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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5)
찌지직!
로브가 찢어진다.
피잉―!
직후 섬찟한 파공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펠버는 찢겨나간 로브의 어깨 부분을 내려다봤다. 그가 입고 있는 건 단순한 로브가 아니었다.
엘가이아 마탑의 탑주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어지간한 고대 유물만큼이나 값어치가 높은 방어용 아티팩트.
주문에서 새어 나오는 잔류 마력을 보호막으로 치환해 쌓아 올리는, 사용자에 따라서는 성벽 이상의 방어력도 제공할 수 있는 마도구였다.
“망설이는구나, 마법사.”
뱀파이어 백작이 말했다. 놈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죽음이 두려우냐?”
“천만에.”
흡혈귀 따위와 말을 오래 섞을 이유는 없다. 용골 지팡이에서 시작된 울림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엘르― 툴리아 아쿨로르!”
쿠구구구구···!
일대를 둘러싼 황금빛 장막이 마력을 증폭시키고.
이내 지면이 입을 쩍 벌리더니 거대한 골렘들을 뱉어냈다.
거대한 코뿔소가 콧김을 뿜으며 올라온다. 근육질의 전사가 칼과 방패를 양손에 쥐고서 걸음을 내디뎠다.
사자 머리가 둘 달린 뱀이 위협적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창을 든 천사의 형상이 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광경.
두두두두두······!!
내달리는 건물 크기의 거체들에 땅이 뒤흔들린다. 작은 마을 정도는 단숨에 짓뭉개 버릴 질량의 쇄도였다.
그 저돌적인 돌진의 끝에서, 뱀파이어 백작은 여유롭게 손을 들어 올렸다.
놈이 입을 달싹였다.
“테모므론. 오브.”
투콰아앙─!
충격파가 코뿔소 골렘을 휩쓸었다.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 버리는 골렘의 형체.
쐐애애애!
뼈를 깎아 만든 작살이 비처럼 쏟아지며 칼과 방패를 든 전사를 저지했고.
백작의 등 뒤에서 나타난 거대한 해골 팔이, 독수리처럼 급강하하는 천사를 낚아채듯 붙잡았다.
“호오.”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뱀파이어 백작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지저룡의 마법이군. 그 오만한 도마뱀이 죽었다는 소식은 꽤나 흥미로웠다.”
우드드드득!
해골 팔 두 개가 천사 형태의 골렘을 움켜쥐고 찢어버린다.
“그 사체를 계승한 건가···용골을 다룰 줄 아는 대장장이가 이 시대에 존재한다니, 그 또한 놀랄 일이야.”
두 동강 난 골렘의 사체를 여유롭게 관찰하면서도, 가벼운 손짓만으로 수십 가지 술식을 빚어낸다.
땅에서 솟아나 골렘들의 발목을 붙잡는 망령들의 손길. 팔다리를 묶는 썩은 창자의 다발.
사자 머리 골렘의 눈구멍에서 거미떼가 기어 나오고, 골렘들의 등에 붙은 팔뚝만 한 거머리가 피 대신 마력을 빨아들인다.
두두두두두두!
골렘의 군대 사이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바위창 세례를 막아내는 한편, 쑥 하고 꺼진 땅 위에 백골로 발판을 만들어 여유롭게 걸음을 옮긴다.
공세와 수세가 명백하게 갈린 싸움. 허나 주도권은 오히려 막아내는 쪽에 있다.
한결같이 여유가 묻어나는 백작의 표정과는 달리, 펠버의 얼굴에 땀방울이 비 오듯 흐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어째서 홀로 싸우려 하느냐. 나에게 대적하다 이대로 죽는다면, 밖에 있는 동료들이 슬퍼하지 않겠나?”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백작이 말했다. 전성이 아님에도 심중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펠버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그가 대꾸했다.
“동료들과 같이 죽으란 말인가? 그렇게는 안 되지.”
간교한 수작질이었다.
동료를 미끼 삼아 결계의 힘을 벗어나려는 수작질.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시계이격(時界離隔)」
일대를 둘러싼 황금빛 장막은, 놈이 소환한 원혼의 구체에서부터 놈을 격리하고 있었다.
시간선을 직접 다루는 그의 영역을 전력으로 비틀어 만들어낸 대결계.
결계 내부의 시간대를 미묘하게 왜곡해, 안과 밖을 개념적으로 분리하는 경계선이었다.
‘결계를 해제하면 놈은 원혼의 구체를 다시금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 끝이야.’
수백 년 묵은 혈귀가 품은 심상의 중추는 수많은 원혼의 집합체였다.
수천, 수만의 원혼을 한데 뭉쳐 만들어낸 거대한 회백의 구체.
수백 년간 제국에 맞선 6위계 뱀파이어의 손에서, 그 원혼 덩어리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로 변모할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건 백작이 영역을 완전개방한 순간, 펠버가 죽음을 각오하고 백작과 자신을 결계 안으로 몰아넣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승산이 0에 수렴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 방법이라면 적어도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가능할 테니까.
‘적창. 그 고룡이 있었다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시에나와 나머지 일행을 도와 흡혈귀들을 정리한 적창은, 백작과의 싸움에 돌입하기 직전 돌연 모습을 감췄다.
머지않아 설산의 정경이 사라진 걸 생각했을 때, 댈런의 영역이 갈무리되며 그녀 역시 돌아간 것이겠지.
6위계 중에서도 상위격인 고룡이 있었다면 싸움의 승기는 분명 이쪽으로 기울었을 터. 하지만 이제는 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쉽구나.”
상념의 건너편에서, 뱀파이어 백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통 없이 끝내줄 생각이었건만. 그리할 수 없게 되었어.”
놈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대충 휘적대던 손짓을 벗어나, 명확한 의미와 형태를 그려내는 수인들.
수인이 거듭될수록 허공에 불길한 핏빛 문자가 새겨지고, 이내 백작의 등 뒤쪽으로 공간이 갈라지며 거대한 균열이 형성된다.
드드드드드···!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유령함선이었다.
설산의 산봉우리에 찢긴 뒤 자취를 감췄던 유령선이, 온전한 형태로 다시금 광야 위를 항해하기 시작한 것.
[전 포문 개방. 결계와 마법사를 으스러뜨려라.]
결계 안. 백작의 전성이 울려 퍼졌다.
***
쐐애애애애!
갑판 위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진다.
콰과광! 콰광!
선체 양측의 포문은 사기(死氣)의 구체를 일제히 발사했다.
끊임없는 화력 투사로 결계를 두드리는 동시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돛대가 유령선의 속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린다.
쿠우우─우웅!
머지않아 결계를 직접 들이받기 시작한 커다란 해골 모양의 충각.
그 아래에서, 펠버는 한계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사악!
스쳐 지나가는 뼈화살.
넝마에 가까워진 로브가 찢어지고, 앞으로 뻗은 팔뚝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린다.
슬쩍 보니 벌써부터 피부가 푸르딩딩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용의 권속으로서 얻은 불멸성이 저항하고는 있지만, 6위계 사령술사의 손에서 응축된 시독은 그마저도 오염시키는 맹독이었기 때문.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진심이었다. 그건 결계로 백작과 자신을 격리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으니까.
애당초 이미 한 번 죽은 몸 아니던가.
오래전 그는 청린의 시간선을 되돌렸고, 그 대가로 돌이킬 수 없는 육신의 붕괴를 겪었었다.
‘하지만 두 번째 기회를 얻었지.’
죽어가던 그를 살려준 건 댈런이었다.
역천의 우물이 예언한 존재.
수백 번의 시도에도 포기하지 않은 회귀자.
댈런이 지나쳐온 삶의 흔적을 목도했기에, 펠버는 권속됨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치열한 전장을 몇 번이고 넘어왔지만, 단 한 순간도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
설령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한들, 한 점의 후회도 없다.
그로서 수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거듭해온 그의 사명을 이뤄내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수백 번의 인생을 반복한 끝에 종말을 막아내는 마지막 회차에서, 자신의 희생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노···장···!]
죽음을 각오해서일까.
어딘가 뚝뚝 끊기는 전성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펠버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뭉그러지던 전성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시오. 노인장?]
‘댈런?’
[빌어먹을. 이제야 제대로 연결되는군.]
‘댈런, 자네 맞나?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그래. 나요. 노인장. 괜찮으니 당장 영역을 해제하시오.]
낮고 굵은 음색. 얼핏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어조.
‘자네 맞구만.’
유령선이 충각으로 들이받는 통에, 결계의 일부분이 약화된 순간을 틈탄 접선이었을까.
그 찰나의 순간에 우연이 겹쳤다고 보긴 어려웠다.
반대로 시간선을 어그러뜨린 결계 너머로, 닿을 때까지 전성을 쏘아 보냈다는 쪽이 맞겠지.
무감정한 말투나 험악한 인상과는 무관하게, 댈런은 곁에 있는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위인이었다.
처음 미궁도시의 마탑 연합 지부에서 다짜고짜 도끼로 손을 가져가려던 용병에게, 이렇듯 몇 번이나 목숨을 빚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운명은 얄궂은 법이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펠버는 무심코 나오는 웃음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댈런의 전성에 의아함이 서렸다.
[노인장 드디어 노망이라도 나셨소? 갑자기 왜 처웃고 지랄···.]
‘아닐세. 영역을 해제하겠네.’
펠버는 떨리는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황금빛 장막이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피를 너무 흘려서일까, 아니면 시독이 머리까지 침투한 것일까.
먹먹해져가는 귓가로 뱀파이어 백작의 광소가 들리는 것 같았다.
“크흐흐! 진작에 그럴 것이지!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구나, 마법사! 너는 가장 마지막에 죽여주겠다!”
빠르게 어둠 속으로 잠겨가는 시야에도, 펠버는 한 번 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지랄하고···자빠졌네.’
[···뭐요?]
***
‘잘못 들었겠지?’
댈런은 저도 모르게 귀를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펠버의 한마디가 괜히 찝찝하게 맴돌았다.
댈런은 고개를 털었다.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인 듯 보였으니, 말이 헛나왔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어쨌든 진심은 아닐 것이다. 그거면 됐다.
[···우와.]
그의 곁에서는 청린용 아카샤가 멍한 표정으로 감탄을 연발하는 중이었다.
메마른 광야는 인간과 짐승의 뼈로 뒤덮여 있었다.
모두 조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뼈들이었다. 수십 번을 죽이고 부숴도 다시 일어나, 끊임없이 이빨과 칼날을 들이밀던 망자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뼛조각들일 뿐이었다. 이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 건 짧은 한마디였다.
[돌아가라.]
몇 분 전, 댈런의 입에서 퍼져나온 전성.
그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근방 일대를 한가득 뒤덮고 있던 언데드 군세는, 다 삭아가는 뼛조각이 되어 와르르 무너졌다.
‘확실히 예상했던 것 이상이긴 하다.’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감탄한 건 댈런도 마찬가지였다.
사령술사 댈룸 자이브가 남긴 힘은 그가 상상하던 걸 뛰어넘는 권능이었다.
어쩌면 마음의 준비를 좀 더 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체들을 계승하며 수많은 스킬과 영역의 힘을 회수한 그였지만, 그럼에도 이번에 얻은 보상은 이 대륙에 떨어진 뒤 처음 얻어보는 종류였으니까.
[종말의 끝에서 절규한 사령술사의 시체를 회수했습니다. 능력을 계승합니다.]
[계승 보상 : 감각 +9, 지능 +8, 마력 +11, 망자들의 왕(S)]
초월자들의 시체에서 으레 주어지던 수많은 고유 스킬 대신, 단 하나 주어진 스킬 ‘망자들의 왕’.
그건 ‘검붉은 용의 피’를 뛰어넘는, 첫 S등급 스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