라.]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으니, 생각 역시 다양한 것이겠지.
접선 장소로 가는 수레 안에 앉은 채, 댈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슬에 묶인 손을 들어 턱을 긁적였다.
그때 툭 하고 뭔가 떨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손을 묶은 사슬이 끊어져 있었다.
“댈런. 사슬 끊어졌다네.”
“쯧. 제물을 묶는 사슬이라면서 왜 이렇게 약하게 만든 건지 모르겠군.”
“사슬이 약한 게 아니라 자네 힘이 강한 걸세. 가만있어 보게나. 토미, 배운 대로 할 수 있겠지?”
“예.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우웅······.
깜깜한 수레 안을 밝히는 황금빛의 정광.
수레 맞은편에 앉은 토미가 스승의 조언을 받아가며, 댈런의 손을 묶은 사슬의 시간선을 되감기 시작했다.
“많이 늘었군.”
“아닙니다. 여전히 스승님에 비해 일천할 뿐입니다.”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도 집중을 놓지 않는 금발의 청년 마법사.
펠버가 원로 마법사이던 시절 들여왔던 제자인 그는, 본인의 겸손함과는 별개로 상당한 수준까지 성장해 있었다.
하수도에서 파문당한 사형이 조종하는 프로그맨 무리에 납치당해, 한낱 실험체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간선에 간섭하는 펠버의 주문을 보조할 뿐 아니라, 스승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도 시간선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그러고 보면 파른도 실력이 많이 늘었지. 성장기를 지나면서 키도 크고 근육도 꽤 다부지게 붙었어.’
파른.
한때 미등록 용병으로 갈리오스 상단에 고용되었던 소년.
이제는 성기사단에 정식으로 입단해 수습 기사의 자리를 거쳐,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루시아에게 듣기로 소년을 가르치는 게 성기사단의 단장인 에드거 라인하르트 본인이라던가.
전쟁신의 계시를 받아 ‘인도자’라 불리는 단장이 첫만남에 ‘어린 검성’이라 불렀을 정도면, 소년 역시 언젠가 큰 활약을 할 가능성이 컸다.
‘비록 재의 마녀에게 한쪽 눈과 팔을 잃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상관없겠지.’
신체의 어느 부분에 장애가 있다고 해서 영웅이 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온갖 주문과 신비, 신마저 실재하는 이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 괴물 같은 단장도 한쪽 팔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 모두 잃 외팔의 검성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걱정되느냐?]
‘아니. 걱정은 아니었소.’
[허면?]
‘글쎄.’
흐릿한 희망일까. 혹은 가벼운 들뜸일까.
수백 회차 동안 고정되었던 미래에서 비껴간 끝에, 종말의 대항마로서 피어나는 새싹들을 바라볼 때면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어쩌면 많은 회차에서 동료들을 모으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종말을 끝내려 했던 댈런이기에 더 그런 것이겠지.
어쨌든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상념을 갈무리한 댈런은 고개를 돌려 뼈로 만든 창살 밖을 내다봤다.
두두두두···!
뼈로 만든 수레는 황량한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무려 혈령의 제단에 직접 제물을 진상하러 가는 길이기에, 당연하게도 수레 혼자 덩그러니 가는 건 아니었다.
수레를 둘러싼 건 수십 대의 해골 전차와 백이 넘는 망령 기사, 그리고 뼈와 근육이 역동적으로 뒤틀린 이형의 언데드 생명체들의 거대한 호위진.
댈런과 일행은 그 중심에 자리한 수레의 뒷칸에 타고 있었다.
댈런은 이번에는 조금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습관처럼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속도를 줄이고 있군. 접선지에 거의 다 온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