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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의 불꽃(3)
“댈런···.”
루시아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들은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갑옷과 천옷은 이미 죄다 녹아버린 상태.
그녀는 고위 기사이니 백은강제 갑옷, 그것도 고위 기사급의 특제 갑주를 입었을 테였다.
그럼에도 갑주는 멀쩡한 조각 하나 남지 않았고, 그가 선물한 용린 갑옷만이 약간 그을린 채 성기사의 몸을 가려주고 있었다.
“설마 용숨결에 맞으셨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맞은 게 아니라 본인이 뛰어드셨나 보군. 그거 자살행위요.”
“······.”
꾹 닫은 입술. 그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뜻을 굽히지도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루시아는 원래 그런 성정의 소유자였지.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와 아군을 버리지 않는 성기사. 댈런이 그녀를 영입 1순위로 놓은 이유이기도 하지 않았나.
댈런은 픽 웃으며 아공간에서 품 넓은 로브를 꺼냈다. 미궁도시의 경매장에서 쓸어온 유물 장비 중 하나였다.
“이거나 걸치시오. 춥겠소.”
“예···아? 으아?”
성기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뒤늦게 본인이 얇은 비늘 갑옷 한 장 걸친, 반쯤 헐벗은 꼴이라는 걸 인지한 걸까.
살짝 고장 난 표정이 된 그녀를 뒤로하고, 댈런은 빠르게 전황을 훑었다.
절벽 저 아래쪽에서 마물과 싸우는 성전사와 성기사들. 그들의 탈환 목표로 보이는 관문 요새.
사실상 폐허가 된 관문 요새에 득시글한 마물 군대. 저 높은 창공에서 날아오며 관측했던 용 군단의 대규모 포위망까지.
‘용신이 균열 방벽을 우회했군.’
에버로크가 전대 청린에게 넘긴 열쇠. 그게 용신의 손에 들어간 것이겠지.
보급선이 끊긴 걸 인지한 기사단은 곧바로 분견대를 보냈고, 그 분견대를 이끌고 온 게 루시아였을 테다.
추측하건대 일차 목표는 정찰. 이차 목표는 관문 요새의 탈환과 보급선 확보.
정찰은 달성했다. 보급선 확보는 불가. 관문 요새는?
그때 귓가에 새 울음소리 같은 전성이 들려왔다. 금강궁이 보낸 전령, 이누오코 토드의 목소리였다.
[댈런 님. 용 군단의 포위망에서 후속대가 오고 있습니다. 진룡 셋입니다. 대룡은 아닙니다.]
“후속대?”
[예. 척후로 보낸 용이 귀환하지 않자 추가로 파견한 것 같습니다.]
척후라.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놈 말하는 건가.
그림자 없이 나는 새, 이누오코 토드의 영역이 가진 은밀함은 실로 대단했다.
하늘과 땅을 망라하고 용 군단이 펼친 포위망을, 유유히 날아서 뚫고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다만 포위망에 득시글한 진룡들 중 하나쯤은 뭔가 미심쩍은 기운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척후로 진룡 하나가 쫓아왔고, 댈런에게 가슴팍이 뚫린 채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댈런 님. 제 불찰입니다.]
“아니오. 충분히 잘해주었소. 그쪽이 없었으면 용 모가지를 몇 개나 썰어야 했을지 감도 안 오는군.”
[헤아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계속 용 군단의 동태를 살펴주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댈런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감각이 마저 상황을 훑어내렸다.
관문 요새는 복구 불가의 폐허였다. 사실상 탈환해봤자 애물단지인 셈.
괜히 요새를 탈환하겠답시고 시간을 끌다간, 오히려 용 군단의 이목을 더 끌 확률이 높았다.
일단 추격자들을 떨쳐내고 본단의 성법결계 안쪽으로 몸을 빼는 게 우선이었다. 포위망을 어떻게 뚫을지는 그 다음 순번이었다.
판단은 빨랐다. 댈런이 입을 열었다.
[작전을 전달하겠소.]
나직한 전성이 하늘을 울린다.
[관문 요새는 포기. 적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본단으로 복귀하겠소.]
토드와 일행이 있는 구름 위쪽에서부터, 분견대가 전투를 벌이는 골짜기까지 울려퍼지는 목소리.
[시에나. 비요른. 성기사단을 지원해 주시오. 시에나는 구조, 비요른은 화력 지원에 초점을 맞춰서.]
‘알았어.’
‘골짜기라, 폭탄 터뜨리기 딱 좋은 장소군!’
하늘 위에서 들려온 응답. 직후 무언가 번개같이 산봉우리를 스쳐 골짜기로 떨어졌다.
허공에 흩날리는 검은 깃털들을 보며 댈런은 말을 이었다.
[노인장과 토미는 날 지원해주시고, 아카샤는 대기. 토드는 말한대로 정찰을 부탁드리오.]
‘그리하겠네.’
‘예, 아버지.’
“그리고 루시아.”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악마 살해자에 이어 용살자 타이틀까지 챙긴 성기사는, 미약한 홍조를 띤 채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만큼은 전력 외였다. 외상을 치유 기도로 회복했다 하더라도, 용숨결에 직격당한 이상 루시아는 전투 속행이 힘든 상태일 테였으니까.
댈런은 그렇게 말하려 했다. 다만 입이 열리는 것보다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혼자 고생 많았소.”
“···보고 싶었어요. 많이.”
“나도 같은 소리였소.”
용의 피가 눌어붙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피범벅이기는 그의 손 역시 매한가지였다.
조금 끈적거리지만 딱히 나쁜 감촉은 아니었다. 머리를 부비적거리는 걸 보니 그녀도 그런 모양이었다.
“상황을 보다가 분견대를 지휘해서 먼저 돌아가시오. 성법결계 안쪽으로만 들어가면 안전할 거요. 적어도 당분간은.”
“당신은요?”
댈런은 손을 거뒀다. 그는 몇 걸음 물러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하늘 너머에서 거대한 기척 세 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토드가 말한 후속대였다.
습관처럼 갑옷을 점검한 그는 성검을 고쳐 쥐었다. 몸 컨디션은 최상. 도끼도 잘 달려있고, 미스릴 갑옷은 여전히 튼튼했다.
“저녁거리를 잡아서 돌아가겠소. 아직 향신료는 많이 비축되어 있겠지?”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어디에서 많이 본 미소였다.
“당연하죠. 늦지나 마세요.”
***
투웅―
허공을 걷어차는 발끝.
휘이이이이···!!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등 뒤에서 회전하는 열기가 마치 용의 날개처럼 그의 비행을 도왔다. 구름 너머에서 세 진룡의 기척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파삭! 콰사삭!
희미한 칼바람과 얼음 조각들이 갑옷에 부딪혀 부서진다. 날 때부터 신비를 타고난 진룡답게, 존재만으로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이내 구름을 뚫고 올라가자 세 마리 용이 육안으로도 확인됐다. 가까운 쪽이 녹색 비늘. 보다 멀리 떨어진 두 놈은 푸른 비늘.
‘서로 거리를 뒀다?’
척 보기에도 자연스러운 간격이 아니다. 심상 너머 고룡이 그 추측을 확인해줬다.
[댈런, 조심하거라. 저건 자신들보다 강한 용과 싸울 때를 상정한 대형이다.]
용과 용이 싸울 때의 전술이란 이야기였다. 전위와 후위를 나눴다는 건, 육탄전과 후방 지원을 분담하겠다는 의도겠지.
그렇다면 이쪽도 후방 지원을 요청하면 그만이었다. 댈런은 속으로 토드의 영역 안에 있는 그의 권속을 불렀다.
‘노인장.’
[준비는 끝났네. 언제든 말하게나.]
귓가에 은밀하게 들리는 전성. 그 순간 후위의 두 용이 울부짖었다.
[―――――!!]
주문이었다.
용언의 선포와 날갯짓 한 번. 활짝 펼친 날개 앞쪽으로 수백 가지 술식이 맺힌다.
집채만 한 얼음덩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날카로운 빙창이 활시위에 걸린 듯 팽팽하게 떨린다.
마른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는 순간, 허공에 펼쳐진 주문들이 일거에 빗발쳤다.
콰아아아아아─!
얼어붙는다.
새하얀 냉기로 들어찬 창공.
서리바람이 파도처럼 쏟아지며 주문의 폭풍이 쇄도한다. 한발 앞선 냉기가 피부를 저릿하게 조여왔다.
두두두두두두!
주문에 맞서 댈런의 검이 춤추기 시작했다. 검끝에 잘리는 새하얀 주술비석. 검면에 튕겨 나가는 수십 발의 얼음 화살들.
그건 허공에 붕 뜬 채 칼 한 자루로 비를 막는 곡예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빗방울 하나하나가 공성병기에 버금가는 위력이라는 것일까.
허나 중요한 건 주문의 폭격이 아니다. 댈런은 감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눈앞을 주시했다.
시각과 청각을 가리는 걸 넘어서서, 마력 감지마저 묻어버리는 압도적인 주문의 소용돌이 너머.
허초라고 하기에도 뭣한 수백의 술식 뒤에, 숨겨진 살초가 다가오고 있었다.
「몽환추적(夢桓追跡)」
─────!
보인다.
육감의 차원을 넘어선 권능.
아커만의 작도법에서 비롯된 몽환추적의 권능이, 한 번 마주친 대상의 기척을 주문의 폭풍 속에서도 예리하게 잡아낸다.
숨겨진 살초는 용 그 자체였다.
날개를 접고 쏜살같이 내리꽂히는 녹색의 거체.
먹잇감을 노리고 곤두박질치는 독수리처럼, 놈은 주문 속에 몸을 숨긴 채 은밀하게 강하했다.
주문에 대처하다가는 용의 기습에 당하고, 용을 신경 쓰다가는 주문에 두들겨 맞아 떨어지는 불합리한 이지선다.
허나 돌파구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노인장. 지금이오.’
[엘르― 메멘토 엘레구스.]
웅장한 영창이 구름 위를 아득하게 메웠다. 순식간에 사방에 만개하는 황금빛 파동.
구우우웅──
연달아 피어난 황금의 동심원이 주문의 파도를 막아서는 거대한 장막을 드리우고.
「영역 개방 :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파륜회술(破輪回術)」
장막의 만개와 동시에, 쏟아지던 주문의 시간선이 통째로 잠시 전으로 돌아갔다.
기기긱―
[무스···크아아아아악!]
주문의 폭풍 속에서 용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태엽이 되감긴 건 고작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허나 두 진룡의 합공을 훼방하기는 충분한 여유였다.
제아무리 파도타기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던 파도가 갑자기 1초 전으로 되감겨 버리면 어떻게 될까.
속절없이 파도에 휘말릴 수밖에 없겠지. 수백 가지 주문의 파도 속에서 은밀하게 짓쳐오던 진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쩌저저저저정───!
[끄어어어어!]
[티르브란느―!]
녹색 용의 비명과 푸른 용의 외침이 교차한다. 댈런은 성검을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아무리 진룡의 비늘이라도 뒤에서 쳐맞은 주문의 폭격에 멀쩡할 수는 없는 법.
하물며 같은 진룡이 쏟아낸 주문이라면 더더욱 피해가 크겠지.
「회명(回冥)」
전위가 패퇴한 틈.
후위의 지원을 꺾는다.
공간을 빗겨 뛰어넘은 댈런이 나타난 곳은, 푸른 용 두 마리의 머리 위쪽이었다.
「답보(踏步)」
「십이연답산(十二聯踏散)」
자연스럽게 몸을 뒤집어 땅을 향해 허공을 짓밟은 순간, 그의 신형은 열둘로 늘어나 있었다.
촤르르르!
아르보르의 사슬이 지나가자 분신들의 손에도 제각기 무기가 들린다.
양손으로 성검을 움켜쥔 본체와, 유물 무기 중에서도 대도를 골라든 열한 개의 분신.
「영역 개방 : 닫힌 설산의 하늘」
쿠르르릉···.
어느새 구름 위의 창공에는 한 겹의 먹구름이 추가로 덧씌워져 있었다.
붉은 기운과 푸른 뇌전이 동시에 이글거리며, 짐승처럼 사나운 울음소리를 흘리는 검붉은 뇌운.
[미친······.]
죽음을 직감한 것일까. 푸른 용의 입에서 허탈한 전성이 흘러나왔다.
곧이어 일제히 허공을 격한 열두 전사가, 열두 가닥의 빛살이 되어 내리꽂혔다.
「청뢰(靑雷)」
「뇌격(雷擊) : 연환」
「십이열고(十二裂拷)」
꽈르르르━━━━━!
먹구름 아래 뇌성이 번뜩였다.
구름에 비친 그림자는 진룡의 거대한 육체와, 그 육체를 중심으로 교차한 열둘의 푸른 빛살을 그려냈다.
조각조각 찢어져 떨어지는 그림자. 후드드 쏟아지는 고깃덩이와 피보라.
용 한 마리를 말 그대로 도살한 전사가, 피범벅이 된 고개를 돌려 하나 남은 푸른 용을 바라봤다.
송곳니를 드러내는 입꼬리. 그가 웃었다.
“다음 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