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40화 (240/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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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2)

쿠르르르······!

겁화의 열기에 능선 너머의 하늘이 아지랑이처럼 이지러진다.

쏟아지는 검붉은 화염의 파도를 확인한 댈런은, 낮게 웃으며 성검을 고쳐 쥐었다.

‘잘해주고 있군.’

이번 작전의 골자는 댈런과 혈령의 일 대 일 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때문에 펠버를 비롯한 일행에게 나머지 군세를 맡기긴 했지만, 그 역시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혈령은 북부 삼왕국을 치기 위해 뱀파이어 백작의 영토 전역에서 군대를 결집하는 중이었고.

혈령의 기함인 유령선에 배치된 병력은, 그렇게 모인 군세 중에도 가장 강력한 핵심 전력들.

순혈 뱀파이어 수십에 5위계의 사령술사가 여럿. 거기다 백작은 이미 수백 년 전 6위계에 오른 괴물이었다.

병력의 규모 자체도 어지간한 군대와 회전을 벌일 수 있을 정도는 충분히 되는 바.

고작 네 명이서 상대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기에, 댈런은 영역을 완전개방한 뒤 즉시 적창을 일행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검붉은 겁화가 파도처럼 쏟아지는 걸 보아하니, 그녀는 최선을 다해 일행을 지원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는 이야기지.’

스쳐 지나가는 상념을 흘려보내고.

쿠구구구···!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거대한 시체 거인의 손에, 성검을 찔러넣는다.

쿠직!

단단한 피부와 근육을 뚫고 박힌 검신. 마치 절벽에 검을 박아넣은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대지 자체가 일어나 덮쳐드는 것만 착시.

아니, 착시가 아니다.

혈령이 망자의 땅에서 일으킨 이 시체 골렘은, 사실상 산봉우리 하나를 거인으로 일으킨 수준의 크기와 질량.

손가락 하나하나가 직경 수십 미터에 길이는 수백 미터였고, 손바닥의 넓이는 축구장보다도 거대하다.

물리법칙을 무시한 듯한 규모의 소환물은, 그 질량과 속도만으로도 자연재해나 다름없었다.

드드드드드드드···!

손을 뻗는 단순한 동작에 실린 말도 안 되는 힘.

아무리 댈런의 근력이라도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허공에 딛고 선 마력의 발판이 속절없이 부서지고, 그대로 손바닥의 방향을 따라 댈런의 신형이 죽 미끄러진다.

[이것이 대지옥의 힘이니라! 한낱 인간은 법칙에 맞설 수 없는 법이니!]

기세를 역전했다고 생각한 걸까. 귓가에 혈령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댈런은 피식 웃었다.

“지랄.”

후우.

밀려나도 당황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발에서 힘을 빼고 깊게 들이쉬는 호흡.

용심장에서 출발한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온몸으로 마력을 운반한다.

후우.

근육과 오장육부를 덥히는 겁화의 열기와 압력은, 새로 이식한 용골이 너끈하게 버텨내 주었다.

‘토르타니스.’

성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파짓──┴─┬─┬

푸른 검신이 주인의 의지에 응답해 오색 뇌광을 머금고.

「회명(回冥)」

잿빛 음영이 허공에서 일렁인 뒤, 댈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구우우···?

댈런을 밀어붙여 다른 산봉우리의 절벽에 처박아버릴 생각이었던 시체 거인은,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의 변화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녹색 뇌광이 눈앞에 짓쳐드는 중이었다.

「천록(穿綠)」

츠가가가가각──!

녹색 낙뢰가 거인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간다.

산봉우리를 쪼개 골짜기로 만들던 댈타리온의 비기 중 하나.

팔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거인이 잘린 어깨를 부여잡고 물러서지만, 댈런은 상처를 회복할 여유를 줄 생각이 없었다.

쯔팟!

스파크와 함께 댈런의 신형이 공간을 넘어선다.

공간의 틈을 빗겨 넘나드는 회명과 달리, 아예 그 틈을 찢어버리고 나오는 기예.

은밀함은 떨어지지만 신속함은 월등하다. 거인의 머리 앞에 나타난 댈런의 손에서 샛노란 뇌전이 길게 늘어졌다.

「뇌창(雷槍)」

열세 대룡 중에도 한 손에 꼽는 강자, 적창의 응축된 숨결에 맞먹는 위력을 가진 뇌창.

왼손을 가볍게 털어내자, 번개의 창이 벼락의 속도로 거인의 머리에 내리꽂힌다.

쩌━━━━━

뇌기와 흑마력이 충돌하며 거대한 빛의 구가 피어난다.

거인의 머리를 단숨에 집어삼키고, 상반신을 통째로 녹여버리는 열기와 저주의 향연.

그 광원의 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댈런은, 문득 걸음을 내디디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크아아악!”

손끝에서 오색 빛깔이 번쩍인 순간, 피안개의 형태로 도망치던 혈령이 뇌전에 맞고 튕겨 나갔다.

퍼벅! 퍽!

유성처럼 떨어진 창백한 육신. 피륙을 입은 몸뚱이가 능선을 따라 물수제비처럼 연이어 튕기며 구른다.

몇 번이나 바위에 머리를 들이박은 끝에, 간신히 중심을 잡고 밀려나는 혈령.

놈은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찢기고 멍들지 않은 구석을 찾기 힘들 정도.

쯔팟!

단 한 걸음으로 그 앞에 내려앉는다. 혈령은 비틀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두드드드득!

땅이 입을 쩍 벌리고 망자들을 쏟아낸다. 해골 병사부터 망령 기사, 살점과 내장이 뒤얽힌 부정형의 집채만 한 괴물까지.

주문의 원천인 대지옥이 그 지배자를 만난 이상, 수인이며 영창 따위의 허례허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을 되찾은 건 망자의 땅만이 아니었다.

전격술사의 손을 떠난 뇌전의 바다 역시, 오랜 시간을 기다린에 마침내 새로운 주인의 자격을 인정했으니까.

「취우진청(驟雨振靑)」

콰지지지지직!

푸른 번개가 망자들을 휩쓴다.

식물의 뿌리처럼 뻗어나가는 굵고 얇은 수백 갈래의 전광.

쇠스랑으로 땅을 거칠게 갈아엎듯이, 망자들 사이로 파고든 전격이 시체와 영체를 가리지 않고 갈아버린다.

“크으으으!”

혈령이 이마에 핏대를 세워가며 백골의 성을 일으켰지만.

츠가각──!

날카로운 칼이 두툼한 빵을 자르듯, 녹색 낙뢰가 새하얀 성을 양단한다.

“일어나라!”

주인의 명령에 꿈틀거리며 일어난 수 킬로미터 길이의 거대한 시체뱀은.

“뒈져.”

샛노란 뇌창과 성검을 모아 한 번 휘두른 것만으로 목이 잘려 퍼덕대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혈령이 끝없이 지옥의 권속들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흩뿌려진 오색 뇌광이 번쩍이는 순간 남는 건 타버린 망자들의 잔해뿐.

당연한 결과였다.

고작 화신체만으로 대지옥의 일부를 직접 강림시킨 건 대단한 일이었으나.

결국 그건 대지옥 전체가 아닌 일부분의 제한된 권능만을 가지고 왔다는 의미.

「술식갑주 : 사중첩」

팟!

네 가지 주문을 갑옷처럼 몸에 두른 댈런이,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혈령 앞에 나타났다.

발밑에서 고기 타는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다. 발끝까지 감싼 술식갑주가 망자들의 시체를 지지는 냄새였다.

“이깟···!”

혈령이 손을 휘둘렀다. 마력 대신에 피가 왈칵 뿜어졌다.

마력이 약동하기도 전에, 댈런이 손에 쥔 성검을 짧게 당겨 그었기 때문.

손목째로 잘려버린 혈령의 손이, 반쯤 탄 시체의 대지에 툭 하고 떨어졌다.

“아······.”

“갑자기 궁금하군.”

댈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손 하나가 더 잘렸다.

소리 없는 절단. 툭 떨어진 살덩이.

혈령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잘린 손의 절단면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시선.

“무력해진 신은 어떤 기분이지?”

“······.”

“사백 년 동안 네가 고혈을 빨아먹은 사람들처럼, 피륙을 입고 손발이 잘린 채 무릎 꿇은 기분은 어떠냔 말이다.”

“······네놈들이라고 다를 거 같으냐.”

혈령이 중얼거렸다. 놈은 멍했던 눈을 부릅뜨고 댈런을 올려다봤다.

“네놈들 역시 가축을 잡아먹지 않느냐! 초장을 뛰어놀아야 할 마소를 좁은 우리에 가두고, 닭이 나는 법을 잊어버릴 때까지 지붕 아래에 넣어두었다!”

뿌득.

피투성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 가는 소음. 피를 왈칵 쏟아내면서도 항변하듯 휘저어대는 잘린 손목.

“나는 대가 없이 받아 가지 않았다. 내가 친히 먹이고 입혀주었다! 안전하게 살 땅, 머리 누일 집과 잠자리를 제공해주었느니라! 그 대가로···.”

“지랄. 자유의지를 빼앗아놓고 무슨 대가?”

스각!

전격 머금은 검끝이 허벅지의 뼈와 힘줄을 가른다.

항변하는 척 몸을 일으키던 혈령이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사람이 짐승 같이 굴어도, 사람은 사람이야 새꺄.”

인간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어쩌면 그 역시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팍팍한 사회의 이해타산적인 인간관계에 지쳤을 무렵. 인생은 결국 홀로 살아남는 거라고 거듭 되뇌던 시절에는.

하지만 아니었다.

사람은 짐승과 달랐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거스를 줄 알았고.

때로는 가족도, 친구도 아닌 이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난생처음 본 댈런의 앞을 가로막은 채, 청린의 꼬리치기를 받아내고 전사한 차석 심문관이 그랬고.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다 알지 못할 수백만 백성을 위해 목숨을 버린 차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웅······.

그리고 어쩌면 이 성검의 근원이 되었을, 인간을 위해 강림해 목숨을 내던졌다는 전쟁신도 그러지 않았을까.

되새겨보면 지구에도 그런 사람은 많았다. 인간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너희 악신들이야말로 짐승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

마지막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성검이 혈령의 목을 잘라버렸기 때문이었다.

“남은 말은 지옥에서 듣지.”

잘린 두 손 곁에 머리통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직 피가 다 빠져나가지 않아 끔뻑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댈런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땐 네 지옥 일부가 아닌 전체를 다 무너뜨려 줄 테니까.”

파삭―

머리통이 바스라진다.

목이 잘린 몸뚱이 역시 털썩 쓰러지자마자 한 줌 재가 되어 흩날렸다.

스스로의 몸뚱이를 사령술의 대상으로 삼은 술식의 반동. 일종의 편법으로 지옥을 강림시킨 부작용이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것.

사아아아아······.

산맥을 뒤덮었던 시체의 대지가 빠르게 걷혀나가고, 칙칙한 지옥의 잿빛 하늘을 먹구름이 다시 메워간다.

흩어져가는 지옥도를 지켜보던 댈런은 성검에 묻은 혈령의 재를 휙 털어냈다.

이렇게 무너지는 지옥의 정경은, 환상세계에 있을 망자의 땅에도 상당한 타격을 입히겠지.

편법이라도 어쨌건 지옥의 그림자가 아닌 대지옥 그 자체를 강림시킨 혈령. 여기서 부서진 공능과 권속은 실제 지옥에서도 똑같이 부서졌을 것이다.

결국 자기가 자기 무덤을 판 셈인가.

영락한 채 강림한 쑴을 욕하더니, 결국 본인도 크게 다르지 않은 셈.

쿠르르릉······.

천천히 돌아오는 설산의 먹구름 아래.

혈령의 시체가 바스라진 자리에서, 댈런은 익숙한 모습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종말의 끝에서 절규한 사령술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

이걸 지금 회수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겠지.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우고 있을 펠버와 일행을 도우러 가는 게 맞았다.

뇌해를 전력으로 전개한 후폭풍이 육체와 정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지만, 다른 영역들을 적당히 섞어서 사용하면 싸움을 마무리 짓는 것 정도는 어떻게든 가능할 테였다.

판단을 마친 댈런이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

사령술사의 시체가 번쩍 눈을 떴다.

시간이 한없이 느려진 듯한 감각.

발작하는 펄떡이는 손끝. 움직이지 않아야 할 사령술사의 시체가 손을 뻗어온다.

“무슨···!”

파아아앗!

짧게 다듬은 손톱 밑에서 빛무리가 쏘아진다.

물줄기처럼 뻗어 나온 빛무리가, 어찌할 새도 없이 댈런의 옷깃을 스치고.

[종말의 끝에서 절규한 사령술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

순식간에 눈앞을 수놓은 알림창이, 이어지다 말고 버벅댄 끝에.

“이건 또 뭔 지라···!”

시야가 암전되었다.

***

설산이었다.

혈령과의 싸움으로 쑥대밭이 된 설산이 아니라, 언제나와 같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심상 너머의 설산.

자박.

텅 빈 오두막의 뒷마당. 몇 발자국 걷던 댈런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

그는 조금 전 했던 생각을 정정했다. 오두막 너머에 보이는 산의 능선들은,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 결코 아니었다.

오두막 아래쪽에서 시작되어 지평선까지 펼쳐진 첩첩산중의 산맥.

그 새하얀 산봉우리들이 전부 새까만 점들로 가득했다.

당연하게도 댈런의 시력은 그 점들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하······.”

그건 묘비였다.

온 산맥을 뒤덮은 수백만, 아니 수천만 이상의 묘비들.

드넓은 공동묘지 한복판에 떨어진 꼴이 된 댈런은, 천천히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시발, 이건 또 무슨 난장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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