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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의 불꽃(1)
소원의 돌.
얻은 이의 소원은 그 무엇이든 이뤄준다는 전설의 물건.
대전쟁 이전의 고대에 봉인되었다는 소원의 돌은, 이 게임의 엔딩 목표이기도 했다.
‘종말을 공략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지. 아무리 히든 피스들을 모아본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는 대지옥과 악신들을 전부 감당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혼자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인류의 힘을 모조리 집결해 악마들의 공세를 막아낸다 해도, 고작 몇 달이나 몇 년 종말이 유예될 뿐.
지옥의 뿌리가 있는 환상세계에서 의념과 심상은 곧 힘이나 다름없없고, 악신과 악마들은 대지옥에서 무한한 군세를 뽑아내 끊임없이 대륙을 공격했다.
유한한 인간이 그런 공세를 버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결국 종말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인 셈이었다.
‘악마와 마물들이 솟아나는 곳, 악신들의 심처인 다섯 대지옥을 무너뜨려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소원의 돌이 필요했다.
댈런이 미궁 저 밑바닥에 내려가야 하는 이유였다.
다행히 미궁으로 내려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전 대륙에 걸쳐서 미궁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너덧 개나 되었고, 자잘한 틈까지 포함하면 그 열 배는 됐다.
다만 그런 틈 대부분은 마물이 들락거리는 통로였기에, 안전함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봐야 했다.
“미궁은 환상세계에 반쯤 걸쳐있는 장소입니다. 물질세계와 환상세계를 잇는 통로라고 해야 할까요.”
백안의 선각자가 보낸 전령, 이누오코 토드가 말했다.
“그리고 결계탑은 미궁으로 내려가는 가장 효율적인 길이죠. 안전하게 미궁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결계탑의 보조를 받는 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폭탄에 박살났지.”
“···그렇죠.”
토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짐 검사 좀 철저하게 하지 그랬나.
[댈런, 인류가 결계탑에 자부심을 가지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실상 다른 차원에 직접적으로 힘을 투사하는 것 아니냐? 초월자 여럿이 모였다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심상 너머의 고룡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도시 규모의 결계진을 쌓아올리고, 그 자체를 도시로 기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힘을 증폭시킨다라. 기발한 발상이로다. 어느 용도 해내지 못한 생각이야.]
그렇게 감탄할 일인가. 설정상 굉장한 업적이라고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내가 대륙 위를 거닐던 당시까지만 해도, 결계탑은커녕 성기사단이나 몽왕의 궁전도 없었단다. 심지어 모래바람 왕조도 아직까지 미궁에 대해 한창 탐구하던 중이었지.]
‘그 장소들. 전부 미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는 곳들이군.’
[그래. 그런 통로들이 막혀있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벌어졌겠느냐? 악마는 대륙에 심심치않게 방문하는 손님이었지. 마물은 마소처럼 흔한 짐승이었다.]
인간은 물론 엘프와 드워프, 아인종마저 눈앞의 생존을 좇기에 바쁘던 시대.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기도 전, 까마득한 고대의 대륙은 그런 곳이었다.
[당연히 문명도 지금보다 보잘것없었지. 대전쟁이 악신들의 패배로 끝난 뒤에야 상황이 좀 나아졌지만···미궁을 억제하는 결계를 세울 정도로 발전할 줄이야.]
허나 그 모든 게 이제 다시 한번 기로에 놓였구나. 적창이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문명의 발전이니 유사 이전의 인류니 하는 건 죄다 차치하고서라도, 고대의 대전쟁에 버금가는 싸움이 눈앞에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 뚜렷한 증거 중 하나가 눈앞의 사내, 금강궁에서 보낸 전령이었으니까.
‘그림자 없이 나는 새, 이누오코 토드.’
백안의 선각자가 보낸 전령은 그 역시 5위계의 초월자였다.
금강궁의 스물여섯 전당 중 하나에 소속되있으며, 어지간해서는 결계책률이 해제되지 않는 사내.
청색과 잿빛이 섞인 독특한 색채의 머리칼에는, 반투명한 깃털들이 무질서하게 꽂혀있었다.
재미있게도 댈런과 일행이 탄 마차는, 그와 동일한 깃털을 단 수천 마리의 새떼에 의해 하늘을 나는 중이었다.
「유령새의 끝나지 않는 항행」
새떼의 날갯짓마다 희미한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일행의 마차를 태운 세때는 구름 바로 아래를 날아가고 있었지만, 그건 지상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토드는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류 아인종의 일원으로, 능력 역시 전투보다는 은밀하고 빠른 이동에 특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보통 종말의 마지막 장이 시작되기 직전, 그는 대륙 각지의 지원군을 미궁도시로 결집시키는 일을 맡곤 했다.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겠지.’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만 같다.
다섯 악신의 군대가 미궁도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이.
덩굴의 마녀가 서부 지구를 공격했을 때부터, 이미 에낙사구스와 라필렘은 느슨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혈귀와 만신전의 동맹으로 에낙사구스와 테모므론 역시 굳건한 연합을 이뤘다 봐야겠지.
그렇게만 해도 벌써 셋이었다. 용신은 무조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편이니, 다수가 움직이면 무조건 따를 테였다.
마지막 하나 남은 게 악신 쑴. 다만 놈은 워낙 싸움에만 미친 악신이기에 에낙사구스라 해도 구슬리기 쉽지 않을 터···.
‘그러고보니 뒤에서 어떻게 해보려다 포기하고 아예 쑴의 지옥을 집어삼킨 적도 있었지.’
테모므론의 수하에서 사령술사로 활동했을 때도 그랬지만, 악신의 소멸이 곧 대지옥의 소멸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동등한 격을 가진 다른 악신이라면, 주인 잃은 지옥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악신의 소멸은 수백 번이나 반복된 회차에서도 몇 번 본 적 없는 광경.
어째서인지 찜찜해지는 기분에 그 이유를 생각해보려는 찰나, 전령 토드가 말을 붙여왔다.
“그래서···정말로 균열을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
“성기사단 본단은 현재 용신의 군세에게 직접 공격받고 있습니다. 용신의 동향은 파악되지 않지만, 언제 모습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아요.”
“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소.”
가장 안전한 통로인 결계탑을 이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 다만 그 통로가 막힌 이상, 다른 선택지를 찾아야만 했다.
“확실히···몽왕의 지하궁전이나 모래바람 왕조의 유적을 통하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긴 합니다.”
“쉽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오. 이 대륙에 주어진 여유가 그만큼 길지 않다는 게 중요하지.”
타락한 그림자 엘프들의 왕, 악몽의 지배자라 불리는 몽왕의 궁전은 바다 저 건너편에 있었다.
엘프들의 고향에서 조금 떨어진 군도가 바로 그곳. 다만 엘프의 땅이나 그림자 엘프의 군도나, 어딜 가든 동쪽 대해를 건너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자체로도 너무나 먼 항해길이었고, 더군다나 그 일대는 악신 라필렘이 호시탐탐 노리는 장소.
“시에나. 엘프들의 군선이 삼왕국에 입항했다고 하지 않았소?”
“맞아. 미궁도시를 떠나기 전에는 아예 대함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네들 고향은 이미 악신의 손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다는 소리군.”
“···아마도.”
모래바람 왕조의 유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쪽의 망망대해나 서쪽의 대사막이나, 건너는 데 시간이 한참 소요된다는 건 동일했으니까.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이 균열이었다.
성기사단 본단이 틀어막은 미궁의 통로이자, 댈런과 펠버가 수 년 전 청린의 목을 떨어뜨린 장소.
물론 대륙 남동쪽 끄트머리의 뱀파이어 백작령에서, 남서쪽 본단으로 가는 것 역시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제국을 횡단하는 거리도 거리거니와, 댈런과 일행은 여전히 제국에서 현상수배 중이었으니까.
“어쨌든 계획에는 변동이 없소. 성기사단을 공격 중인 용신의 군세 역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용신 역시 결국에는 붙어야 될 적이다. 여기서 그 군세를 조금이나마 깎어놓을 수 있다면 마지막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되겠지.
더불어 본단을 완벽하게 사수하지 못하더라도, 성기사단의 전력을 어느 정도는 보존해야 했다.
‘마지막 싸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게 분명하니까.’
종말이 닥쳐오기 한참 전부터, 인류의 터전인 대륙을 지키기 위해 균열을 틀어막고 있던 이들이다.
인류를 지킨다는 일에 저들만큼 진심인 단체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일부 전력이라도 온존해 살아남았을 경우, 성기사단은 마지막 전투에서 언제나 혁혁한 공을 세우곤 했었다.
신앙을 곧 무기 삼아 휘두르는 초인들은 악마와의 전쟁에서 말 그대로 괴물 같았으니까.
그들을 이끄는 단장 역시 6위계의 초월자였으니, 용신과의 충돌을 감안하고서라도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는 게 맞았다.
“댈런 님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저는 선각자께서 명하신 대로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댈런의 설명을 들은 토드는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그가 허공에 수인을 맺자, 마차를 들고 이동하는 세때의 속도가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서두른다면 보름 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시길.”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을 하늘은 붉었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가며 뿌린 마지막 황금빛이, 그 붉음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느 성기사의 머리칼이 떠오르는 황금빛. 그리고 그 성기사가 밟아온 전장을 연상시키는 붉음이었다.
***
“···신이시여.”
나직한 기도. 루시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붉었다.
노을이나 여명의 붉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불덩이에 가까운 붉은빛이었다.
달궈진 공기는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었다. 평범한 병사라면 버티지 못할 고온의 열기였다.
신성력을 힘입은 성전사들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와 가쁜 호흡들. 병장기에 맺힌 땀과 피가 흐르다 말고 증발했다. 철검이 인두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포기하거라. 인간들. 퇴각해서 너희의 우두머리에게 고하도록. 더 이상 항거하는 건 의미없으니, 결계를 해제하고 용신의 마땅한 통치를 받아들이라고.]
용이 말했다. 비웃음 가득한 전성이었다.
그럴 만한 덩치와 힘이긴 했다. 놈의 머리는 어지간한 마차 크기였고, 몸 길이 역시 족히 오륙십 미터는 되었으니까.
반면에 루시아가 이끌고 온 분견대는 기껏해야 오백 명밖에 되지 않는 규모였다.
성기사 오십에 성전사 사백오십. 그마저도 많이 죽어서, 이제는 다 합해 삼백에 채 미치지 못하는 숫자.
루시아는 성기사들을 돌아봤다. 눈동자들에 서린 결의 속에는 희미한 두려움이 엿보였다.
결의에 뒤섞인 두려움. 루시아는 저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대륙 저 북부의 왕도 에클라힘. 그곳을 지키던 병사들의 눈이 저랬다.
다만 그때는 선두에 그녀가 있지 않았다. 그녀보다 한 발짝 더 앞선 전사가 있었다.
몸이 꺾이고 부서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전사. 마침내 악신 앞에서 그가 쓰러진 순간, 신은 그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었다.
‘신성.’
루시아는 기억했다.
차리나가 쑴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사이, 댈런의 손에서 형체를 갖추던 순백의 도끼를.
그의 몸을 휘감았던 백색 광채와, 성검의 검신을 수복했던 신성력을.
‘나도 두렵소.’
그 전사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나는 죽는 게 두렵소. 잊혀지는 게 두렵고. 세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지는 게 두렵소.’
천막 안에서 눈에 깃든 두려움을, 눈꺼풀 뒤에 감춘 채 이어갔던 이야기를.
‘실패하는 것보다 무력하게 무릎 꿇는 게 더 싫으니까.’
“그렇게 두 번이나 잃을 수는 없으니까.”
루시아는 걸음을 내디뎠다. 용의 숨결이 지나간 자리였다.
끓어오르는 대지를 판금 군화가 짓밟았다. 치익 하고 피어오르는 연기.
“신이시여. 보고 계시다면···.”
[자꾸 신을 찾는구나. 너희가 정말로 필요할 때, 너희 신이 응답이나 하더냐? 그 쥐꼬리만 한 신성력을 쥐어주고 너희를 사지로 내몬 것 외에 무얼 해줬느냐?]
“···댈런에게 주셨던 그 신성을, 저에게도 주옵소서.”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없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지도,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지도 않았다.
아무 전조도 없이, 붉은 하늘에 얇은 한 줄기 빛이 내리쬈을 뿐.
그리고.
우웅━━━
용들의 권능으로 달궈진 공기를 뚫고 드리워진 성검의 날에, 뚜렷한 백색의 신성이 덧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