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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3)
사냥꾼의 오두막.
새 게임을 시작하면 처음 눈을 뜨는 장소.
눈 덮인 설산의 중턱쯤에 있는 이곳은, 매 플레이마다 대륙 전역에 걸쳐 랜덤으로 생성되는 스타팅 포인트였다.
말 그대로 눈 덮인 산봉우리 하나만 있으면, 대륙 어디에든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특정 장소를 원한다면 이것도 현질이 필요했다. 3천 원인가 하는 스타팅 포인트 선택권이었다.
‘하여간 돈에 미친 새끼들.’
예전의 댈런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게임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지금은, 약간 애매해진 입장이었고.
게임 개발진의 정체가 무엇일지. 그들이 정말로 이 세상을 알고 있었을지.
종말을 막아내기에 급급한 지금으로선 알아내기 요원한 일이다. 설령 알아냈다 해도 딱히 쓸모가 없기도 했고.
어쨌거나 그렇게 랜덤으로 지정되는 스타팅 포인트였지만, 그래도 공통점은 몇 가지 있었다.
오두막의 형태와 크기, 실내외에 배치된 도구와 물자들.
그리고 산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외길이 대표적.
바스락.
발목을 스치는 수풀을 걷어내며, 댈런은 좁은 외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사실 제대로 된 길조차도 아니다.
같은 경로를 매일같이 오가는 사냥꾼의 발걸음에, 흙이 다져지고 풀과 가지가 꺾여 만들어진 통로에 가까웠으니까.
그 통로를 따라 설산의 침엽수림을 내려가던 댈런은, 길 곁의 한 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나무 아래에는 비석이 하나 있었다. 묘비였다.
[체페 라리예프]
[차르국 에클라힘 외성 경비병]
[~제국력 1131년]
이름과 신분.
생몰년이 아닌 사망 연도.
단출한 인적 사항만이 새겨진 검은 비석 위, 소복하게 쌓인 눈은 사실 얼음덩이나 다름없었다.
높이 역시 원래의 절반 정도까지 파묻힌 걸 봤을 때, 묘비가 세워진 건 꽤 오래전인 듯했다.
대체 무슨 의미로 세운 비석일까. 생각에 잠긴 채 눌어붙은 고드름을 툭툭 깨보던 그의 곁에 인기척이 내려앉았다.
[···댈런.]
나직한 전성.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설산의 봉우리 중 하나에 기거하는 고룡, 적창은 다소 애매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다른 세계선의 힘이 그대에게 중요한 것은 알고 있느니라. 허나 이번만큼은 때가 좋지 않았다.”
약간 찌푸린 듯한 눈살. 보기 드물게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좀 있는 듯했다.
“내가 한 게 아니오.”
[그럼···?]
“이 묘비를 세운 사령술사가 한 일이지.”
적창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네가 힘을 얻는 경위와 방법에 대해 잘은 모른다만···지금까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으냐?]
“없었소.”
[그럼 어떻게···.]
“이제부터 그걸 물어보러 가야겠지.”
댈런은 비석을 쓰다듬던 손을 들어 하늘 위로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성검이 나타나 그의 손에 안착했다.
그걸 본 적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꽃을 뽑아 창을 만들었다. 그녀는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그 사령술사라는 놈을 찾아, 이 싸움을 끝내야 한다. 나는 네 영역에 예속된 존재. 네가 이곳에 발을 들이면서 나 역시 네 동료들을 두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느니라.]
그러고 보니 적창이 나머지 일행의 싸움을 도와주고 있었지.
댈런의 의식이 현실을 떠난 순간 완전개방된 영역의 힘이 사라지면서, 적창의 소환도 함께 취소된 모양이었다.
[마법사가 6위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긴 하나, 제자의 도움만으로 언제까지 버텨줄지는 미지수다. 한 줌 남은 망자들을 처리하고 마녀와 난쟁이가 합류한다 해도 마찬가지야.]
적창이 초조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확실히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에서의 시간의 흐름이 현실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
대장장이 댈루카힘의 힘을 회수할 때 겪어본 바로는, 대략 열 배 정도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우선 사령술사를 찾아야 할 것 같구나. 대장장이 때처럼 뒷마당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니···.]
“잠시 멈춰보시오.”
곧바로 산에서 내려가려는 적창의 어깨를, 큼직한 손이 부드럽게 잡아 세웠다.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는 적창. 댈런의 시선은 건너편 산자락을 향해 있었다.
설산을 빼곡하게 뒤덮은 비석은, 기이하게도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마치 합장(合葬)한 무덤의 비석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듯이.
이 모든 묘비를 한 사람이 세웠다는 걸 생각하면, 결코 우연일 수는 없는 설계.
댈런은 수만 개의 묘비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산맥 너머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사령술사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거든.”
***
츠팟!
전격이 번뜩이더니 공간이 찢어진다. 푸른 전격으로 일그러진 공간 안쪽에서 댈런과 적창이 걸어나왔다.
뇌해를 스스로의 힘만으로 다룰 수 있게 된 뒤, 이 정도 재주는 영역을 개방하지 않고도 부리는 게 가능했다.
한 번의 도약으로 수십 미터 정도는 가뿐하게 뛰어넘을 수 있었고,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 열 배까지도 너끈히 가능할 정도.
휘이이······.
눈발을 제멋대로 흩뿌리는 칼바람 아래, 댈런은 성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수십 수백의 산봉우리를 뒤덮은 공동묘지의 끝이 눈앞에 있었다.
모든 묘비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낡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막 묘비 하나의 주변부 흙을 다듬고 있었다.
댈런은 기척을 숨기지 않은 채 남자에게 몇 발자국 걸어갔다. 눈밭이 발아래에서 부서지며 뽀드득 소리를 냈다.
소리를 들었는지 남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가 말했다.
“마침내 때가 이르렀는가.”
쉬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맨손으로 흙을 꾹꾹 눌러 작업을 마무리한 남자는, 천천히 일어서서 묘비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자리에서 일곱 번 허리를 깊숙하게 숙인 뒤에야, 남자는 마침내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결국 자격 없는 나에게도 영원한 안식의 시간이 찾아왔구려.”
남자의 몰골은 예상 밖이었다.
흑마법사 특유의 새까만 단색 로브는 오랜 세월 색이 빠지고 헤어져 있었다. 숭숭 뚫린 구멍으로는 칼바람이 드나들고, 그 안의 품 넓은 옷 역시 누더기에 가까운 상태였다.
퀭한 두 눈 밑에 짙게 드리운 음영. 부르트고 일그러진 두 손.
“······.”
종말의 필두에서 한 시대를 호령한 흑마법사이자, 대륙 전체를 불바다로 만든 사령술사라기에는 지나치게 허름한 모습.
지옥문 하나 열 줄 모르는 뒷골목 흑마법사도 저것보다는 나을 몰골이었다.
차라리 흑마법사가 아니라 오랜 세월 산에서 수행한 수도승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과연 댈런 혼자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지, 가만히 침묵하던 적창이 입을 열었다.
[저 자가 맞느냐?]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에 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일단 얼굴은 그가 수백 시간을 들여 키운 흑마법사가 맞았다.
왜소한 몸에서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흑마력 역시 분명한 사령술의 흔적.
“맞소. 테모므론의 사령술사이자 신을 죽인 흑마법사, 댈룸 자이브요.”
“과연···진정한 전지의 편린에 닿은 이로다.”
사령술사가 나직하게 탄성을 뱉었다.
“역천의 우물 속에 잠든 수많은 가능성을 받아들인 자. 좁은 시야로나마 세계들의 멸망을 목도해온 관조자.”
주문쟁이답게 길게 늘어놓는 말.
사령술사는 잘게 떨리는 손끝을 들어 올려, 수염 덥수룩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방금까지 땅을 다듬던 손은 흙투성이였지만, 얼굴 역시 그에 버금갈 정도로 더러웠기에 별 차이는 없었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는 유일한 생자일 것이오, 그대는.”
사령술사가 손을 내렸다. 댈런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어떤 번뜩임도 없었다.
깊게 가라앉은 심해 같은 동공에는, 칙칙한 어둠만이 내려앉아 있을 뿐.
그렇게 한동안 댈런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령술사가 물었다.
“기억하던 모습과 달라 놀라셨소?”
“약간은.”
댈런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억 속에는 모니터 너머, 대륙을 불태우던 흑마법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해골을 주렁주렁 매달고 하늘을 달리는 유령선 위에서, 손짓 몇 번으로 도시를 무너뜨리던 종말의 기수.
지옥의 힘을 제 것처럼 다루며, 홑몸으로 백만이 훌쩍 넘는 망자들을 부리는 사령술사.
댈타리온이 순수술식의 끝을 본 캐릭터였다면, 댈룬 자이브는 흑마법을 성장의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캐릭터였다.
그리고 두 캐릭터의 경우에 한해서라면, 흑마법은 순수술식보다 효율이 압도적으로 좋았다.
‘···아마 7위계에 닿았겠지.’
모니터 너머에서는 영역의 힘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댈런은 댈룬 자이브가 반신의 경지를 뛰어넘었으리라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게 악신을 쓰러뜨린 캐릭터는 전 회차에 걸쳐 단 둘뿐이었다.
개중 하나가 영락하고 쇠퇴한 쑴의 진체를 쓰러뜨린 전격술사 댈타리온이었고, 남은 한 명이 바로 눈앞의 흑마법사.
6위계의 끝자락에 오른 댈타리온도 불완전한 쑴의 진체를 쓰러뜨리고서 큰 부상을 입었었다.
수하 대악마의 추적을 피하지 못하고 살해당했기에, 댈런이 쑴을 상대하기 위해 그 시체를 회수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반면 댈룬 자이브는 전성기의 악신 라필렘과 대등하게 겨뤄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놈의 대지옥을 당당하게 주인인 테모므론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물론 마지막 회차의 존재 때문에, 가장 강한 회차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런 몰골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하기야 그렇겠지. 아무리 그대라도 역천의 우물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을 터이니. 내 생전의···그 저주받을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게 당연하오.”
“그런 것도 있고.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나를 심상에 끌어들인 것도 처음이라.”
당연히 무투가 댈버나 전격술사 댈타리온처럼, 예언이니 뭐니 마음에 안 들어서 한 판 붙어보려는 줄 알았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산맥을 한가득 뒤덮은 묘비였으니, 이렇게 이성적으로 대화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고.
댈런의 이야기를 들은 사령술사는 곧바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가 말했다.
“그 부분은 정식으로 사과드리오. 그대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이곳에 초대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곧잘 사과하는 성정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랬었지. 생전에는. 그대에게 부덕한 일생을 보인 것도 함께 사과드리오. 받아주시오.”
허리를 숙인 채 대답하는 사령술사. 댈런은 괜스레 코를 긁적였다. 이러니까 어째선지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던 적창도, 이쯤 되니 이거 정말 흑마법사 맞냐는 눈빛을 보낼 정도.
이대로 뒀다가는 영원히 허리를 숙이고 있을 것 같아, 댈런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방금 세운 묘비를 향해 턱짓했다.
“받을 테니 좀 일어나 보시오. 이 묘비들은 다 뭔지 말해줘야 할 거 아니오?”
“···그건 내 속죄요.”
사령술사가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퀭하던 눈은, 더 우묵하게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상처투성이 손을 들어 얼굴을 덮은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역천의 안배 속에서 내게 허락된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너무나도 부족한···참회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