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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의 빛(3)
휘이이······!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 아래.
살을 에는 바람이 희끗거리는 눈발과 함께 옷 속을 파고든다.
드넓게 펼쳐진 수십 수백의 산봉우리들은 지평선을 반쯤 가릴 지경이었다.
해골 마차를 타고 꼬박 며칠을 가로지른 황량한 대지는, 저 멀리 지평선의 끄트머리에나 잿빛 실선으로 보일 뿐.
[어떻게.]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광대한 영역의 정경을 눈에 담은 혈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한낱 인간이···.]
“이렇게 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냐고?”
[···단순한 넓이가 문제가 아니다. 한 인간이 품은 심상의···.]
“심상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냐는 거겠지. 인격이 여러 개가 아닌 이상 마음이 여럿일 수는 없으니까.”
[······.]
혈령이 눈을 파르르 떨며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면 정해진 레퍼토리나 다름없다.
이거 작가 새끼가 하라는 창작은 안 하고 대사 복붙이나 하는 거 같은데.
스쳐지나가는 상념에 참 실없는 상상을 한다 생각한 댈런은, 피식 입꼬리를 당기며 검을 한 바퀴 돌렸다.
후웅―
그 단순한 동작에 일대의 마력풍이 휘어지며, 공기가 희미한 울음을 토한다.
댈런은 잠시 침묵하곤 대답했다.
“글쎄.”
어떻게 이토록 넓은 영역을 가지고, 수많은 심상의 정경을 한 번에 품을 수 있었을까.
그건 댈런 본인도 아직까지 풀어내지 못한 난제였다.
예전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게임의 지식이 전부이던 시절에, 영역이라는 건 모니터 너머에서도 제대로 비치지 않던 미지의 힘이었을 뿐.
허나 위계를 쌓아 초월의 벽을 넘어서고, 대륙 곳곳에 숨어있던 은거기인과 초월자들을 숱하게 만난 지금은 알았다.
그 어떤 초월자의 영역도 자신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다. 최상의 몸뚱이를 입고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 몇 달을 헤맸었지.”
어릴 적부터 천재라 불린 숱한 술사들도, 초월의 벽 앞에서는 한계를 느끼고 절망한다.
천외천의 재능을 타고나 일찍이 그 벽을 넘어선 인외의 존재들 역시, 영역의 풍경은 하나의 맥락 안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과거를 극복하고 현재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바.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미래의 편린에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선택한 심상의 방향성을 확고하게 정해 앞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북부의 드넓은 영토를 지켜낸 차리나나, 천 년간 금강궁의 심처에 앉아 미래를 읽어내는 선각자 알리아트 역시 그랬고.
하물며 전격술식의 극한에 닿아 종말의 한복판에서 악신 쑴을 쓰러뜨린 대마법사 댈타리온마저, 영역의 정경은 하나의 심상과 맥락 아래 놓여있던 건 그런 이유.
반신의 경지라 일컬어지는 6위계의 초월자들마저 그랬는데.
수백 년에 한 번 나타날 천재는커녕, 영혼은 삼십 대 배불뚝이 아저씨일 뿐이었던 그가 어떻게 이 많은 정경을 홀로 품을 수 있는 걸까.
“···아마 여기 펼쳐진 영역들이, 나 하나의 심상이 아니라 그렇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악신의 화신체가 노호성을 토했다. 놈이 말했다.
[어떻게 남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이냐. 스스로 빚어내지 않은 정경을 자신의 영역에 녹여낸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댈런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맞았다.
단순히 모니터 너머에서의 현질, 그 몇만 원짜리 DLC만으로 이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었다.
수백 회차에 걸친 캐릭터의 흔적을 회수하는 계승자 DLC가, 이 세계에서 역천의 우물 속에 잠든 수많은 세계선의 영혼으로 설명되었듯이.
그 수많은 심상을 흡수하고도 멀쩡한 그의 영역에도,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한 숨겨진 부분이 있는 것이겠지.
모니터 너머에서 수만 시간을 갈아 넣으며 숱한 비밀에 접근한 그라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쿠구구구···!
수십 산봉우리의 정중앙.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떨어진 저 빛의 기둥 역시 그런 비밀 중 하나였고.
‘영역의 완전개방을 각성할 때 처음 나타났지.’
르비바흐 숲에서 쥐인간들을 쓸어버릴 때 처음으로 각성한 영역의 완전개방.
솟아오른 설산과 영역의 정경들은 댈런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나, 난데없이 산 정상에 내리꽂힌 빛의 기둥은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저 빛이 게임을 시작할 때 화면을 가득 채우던 빛과 비슷하다는 것 정도.
어찌됐건 분명한 건 이 대륙에 떨어지며 입게 된 몸뚱이와 심상의 세계 모두에,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장 생각할 일은 아니지.’
스스로의 힘을 탐구하고 파고드는 건 분명 중요한 일.
허나 그 모든 수련과 연구는 눈앞의 적을 쓰러뜨린 뒤에야 의미가 있는 일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숱한 훈련들과 실전 역시, 오늘 이 한 번의 싸움을 위한 준비였다 해도 틀리지 않았다.
저벅.
발목까지 덮인 눈을 밟고 한 걸음 내디딘다.
한 바퀴 돌린 성검을 머리 위로 쭉 뻗어내며, 그대로 하늘 높이 던져올린다.
쐐애―!
성검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춘 것과 동시에, 저 멀리 잿빛의 하늘과 대지가 꿈틀거리며 그 권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휘이이이···!!
주인의 의지를 읽은 설산의 눈보라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진 순간.
쉭―
하얗게 뒤덮인 시계 사이, 댈런의 육신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회명(回冥)」
잿빛 음영이 일렁인다. 눈보라 사이에서 허공을 가르고 나타난 댈런의 신형.
「이십사연답산(二十四聯踏散)」
직후 똑같은 댈런의 신형이 사방에서 우르르 쏟아져, 혈령을 중심으로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한 채 움직인다.
[주인님!]
촤르르르르!
아공간으로 연결된 수십 개의 통로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유물 무구를 꺼내 댈런들의 손에 쥐여주고.
[이깟 잔재주···!]
혈령의 손끝이 전후좌우를 휩쓸 듯 휘둘러지며, 허공에 붉은 문자들을 수놓은 순간.
「닫힌 설산의 하늘」
「대하주염(垈煆柱炎)」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이빨을 드러냈다.
쿠과과과과──!!
찍어누른다.
먹구름에서부터 시작되어 하늘을 가르고 내리꽂히며, 막 움트기 시작한 혈령의 술식을 으스러뜨리는 불기둥의 향연.
화마가 강림한 곳마다 발목까지 쌓인 눈밭이 시야를 가리는 수증기로 변하고, 열기 자체가 공기를 휘어잡으며 시계를 일그러뜨린다.
설원에 강림한 사실상의 불지옥.
혈령은 한가운데서 다시 한번 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육신을 구성한 기운이 뻗어 나오더니, 거대한 핏빛 대검 두 자루로 변해 양손에 쥐어졌다.
놈이 소리쳤다.
[어디 덤벼보거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불길과 열기의 틈바구니를 뚫고 전사의 신형이 눈밭 위를 가로지른다.
겉으로는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는 스물셋의 분신과 하나의 본체가, 가지각색의 유물 무기를 들고 동시에 내달렸다.
소리의 속도를 돌파한 스물네 곡선이, 하나의 붉은 점으로 수렴한 순간이었다.
쩌저저저저저저저────!!
붉은 검이 녹색 창을 쳐낸다. 내려친 철구에서 벼락이 터져 나온다. 몸을 돌려 피하며 검끝을 찔러 반격. 방패를 앞세워 튕겨내고 찌르는 단검.
반걸음 옆으로. 한 발짝 사선으로 접근. 어지러이 얽히는 스물다섯 쌍의 발자국. 한 점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가도, 나비 떼처럼 흩어지며 술식을 터뜨릴 공간을 확보한다.
한 번의 호흡마다 수백 번이 넘는 공방이 교차하고, 낭비되는 손짓 하나 없이 모든 동작이 허공에 수인과 마법진을 그려낸다.
꽈르르르르르르─!!
쉴새 없이 터지는 술식과 주문의 향연에, 밀려나는 공기의 폭음만이 경박하게 울려 퍼질 뿐.
압력을 이기지 못한 공간이 진공과 다름없게 변하고, 최소한의 저항마저 사라진 팔다리가 한층 더 빠르게 움직이며 한계 이상의 속도를 내보인다.
충격파가 일대를 뒤덮은 눈을 전부 날려버리는 걸 넘어서서, 그 아래의 대지까지도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는 광경.
상리를 초탈한 공방의 교환 속에서, 혈령은 단신으로 꿋꿋하게 모든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런 괴물 같은···!]
유물 무기가 손상될 때마다 아공간의 통로를 열어, 새 무기를 건네주던 아르보르가 질겁할 정도.
단순히 엉성한 분신을 수십 명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맨손으로 산봉우리를 날려버린 무투가인 댈버의 영역,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의 권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발현한 분신들.
육체만으로 공간을 다루는 공능을 극한까지 구부려 만든, 사실상 본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근력과 민첩성 등의 육체 능력은 물론, 판단력과 술식적인 재주까지도 원본과 엇비슷하다.
거기다 댈런의 경지는 이미 댈버의 생전 위계를 넘어선 지 오래된 바. 여덟이 한계던 영역의 힘을 세 배까지 끌어 올렸음에도.
[제법이구나! 허나 이 정도가 끝이라면 종언의 선고에 맞설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단 하나의 적을 상대로, 이렇다 할 상처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
쩌저저저저정!!
하나와 스물넷이 얽혀든다. 권능과 권능이 시퍼런 날을 맞대고 튕겨낸다.
일대의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며, 내리꽂히는 대하주염의 열기마저도 순간순간 흐트러지는 전장.
‘공격을 감지하고 피하는 게 아니다.’
머릿속을 아득하게 달구는 수천 번의 수싸움 사이에서도, 댈런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혈령의 패턴을 읽어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예측? 예지? 읽어낸다기보다는 결과를 미리 정해두고 끼워맞추는 것에 가까워.’
오감과 기감의 사각을 노리고 찔러 들어가는 창끝도.
동시에 대처가 불가능하도록 궤적을 설계한 검격에도.
마치 그 과정과 흐름을 미리 읽어냈다는 듯, 막고 흘려내며 피하고 받아친다.
그건 마치 받아낸다는 결과를 확정해둔 채로, 그 과정을 억지로 지어내는 것만 같은 기예.
기술이나 수싸움의 영역을 넘어서서, 국소적인 개념에서나마 인과 자체를 쥐고 휘두르는 권능이다.
‘이게 신위의 존재.’
일곱 번째 위계, 신위.
제국의 만신전이 내세우는 가짜 신들이 아니라, 다섯 대지옥의 주인인 악신들의 진체가 닿은 무소불위의 경지.
화신체로서 그 위계의 온전한 권능을 발휘하지 못함에도, 이런 식으로 일부나마 그 잔재를 내비치는 게 가능한 건가.
그동안의 싸움을 전부 지켜봐 온 아르보르가, 저렇게 경악할 정도면 충분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언제는 안 그랬냐는 거지.’
마음 한편에서 올라오는 죽음의 두려움 따위 가볍게 짓밟은 채로, 하늘을 뒤덮은 검붉은 먹구름을 향해 의지를 쏘아 올렸다.
「닫힌 설산의 하늘」
「뇌람(雷濫)」
꽈르르릉──!
수백 다발의 낙뢰가 빗발처럼 떨어진다.
「영역 공명」
「종언에 드리운 회백의 하늘」
「쌍천(雙天)」
잿빛으로 물든 대지가 하늘의 울림에 화답하며 권능의 한계를 끌어올렸다.
「청뢰(靑雷) : 공명」
「청라백화(靑拏白化)」
불기둥 사이의 여백을 찢어발긴 푸른 뇌전의 폭우가, 하늘과 땅을 망라하고 단 한 점의 그림자마저 지워내버린 순간.
붉은 기운으로 빚어진 혈령의 육체에, 처음으로 뚜렷한 상처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