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48화 (24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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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의 불꽃(2)

[···신성.]

진룡이 나직하게 그르렁거렸다. 꼬리를 살짝 말며 자세를 낮추는 거체. 이빨 사이로 붉은 기운이 일렁거린다.

용의 뒤에 도열해있던 마물들 역시 제각기 다른 울음소리와 함께 이빨을 드러냈다. 공기가 팽팽히 조여지며 반쯤 녹아내린 골짜기가 들썩였다.

“······.”

루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 몇 달간의 시간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균열에서 몰아치는 용 군단의 공세는 매서웠다.

청린과의 싸움 이후 기사단이 새로 지어올린 세 개의 요새를 포함해, 총 일곱 개의 요새가 몇 주 간격으로 꾸준히 함락될 정도로.

그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일곱 요새가 전부 무너진 상태였다. 남은 건 본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기사단은 버텨냈다. 다름아닌 본단의 신성결계 때문이었다.

‘보고에 가득한 성유물의 힘에다, 모래바람 왕조 유적의 힘까지 죄다 끌어다가 썼다는 결계.’

단장이 펼친 결계인지라 자세한 원리는 알지 못했지만, 대충 미궁도시의 결계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했었다.

어찌됐건 신성결계 덕분에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본단은 버텨냈다.

문제는 보름쯤 전에 터졌다. 균열 내부가 아닌, 장벽 산맥 바깥의 문제였다.

‘루시아 경. 장벽 산맥 너머에서 건너오던 상행은 물론, 기사단의 자체 보급마저 끊겼다. 관문 요새에서 매일 올라와야 할 보고 역시 중단되었어.’

‘문제가 생겼군요. 관문 요새의 마지막 보고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장벽 산맥 바깥에서 대규모의 마물이 몰려온다는 내용이었다.’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와 나눈 대화였다.

한 마디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들의 습격 때문에, 기사단이 외부와 고립되었다는 이야기.

물론 본단이 자리잡은 곳이 장벽 산맥 안쪽의 광활한 분지인만큼, 외부와 고립된 상태에서도 자급자족이 가능하긴 했다.

그럼에도 외부에서 들여오는 수산물과 향신료 등의 식료품이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귀관이 분견대를 이끌고 문제를 파악해주겠나.’

‘예.’

루시아는 곧장 분견대를 이끌고 장벽 산맥의 입구인 관문 요새로 향했다.

보급로에 생긴 문제를 파악해 해결하고, 분견대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정찰 후 더 큰 병력을 요청하는 게 임무의 골자.

물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추가적인 지원까지 필요할 확률은 적었다.

5위계의 성기사인 그녀가 있는 한, 요새가 마물 군세에 함락되었다한들 금방 탈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실력이라면 아룡 두세마리 정도는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쉽지 않겠어.’

하지만 진룡은 다른 문제였다.

백광으로 번뜩이는 그녀의 눈이 차분하게 적의 전력을 훑어내렸다.

가장 위협적인 건 골짜기를 가득 채우는 덩치의 진룡이었다.

문제는 놈의 뒤쪽으로 너덧 마리쯤 되는 아룡들이 입맛을 다시는 중이었고, 트롤을 포함한 마물 역시 수백 마리가 도열해 있다는 것.

아룡이라도 숨결은 위협적이고, 트롤의 주먹은 판금 갑옷을 단번에 우그러뜨리고도 남는다.

진룡을 그녀가 맡는다는 가정 하에, 남은 병력이 아룡과 마물을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진룡이 앞발을 움직였고.

쿵────!

성기사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거대한 발톱이 루시아가 있던 곳을 내리쳤다.

“심문관님!”

성기사들이 소리쳤다. 용은 히죽 웃으며 앞발을 들었다.

[······!]

짓뭉게진 성기사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건 절벽을 따라 내달리는 발소리.

[미꾸라지 같은···!]

용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세로로 찢어진 붉은 눈동자에, 골짜기의 벽면을 내달리는 가녀린 신형이 비쳤다.

절벽의 요철과 틈을 디디고 가속을 거듭하는 발걸음.

순식간에 백여 미터의 간격이 좁혀진다. 지나간 걸음마다 신성력이 서려 하얗게 잔흔을 남겼다.

[――!]

용의 주둥이에 숨결이 일렁거렸으나, 루시아의 검이 조금 더 빨랐다.

콰가가가가각!

사선으로 몸을 날리며 내리긋는 검격. 비늘과 성검이 부딪히며 불똥이 튀어오른다.

원래라면 아무리 성검이라도 진룡의 비늘은 쉽게 자를 수 없는 게 정상이었다. 다만 신성이 깃든 성검은 달랐다.

[크아아아아―!]

길쭉한 몸뚱이에 길게 남은 자상. 갈라진 비늘 사이에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콸콸 흘러내렸다.

용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올랐다. 그 동작에 좁은 골짜기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휘둘러지는 앞발. 다시 한 번 절벽을 짓밟은 루시아가 곡예처럼 앞발을 피해냈다.

몇 걸음 더 디디고 허공에서 반전한 신형이 용의 등 위에 올라탔다. 몸뚱이에 검을 박아 고정한 그녀가 뒤에 남겨진 분견대를 훑었다.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검을 따르라!”

“앞으로! 신을 위하여!”

“돌격! 돌격!”

목숨을 걸고 돌격하는 성기사들과 성전사들. 루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쿠지직!

턱끝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삼키고 검에 힘을 더한다. 비늘을 뚫고 파고든 신성의 빛이 용의 가죽 아래쪽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

비명에 가까운 용언이 귓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주문이었다.

허공에서 맺힌 불덩이들이 루시아를 노리고 쏘아졌다. 빗발치는 불화살들.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용암.

루시아는 이리저리 내달리며 그것들을 피해냈다. 급격히 부상하는 용의 등판 위에서, 그런 동작은 하나하나가 목숨을 건 곡예나 다름없었다.

쐐애애애!

허리를 젖혀 아슬아슬하게 화염창을 흘려보내고, 다리를 물어뜯으려는 불뱀의 목을 자른다.

두두두두두!

비요른의 산탄총처럼 쏟아지는 작은 불꽃들을 가까스로 피해내자, 흩뿌려진 용혈에서 빚어진 불의 정령들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정령에게 검을 휘두르는 순간 용이 몸을 반전시켰다. 물리법칙을 반쯤 무시하고 급강하와 상승을 반복하는 거체.

쿠구구구구···!!

좁은 골짜기의 절벽에 몸을 부딪혀대는 통에 루시아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녀를 등에서 털어내고 하늘로 치솟은 용이, 골짜기를 향해 주둥이를 쩍 벌렸다.

[――!]

짧고 굵은 용언.

주둥이 안쪽에서 급격하게 뒤틀리는 마력.

사방에서 주문이 빗발치며 움직임을 제약한다. 허공에 던져진 상태라 피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아래쪽에는 기사단이 있었다. 골짜기에서 아룡과 마물들에게 돌격하는 성기사와 성전사들.

피한다면 그녀 대신 숨결에 휩쓸리는 건 그들이겠지. 저항조차 못하고 녹아내릴 게 확실했다.

“이런 씹―!”

선택지는 없었다.

검을 앞으로 내세워 신성력을 더한다.

온몸의 신성 문신이 최대치로 활성화되며, 그녀의 몸을 작은 별처럼 빛나게 만들었다.

성검 레레도나텔에 담긴 비검의 힘이 그녀의 몸을 이끌었다. 한 줄기 빛살이 된 그녀가 용의 주둥이를 향해 솟구쳤다.

콰아아─────

붉은 숨결이 창공을 가르고.

━━━━━━━!

새하얀 빛살이 그 숨결을 갈랐다.

[캬하악···!]

빛살이 틀어박힌 곳은 용의 가슴팍 한가운데였다.

성검에 깃든 신성이 비늘과 거죽 아래에서 폭발하며, 용의 심장과 내장을 진탕으로 만들었다.

잠시 하늘로 붕 떠올랐다가, 왈칵 피를 토하며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는 용.

루시아 역시 놈의 가슴팍에 검을 꽂은 채,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떨어졌다.

***

추락의 끝은 금방이었다.

쾅─!

용의 거체가 장벽 산맥의 가파른 능선에 부딪힌다.

물수제비처럼 퉁 퉁 튀어오른 몸뚱이가 이내 썰매처럼 산비탈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압도적인 질량에 진흙처럼 갈려나가는 바윗덩이들. 산꼭대기에 부딪혔던 용은 수백 미터를 미끄러지고서야 간신히 멈춰섰다.

“······.”

안개처럼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루시아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신성에 심장이 터진 용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용의 몸뚱이에서 내려왔다.

치이이······.

탄내가 코를 찔렀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건 신경마저 대부분 손상되었기 떄문이겠지.

진룡의 숨결을 정면에서 뚫었으니 이 정도에서 그친 게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댈런이 준 갑옷이 아니었다면···통구이가 될 뻔했어.’

용의 비늘로 만든 갑옷이라던가. 백은강 갑옷은 물론 천옷마저도 죄다 녹아버린 와중에, 유일하게 멀쩡한 게 받쳐 입었던 용린 갑옷이었다.

“···신이시여, 치유의 바람을.”

또 한 번 구해졌다는 사실에 미소짓는 것도 잠시. 루시아는 늦기 전에 덜덜 떨리는 손을 머리에 얹고 기도했다.

신성 문신이 빛나는 것과 함께 청량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었다.

간질간질한 느낌과 함께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는다.

재생 포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기사단에서도 일부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위 치유 기도였다.

“···우욱.”

뒤늦게 돌아온 통각에 잠깐 주저앉은 그녀는, 이내 일어나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용의 몸뚱이가 멈춘 곳은 장벽 산맥의 높은 중턱이었다. 뿌옇게 일어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성기사단을 둘러싼 장벽 산맥 너머가 한 눈에 들어왔다.

“···신이시여.”

산맥 너머는 지옥도였다.

용암이 흐르는 지평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하늘.

장벽 산맥을 둘러싼 숲은 맹독이 끓는 늪지대가 되어있었다. 그 뒤로 바짝 말라 딱딱해진 사막이 이어졌다.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관문 요새 역시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진룡이 등장한 시점에서 녹아내린 것까지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요새는 단지 녹아내려 무너진 게 아니었다.

열기에 녹아내린 뒤 얼어붙고, 거대한 토사에 휩쓸린 것도 모자라 전격에 바싹 구워진 듯한 폐허.

“······.”

하나의 진룡이 벌인 짓이 아니었다. 못해도 두 자릿수 이상.

관문 요새의 보고가 끊긴 게 보름 전이었으니, 고작 보름 사이에 이 드넓은 일대를 폐허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겠지.

균열 안쪽에 묶여있어야 할 용 군단이 어떻게? 이유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용 군세가 균열의 방벽을 우회했다.’

균열은 미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골짜기 형태의 지형이었다.

하늘을 나는 마물이나 진룡이었던 청린이 그 골짜기를 기어나오지 못한 건, 그 계곡 위쪽을 덮어놓은 보이지 않는 마력의 벽 때문.

성기사단이 탄생할 때 함께 지어진 마력의 벽은, 균열의 방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성기사단의 관리 하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지난 천 년동안, 그 어떤 마물이나 악마에게도 방벽을 뚫을 방도는 없었다.

수 년 전,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에버로크 글라스덴이 방벽의 열쇠를 훔쳐 달아나기 전까지만 해도.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

심각한 상황이었다.

청린을 쓰러뜨린 뒤에도 찾아내지 못했던 방벽 열쇠가, 이제 용신의 손에 떨어졌다는 게 뭘 의미하는가.

용신의 군세가 균열 방벽을 우회했다면, 균열 입구를 막아선 본단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본단 주변을 지옥도로 만들었다는 건, 성기사단을 역으로 포위해서 죽이겠다는 이야기겠지.

‘단장님께 보고해야 해.’

보급로를 뚫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루시아는 용의 가슴팍에 꽂힌 검을 뽑아들고 절벽 끄트머리에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이끌고 온 분견대는 아직 요새 근처의 골짜기에서 마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언제 진룡의 군세가 추가로 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 다음 습격에서도 지금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루시아는 회의적이었다.

전우와 함께 죽는 건 상관없지만, 용 군세가 본단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동료를 버리고 복귀할 수는 없다.’

짧은 갈등 끝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쿠우웅―!

진룡 한 마리가 그녀의 곁에 떨어졌다.

“······.”

피투성이 진룡이었다. 목은 반쯤 잘려있고, 가슴팍에는 구멍이 뻥 뚫린 채 그을음이 한가득 묻은 비늘들.

놀라서 검을 반쯤 뽑은 뒤에야, 루시아는 이게 진룡의 시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룡의 시체? 누가 진룡을···.

“오랜만이오.”

정답은 진룡의 시체를 밟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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