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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39화 (239/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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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1)

“테모므론― 바리안!”

날카롭게 쉰 목소리로 외친 주문.

쩌저적!

악신의 이름을 부르는 흑마법의 영창에, 허공이 가로로 길게 찢어지며 커다란 지옥문이 나타난다.

히히힝!

지옥문에서 튀어나온 건 열두 마리 망령 기사였다. 고등급 소환 마법을 쓴 뱀파이어는 살짝 가쁜 숨으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저기 저놈들! 저놈들을···커억!”

명령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들이닥친 격통. 가슴팍을 난자하는 듯한 통증에, 뱀파이어는 덜덜 떨리는 고개를 내렸다.

“으, 으으···!”

새빨간 눈에 단순히 난자된 듯한 게 아니라, 정말로 인정사정없이 헤집어진 상체가 비쳤다.

갈비뼈가 반쯤 드러날 정도로 찢겨나간 가슴팍. 그 안의 장기들에 틀어박힌 수십 개의 날카로운 깃털.

거기에 이어서 깔끔하게 잘린 채 척추와 혈관의 단면이 드러난 목···.

어라? 목?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붕 떠오른 머리가 허공에서 한 바퀴 돈 끝에 땅으로 철퍽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따라 땅에 처박힌 몸뚱이의 배후에는, 시에나가 세검에 묻은 뱀파이어의 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순혈은 이걸로 열넷.’

유령선에 탑승해있던 순혈 뱀파이어가 대충 마흔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처치한 것까지 생각하면, 남은 건 대충 스물 전후.

쓰러진 뱀파이어의 사체에서 깃털을 갈무리한 그녀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다음 목표물을 탐색하는 시선이 자연스레 아군의 동향까지 살폈다.

콰광! 꽈과과광!

“으하하하! 다 터져버려라! 불바다다! 불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폭탄을 흩뿌리다시피 하고 있는 비요른 칼라드라쿰이었다.

몰려드는 언데드 군세를 폭탄과 산탄총으로 갈아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 폭발과 소음으로 더 많은 망자들을 끌어들이는 외눈의 드워프.

맷돌에 들어간 곡물이 곱게 갈려서 흘러나오듯, 폭발의 반경 안쪽으로 들어간 언데드는 잠시 후 뼈마디가 잘게 분리된 채로 튀어나온다.

미궁도시의 경매장에서 댈런에게 금화 수천 닢짜리 아공간 주머니를 사서 선물 받았다더니, 아주 전 재산을 털어 그 안에 폭약을 비축해놓은 모양.

히히힝― 께엥!

방금 소환된 망령 기사들이 은가루 폭탄에 찢겨나가는 걸 확인한 시에나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수제 화약의 폭발보다도 더 화려한 광경이 능선 아래쪽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엘르― 메멘토 카시볼그!”

토미 발렌티노가 외워낸 주문이 황금빛의 반투명한 돔을 구축한다.

범위 안쪽에 있던 언데드와 뱀파이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

그렇게 발이 묶인 뱀파이어와 그 수하 군세에 들이닥친 건, 몸길이가 십 미터를 훌쩍 넘을 정도로 성장한 청린용 아카샤.

용언으로 마력을 그러모은 용의 주둥이가, 공기마저 얼리는 극한의 숨결을 토해냈다.

콰드드드드──!

숨결이 닿는 순간 해제되는 황금 장막.

시간의 흐름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용숨결이 적들을 일거에 쓸어버린다.

얼어붙는 동시에 숨결의 기운에 부서져 나가는 언데드 군세.

그렇게 부서진 얼음이 또 다른 언데드들을 우박처럼 후려치며, 연쇄적으로 파괴적인 얼음 폭풍을 빚어낸다.

부채꼴 형태로 거의 백 미터에 가까운 범위를 뒤덮은 숨결과, 그 배나 되는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얼음 폭풍.

모든 게 얼어붙고 깨져버린 대지 위. 살아남은 건 고위 뱀파이어 하나뿐이었다.

“크으··· 이런 버러지들이!”

쩌적― 와장창!

얼음처럼 깨져나가는 옷과 피부.

피를 줄줄 흘리며 간신히 버텨선 놈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 피부가 죄다 으스러져서 그렇지, 그들을 유령선 안으로 인도했던 뱀파이어 남작 본인이었다.

“이 앙헬라크 남작, 오늘 테모므론의 곁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을 막으리라···!”

키이이이───

선언과 함께 이지러지는 마력풍.

영역 개방의 전조였다.

“토미!”

날카롭게 일어선 사기(死氣)가 노리는 건 가장 가까이에서 수인을 맺고 있는 청년 마법사.

5위계에 오른 사령술사가 죽을 각오를 다진 채 개방하는 영역이다. 시간선을 다루는 발렌티노의 술식으로도, 피해 없이 받아내기는 힘들 터.

푸드드드―

발밑에서 깃털을 일으킨 시에나가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

하나의 선이 시야를 양단했다.

***

높은 창공에서 쏘아져 땅에 내리꽂힌 한 가닥의 직선.

물리적인 실체가 아닌 개념 그 자체의 열기가, 막 펼쳐지기 시작한 뱀파이어 남작의 영역을 그대로 지워낸다.

마력을 소멸시키고, 심상을 증발시킨다.

산봉우리도 거뜬히 녹여버릴 수 있을 열기가 지나가고 남은 것은, 깊은 구덩이 한가운데 선 두 인영이었다.

“끄으······.”

정확히는 땅을 딛고 선 검붉은 단발의 여자 하나와, 그녀에게 목이 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뱀파이어 남작.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의 남작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 어째서···용들은 지옥의 편에 서기로 합의한 게 아니었······.”

[아직 어린 혈귀인가 보구나. 아이야, 모두가 용신의 힘에 굴복한 건 아니니라.]

남작의 표정이 뒤틀렸다. 검붉은 머리의 여인은 살포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릇 지성체라면 압도적인 폭력을 면전에 두었더라도, 올곧은 이성으로 상고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우드득!

남작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핏대가 잔뜩 오른 목이 힘없이 툭 꺾였다.

5위계 초월자의 목을 한 손으로 가볍게 비튼 여인은, 죽은 벌레를 던지듯 남작의 시체를 휙 던지고 몸을 돌렸다.

“······.”

전장 한복판에 내려앉은 기묘한 정적.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시에나와 일행은 물론, 뱀파이어와 그 군세마저도 슬그머니 거리를 벌린다.

처음 보는 존재의 등장도 등장이거니와, 그 존재의 무력이 이곳의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자명한 사실이.

무려 5위계의 초월자를 나뭇가지 꺾듯이 꺾어버린 무위가, 본능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흐음.]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전장을 훑는다.

검고 붉은 빛깔로 번뜩이는 동공 저편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아군인가. 적군인가.

남작을 죽인 걸로 봤을 때 뱀파이어와 언데드 군세의 편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같은 편이라는 보장 역시 없었다.

펄럭!

아슬아슬한 정적을 깬 건 막 하늘을 한 바퀴 돌고 땅으로 내려앉은 아카샤였다.

용의 모습을 한 아카샤는 전황을 파악하다가 검붉은 머리 여인을 발견하곤,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버지?]

“······?”

“뭐?”

[아, 아닌데. 하지만 분명 아버지한테서 느껴지던 기운이···.]

이리저리 굴러가던 용의 눈동자가 딱 멈춘다. 마치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아낸 소년처럼 그가 말했다.

[세 번째 어머니!]

“······!”

표정을 싹 굳히는 시에나와, 가슴팍을 움켜쥔 채 주춤거리며 식은땀을 한 줄기 흘리는 비요른.

[청린의 아이구나.]

그 시선의 중심에서 검붉은 머리칼의 여인, 적창이 웃었다.

세로로 찢어진 용의 눈동자가 온화함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입에 머금은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란다. 운명에 굴복하지 않은 진정한 초인이자, 인과를 초월해 세계선을 아우르는 영웅이지.]

[어···예에.]

[너 역시 대단한 아들이 될 것이야. 그의 안목은 틀린 법이 없으니까.]

“거기 당신. 당신이 댈런의 내면에 있는 고대의 용인가 뭔가 하는 거지?”

시에나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적창이 고개를 돌렸다.

“버번에게 들었어. 당신의 힘을 제어하려다 댈런이 죽을 뻔했다고. 청린의 심장을 이식한 것도 당신 때문이라지?”

[네가 깃털의 마녀로구나. 네 이야기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느니라. 당시에는 댈런과 나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았고, 용심장과 용골은 결국 그의 승리에 일조했으니까 말이다.]

용이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표정 같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구했으니, 지나간 과오 정도는 가벼이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

“···그건 알겠으니까. 어쨌든 잡담하러 온 건 아니잖아? 당신이 댈런의 편이라면 그걸 증명해보라고.”

시에나가 팔짱을 낀 채 고갯짓했다. 뱀파이어와 언데드 군세가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산자락 쪽이었다.

곁에서 비요른이 무언의 어버버거림과 함께 말려봤지만, 그녀는 가볍게 뿌리치고서 용을 응시했다.

한편 적창은 시에나의 날카로운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지. 어린 마녀야. 하지만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단다.]

“······.”

[마녀의 수명이 인간보다 월등히 길다 한들, 필멸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니. 그리고 나는 인내심이 깊은 용이니라. 너와 성기사가 충분히 그의 품을 누리도록, 수 세기쯤 기다려주는 거야 그리 힘든 일도 아니지.]

“그, 그게 무슨······.”

적창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산자락 너머를 내다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능선 너머의 하늘과 대지는 실시간으로 격변하는 중이었다.

검붉은 먹구름이 밀려나며 칙칙한 잿빛 하늘이 세력을 넓히는가 싶더니, 능선 너머로도 드러날 정도로 거대한 시체의 파도가 일어난다.

지진이 난 듯 한 차례 요동하는 산맥. 순식간에 뼈와 내장으로 뒤덮인 몇몇 산봉우리들.

[···혈령이 상식 밖의 선택을 했어. 테모므론의 대지옥이 일부 강림했구나.]

적창이 나직히 읊조렸다. 그즈음 뱀파이어들 역시 이변을 눈치챘다.

자신들의 안에 깃든 흑마력이 미친 듯이 날뛰며, 그 크기를 부풀려 나가는 걸 인지한 것.

“테모므론― 바리안!”

“테모므론, 아둘라탁!”

곧바로 수인을 맺으며 외치는 주문들.

평소와 달리 지옥문은 열리지 않았으나, 그 대신 땅이 꿈틀거리더니 망령 기사들과 부패한 시체 골렘을 뱉어낸다.

“으하하하! 망자의 땅이 강림했다!”

“이것이 우리가 목숨 바쳐 갈구한 힘···!”

“혈령께서 대지옥의 그림자를 이 땅에 드리우셨노라!”

미친 듯이 웃으며 환호하는 뱀파이어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규모의 술식을 반복해서 영창하고, 터진 샘처럼 솟아나는 군세에게 진격을 명령한다.

지금까지의 전투로 능선은 이미 시체투성이였지만, 순식간에 쓰러진 시체보다 살아서 움직이는 시체가 더 많아졌다.

두두두두두···!

산비탈을 달려 내려오는 수천의 언데드 군세.

산 자의 생기를 탐하는 망자들의 파도 앞에서, 적창은 여상한 태도로 손을 뻗었다.

피싯―

허공에 떠오른 콩알만 한 불씨를 그녀의 손이 움켜쥔 순간.

콰과과과과과──!!

수십 다발의 검붉은 화염 기둥이 일제히 치솟으며, 언데드 군세의 선두를 집어삼킨다.

여유롭게 걸음을 내디디며 휘두르는 손짓 한 번에 계곡에서 부글거리는 용암이 흘러넘치고.

검은 불꽃의 구체들이 산비탈을 종횡무진 휩쓸며 언데드 군세를 갈아 마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바다! 내 한 수 배워가오, 댈런의 세 번째 부인!”

“이 미친 영감아! 총구나 똑바로 겨누지 못해!”

[―――!!]

비요른과 시에나, 아카샤와 토미가 합류하며 전세는 완벽하게 기울어졌다.

조금 전까지 다섯 사람을 쓸어버릴 듯 내달리던 수천의 군세는, 이제 주인인 뱀파이어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대기에도 급급할 뿐.

가볍게 손을 휘둘러 거대한 망령 거인의 핵을 날려버린 적창이, 문득 반대편 산봉우리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키이이이───!

하늘로 치솟는 황금빛 기둥.

펠버 발렌티노와 뱀파이어 백작이 싸우는 방향이었다.

[마법사 쪽의 싸움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구나.]

적창이 말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일어난 불씨가 죽 늘어나더니 단창의 형상으로 빚어졌다.

찌직!

검붉은 피막 날개가 검은 무복을 찢고 모습을 드러낸다.

가볍게 발을 구른 그녀의 신형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고개를 살짝 들자 저 멀리서 속절없이 밀려나던 검붉은 먹구름이, 쩍 갈라지며 오색의 뇌광을 드리운 게 내다보였다.

[대마법사가 남긴 뇌해가 대지옥에 맞서는구나. 댈런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빠르게 마무리하고 마법사를 돕자꾸나.]

역시 믿을 만한 남자야. 적창이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손에 쥔 단창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얼핏 보기에 가벼운 일격이 일대의 공간을 통째로 일그러뜨리며, 두 빛깔의 겁화가 해일처럼 쏟아진 순간.

━━━━━┳┻┳┻┳┻

저 멀리 갈라진 먹구름 사이에서, 그에 화답하듯 붉은 번개가 파도처럼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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