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35화 (235/288)

235

반신의 빛(1)

쐐애애액―

번쩍이며 공간을 건너뛰어 사라진 빛의 원반.

고위 뱀파이어쯤 되는 존재가, 그 정체가 유물 도끼임을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하다.

“뭐, 뭣···!”

“왜 하필 지금···아니, 이게 아니라!”

어찌할 틈도 없이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두 뱀파이어가 당황하는 사이, 댈런은 시에나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뒤는 맡기겠소.”

“얼마든지.”

「답보(踏步)」

투웅―!

전사의 거체가 흐릿해진다.

허공에 마력의 발판이 모여들고, 활시위를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속하는 신형.

푸드드득!

“으하하하! 폭탄 받아라 이놈들아!”

등 뒤에서 수많은 깃털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심지에 불을 붙이며 내지르는 난쟁이의 고함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린다.

댈런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라보는 건 오직 정면.

열리다 말고 멈춘 육중한 관문과, 그 한가운데 양각된 거대한 보랏빛 해골을 직시할 뿐.

투두두―꽈광!!

허공을 연달아 걷어차며 쇄도한다. 순식간에 소리보다 빨라진 그의 신형.

무식한 돌격에 밀려난 공기가 충격파가 되어, 드넓은 복도를 한바탕 휩쓰는 순간.

단단하게 말아쥔 채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주먹은, 반으로 갈라져 열리다 만 보라색 해골의 미간에 닿아있었다.

「합투권」

쩌────

뚫어낸다.

단순히 금속을 으스러뜨리는 걸 넘어서서, 그 이면의 술식 체계까지 찢어발기는 권격의 첨단.

혈령의 제단으로 이어지는 이 관문은, 금속의 강도와 무게만으로도 어지간한 도시의 성문을 압도할 수 있었다.

거기다 수백 년간 중첩된 수십 가지 방어 술식까지 더해지면, 혈령의 유령선에서도 가장 튼튼하게 방비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

드드드드드─

충돌의 순간 마력과 마력이 반발하며 소용돌이친다.

피부를 찢는 마력의 파편들을 무시한 채, 허공을 걷어차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날개뼈에서부터 공명을 시작해, 주먹까지 내달린 마력이 다섯 갈래의 나선으로 꼬여들고.

「철격(徹擊) : 여중쇄(閭重碎)」

날카로운 창끝의 형상으로 모여든 예기가 권격 너머로 뻗어나가며, 문에 각인된 수십 가지 술식 방어를 죄다 짓뭉갠다.

우지지지직― 쿠웅!

관문이 찢어진다.

힘에서 밀려 열리는 걸 넘어서서, 가운데의 접합부가 뻥 뚫려 너덜거리는 모습.

낡은 여관 문짝처럼 반파되어 너덜거린 경첩이, 결국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진다.

댈런은 떨어진 문짝을 밟고 관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사백 년 만이군.]

거대한 전당이었다.

뼈와 돌이 기괴하게 짜 맞춰진 바닥과 벽. 왕성의 궁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높은 천장.

황량할 정도로 텅 비어있는 홀의 끝에는, 수백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층계가 있었다.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층계 위에 자리한 혈령의 제단에는, 옥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화신체와 진체를 망라하고, 내 육신에 타격을 입힌 존재가 나타난 게 말이야.]

옥좌 위에 앉은 존재는 인간의 형상이었다.

살과 피, 내장과 뼈가 아니라, 섬뜩한 붉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형상.

떵그렁!

놈의 손끝에서 유물 도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밖에서 댈런이 날렸던 물건이었다.

옥좌 위의 존재는 입꼬리를 한가득 끌어올리며 손을 들어 이마를 쓸어 넘겼다.

이마에 새겨진 상흔은 이미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댈런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앞으로 걸어갔다. 악신 쑴의 화신체를 소멸시킨 뒤, 저 머나먼 북부 에클라힘에서 대륙의 최남단까지 내려온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환영한다. 전사. 나는 모든 언데드들의 아버지이자, 죽음을 거부한 존재들의 지배자.]

붉은 기운의 인간이 입을 열었다. 놈의 전성은 피처럼 뚝뚝 떨어지는 질감이었다.

[네크로맨시의 원천이자, 온 대륙의 사령술사들이 모시는 군주. 죽음과 부패의···]

“부패의 악신 테모므론. 그리고 흡혈귀들의 신, 혈령.”

[호오. 나에 대해 알고 있구나.]

“그럼. 아주 잘 알지.”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공간에서 도끼 한 자루를 더 꺼내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 뒤통수 처맞은 게 아직도 생생한데, 어떻게 잊겠냐.”

[종말의 끝에서 절규한 사령술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어느새 완전히 아문 혈령의 이마 위쪽. 허공에 수놓아진 글자들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

악신 테모므론은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한 강력한 부하를, 종말 이후의 마지막 순간에 잡아먹은 배신자라는 사실이었다.

***

목표를 향해서 꼭 정도만을 걸으리란 법은 없다.

적어도 이 세계에 떨어지기 이전, 모니터 앞에 앉아있던 댈런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당시의 그는 클리어라는 목표 하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서쪽 대사막 너머의 모래바람 왕조를 수백 개의 지하무덤에서 통째로 깨워버리거나, 미궁 심층으로 수월하게 내려가겠다며 미궁도시의 결계탑을 폭약으로 날려버리기도 서슴치 않았던 시기.

사령술에 손을 댄 것 역시 그즈음이었다. 흑마법사로 클리어할 방법을 찾던 중의 일이었다.

‘악신은 총 다섯. 흑마법사로 플레이하려면 그 다섯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

라필렘은 바다 건너 엘프들에게나 관심이 많았다. 용신은 인간 따위를 부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종족 DLC를 구매하지 않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악신은 셋뿐.

종말이 제대로 오기도 전에 에낙사구스에게 뒤통수를 몇 번이나 맞고, 그나마 다루기 편한 쑴이 싸움에 미친 돌대가리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선택지가 하나로 줄어들었다.

‘테모므론의 밑으로 들어가 사령술사가 되는 것.’

그렇게 시작한 극후반부의 어느 회차.

댈런은 악신의 편에 서서 종말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볼 수 있었다.

‘사령술사, 신께서 너를 영원토록 벌하실 것이다······.’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의 시체 곁에서, 악마 살해자 루시아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저주를 들었고.

‘운명의 강물은 결국···닫힌 순리대로 흘러가기 마련인 걸까요.’

불타오르는 금강궁의 폐허 아래, 선각자의 하얀 눈동자가 흘려보낸 한줄기 눈물을 마주했다.

차리나의 에클라힘 궁전을 무너뜨렸다.

동쪽의 삼왕국에 대학살을 일으켰다.

두 번째 혈귀전쟁으로 제국의 황도를 망자들의 도시로 만들었으며, 끝없는 언데드 군세를 몰아 서쪽의 길드 연합까지 철저하게 짓밟았다.

아무리 모니터 너머에서라 해도 학살이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단순한 폴리곤에 데이터 쪼가리였을 뿐이지만, 눈앞에서 희망이 꺾여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음 한쪽에 오래도록 찜찜하게 남아있었으니까.

그 모든 걸 인내하고서 세계의 멸망 이후까지 살아남았다.

생존 그 자체가 클리어의 키워드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하지만 온 대륙이 불타고, 지상이 지옥으로 변한 뒤에도 게임은 끝나지 않았지.’

허무함을 느껴 한참이나 게임을 접었었다.

다시 게임을 켰을 때는 한 달이 훌쩍 지난 이후였다.

기왕 종말 이후까지 살아남은 회차이니, 미궁을 내려가 소원의 돌이 실존하는지라도 알아보자고 생각했는데.

게임을 켜자마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등에 칼이 꽂힌 채로 혈령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어버렸다.

‘그 사령술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모든 회차가 누군가에게는 현실이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댈런은 가끔씩 그런 생각을 했었다.

종말의 장기말이 되어 세상을 지옥도로 만든 뒤, 그 주인에게 배신당해 최후를 맞이한 흑마법사는 사후에 어떤 감상을 남겼을지.

그리고 그걸 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제단 위에서 보란듯이 버티고 선 혈령을 쓰러뜨리고, 놈의 부스러기에서 사령술사의 시체를 찾아 계승하는 것.

‘아르보르.’

[예, 주인님.]

촤르륵!

머릿속으로 신호를 보내자마자 열리는 아공간의 통로.

차디찬 사슬 한 가닥이 아공간에서 손도끼를 꺼내, 어깨 위로 들어 올린 손아귀 안쪽에 물 흐르듯 안착시킨다.

가볍게 호선을 그리는 손끝. 직후 허공에서 휙 하고 사라지는 손도끼.

쐐애액―콰직!

공간을 빗겨 건너뛴 빛의 원반은, 혈령의 코앞에서 생겨난 보호막을 완전히 뚫지 못하고 박혔다.

[뛰어난 투척이다, 전사. 허나 두 번 통하지는 않을 것이야.]

혈령이 웃었다. 비릿한 웃음이었다.

“두 번은 안 통하겠지. 그런데 말이다.”

댈런은 마주 웃으며 손을 한 번 더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르보르의 사슬이 또 다른 손도끼 한 자루를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악신의 화신체를 상대하러 가는 여정인 만큼, 댈런이 아무 준비 없이 미궁도시를 떠난 건 아니다.

신비 등급 스킬들의 연구와 용골 이식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강화하는 한편, 댈런은 아공간에 썩어나는 은금을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경매장 티켓과 전후의 혼란, 그리고 금강궁의 연줄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

경매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시중에 풀린 유물 무구들을 죄다 사들이고, 미궁도시 방어전의 보수 명목으로 금강궁의 보물창고까지 열어 추가로 들여왔다.

키이잉···.

기이한 울림과 함께 거친 바람의 날을 덧씌운 이 손도끼 역시, 그때 얻어온 유물 무구들 중 하나.

도끼에서 일렁거리는 술식의 마력에 혈령의 표정이 희미하게 꿈틀대는 걸 보고서, 왼발을 앞으로 내디딘 그가 덧붙였다.

“어디 백 번 찍어도 안 통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

「답보(踏步)」

투웅―

훅 하고 솟구치는 시야. 드높은 전당의 천장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고개를 꺾어 올려봐야 하던 층계 위의 제단이, 어느새 저 아래쪽에 내려다보였다.

쐐애―

옥좌 앞으로 벌떡 일어선 붉은 인간의 형상을 향해 손을 휘젓고.

촤륵!

도끼가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다시금 손을 들어 올린다.

쐐―!

착 감기는 손잡이의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재차 도끼를 던져낸다.

순식간에 중첩되는 파공음. 번뜩이는 수십 개의 잔상.

동시에 허공에 아공간으로 향하는 통로들이 추가로 열리더니, 단창이며 장검 같은 유물 무구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엑시.”

모래바람 왕조의 탄령이 무형의 파동이 되어 무구의 제어권을 휘어잡고.

“탓숨.”

두 번째 탄령이 손 닿지 않은 상태에서 그 능력을 폭주시키며, 자멸하지 않는 아슬아슬한 선에서 최대한의 화력을 뿜어낸다.

키이이잉···!

새파란 뇌광을 머금은 황금빛의 삼지창은, 황금 구역의 이름 모를 거부가 창고에서 썩히던 ‘칼페온의 단창’.

치이이―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며 주변의 공기마저 부식시키는 세검은, 금강궁의 보물창고에 보관 중이던 ‘릴리스의 이빨’.

각양각색의 정광을 뿜어대며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는 수십 정의 무구는, 하나같이 초월자를 상대로도 치명적인 것들뿐.

그 모두가 댈런이 수백 회차 중 한두 번 정도는 직접 다뤄보거나, 당시 함께하던 동료에게 선물했던 물건들이다.

[대체 어디서 이···!]

두두두두두─

전성을 이어갈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치명적인 마력과 술식을 머금은 유물 무구들이, 폭우처럼 쏟아지며 수십 가지 색채로 전당을 수놓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