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53화 (253/288)

253

기사단의 불꽃(7)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이구려. 반쯤은 붉게 물들었지만.”

인적 하나 남지 않은 본단의 광장 공터. 파라오 가면이 보석 눈알을 팽글 돌렸다.

“그래도 붉든 푸르든 반갑긴 매한가지오. 무덤에 들어간 이래 처음으로 보는 거라 그런지.”

“답답하셨겠군요, 어르신.”

“아무렴. 답답했지. 삼천 년은 짧지 않소이다.”

에드거는 나직하게 웃었다. 근래 들어 재미있는 일이 참 많았다.

기사단 지하에 모래바람 왕조의 유적이 있다는 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수천 년간 잠들어있던 유적이 이제와서 깨어날 거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수천 년만에 깨어난 것도 모자라, 용 군단에 맞서 함께 싸워주기까지 하다니.

용 군단을 눈앞에 둔 채로 삼천 년 전 고대의 인물과 수다를 떠는 상황은, 인도자라 불리는 그조차도 예상하지는 못한 장면이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여기서 싸우실 거요? 그쪽을 따르는 기사단은 어쩌고?”

“기사단의 주인은 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나를 따르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파라오 가면의 물음에 에드거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손을 뻗어 앉은 자리 근처를 더듬었다.

익숙한 손잡이의 감촉. 주인의 손에 쥐어진 성검이 파르르 떨었다.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태어날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검을 쥔 에드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파라오 가면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뒤쪽으로는 천 마리쯤 되는 황금 풍뎅이의 군대가 도열해 있었다. 수 미터 높이의 거신상들도 스물이 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떻게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죠”

성법 결계의 범위는 빠르게 축소되고 있었다.

본단과 주변 요새를 전부 덮는 광범위한 은빛 장막은, 이미 본단 하나만을 아슬아슬하게 덮는 크기까지 줄어든 상태였다.

이내 그 경계는 본단의 성벽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곧이어는 결계의 중심축인 전당에까지 닿았다.

키이이잉······.

머지않아 은은하게 빛나던 장막이 전당 안쪽으로 모습을 감춘 순간.

어느덧 하늘은 한 점의 푸르름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시작이군.”

“그렇군요.”

“수백 마리 진룡 군단과의 전쟁이라. 이건 내 생전에도 상상해본 적 없는 업적인데.”

파라오 가면은 약간 들뜬 듯한 음색이었다. 에드거는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희뿌연 눈은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고개를 돌리는 건 감각을 그 방향으로 집중한다는 뜻도 되었다.

나머지 오감과 기감에 잡히는 건, 붉은 창공을 날아다니는 각양각색의 그림자들.

용들의 비행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천 가지의 주문이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았다.

“내가 주문을 막겠소. 보아하니 그쪽은 검에 더 익숙한 모양이니까.”

“좋습니다. 광장으로 날아드는 용들은 제가 처리하죠.”

빠르게 역할을 분배하자 풍뎅이들이 파르르 날아 흩어졌다. 스스로를 촉매로 일종의 방어용 마법진을 그리는 모양이었다.

파라오 가면까지 떠나고 난 뒤, 에드거는 다가오는 용을 향해 성검을 들어올렸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머릿속에는, 일생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던가.

[기사단의 노괴!]

까─!

검을 비틀어 용 발톱을 튕겨낸 에드거의 머릿속에도, 이 순간 스쳐가는 기억들이 있었다.

***

뭐든 처음이 기억에 남는 법이다.

첫 대련.

첫 정식 기사 서임식.

처음 악마를 죽였던 동굴. 부단장의 자리를 제안했던 전대 단장과의 면담 자리.

그리고.···.

‘청린을 처음 베었을 때.’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억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계곡에 흐르던 기사들의 핏물. 원로 기사로 활동하던 전대 단장의 처참한 시체. 균열 안쪽을 희미하게 내리쬐던 햇살. 면전으로 불어닥치던 청린의 숨결.

청린을 베었지만 그 대가로 두 눈과 한 팔을 내줘야 했다. 검사로서 극복하기 어려운 중상이었다.

하지만 에드거는 포기할 수 없었다.

희뿌예진 두 눈동자 안쪽에서, 그가 섬기는 전쟁신이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두 가지 이명이 붙여진 순간이었다.

외팔의 검성. 그리고 인도자.

[기사단의 노괴―!]

용의 포효가 코앞에서 울려퍼진다. 에드거는 재빠르게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지직─!

비늘이 깨진다. 가죽이 갈라진다.

용의 피가 터진 수도관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거리를 적셨다.

대대로 기사단장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성검에는, 악한 존재의 재생력을 무효화하는 능력이 깃들어 있었다.

[크아아아아!]

전성으로 토해지는 비명. 훅 하고 얼굴을 때리는 바람.

[――! ―――!]

전투 기도를 읊어 주문을 튕겨낸다. 곧장 다시 파고들려던 에드거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희뿌연 눈은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육감은 다음 공격을 경고하고 있었다.

쿠과과과과!

재빠르게 옆으로 몸을 날려 용의 입질을 피해낸다.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이빨에 갑옷 끝부분이 뜯겨나갔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충격이 몸을 흔든다. 가까스로 균형을 잃지 않은 채 발끝을 밀어찼다.

몸이 붕 하고 솟구치는 감각. 몸에 익은 대로 뻗어나가는 휘두르기.

백색 화염을 휘감은 성검이 입질에 실패한 용의 목을 잘랐다. 수도관 터진 듯하던 피가 아예 작은 댐을 방류한 듯 왈칵 흘러넘쳤다.

용 하나를 죽였음에도 몸에는 활력이 돌았다. 전신에 빼곡히 들어찬 신성문신이 하나씩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에드거는 두 번째로 다가오는 날갯짓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가빠오는 호흡을 훅 집어삼킨 순간, 머릿속에서 끊어진 주마등이 이어져간다.

“후우.”

언제부터였을까.

매일 밤마다 불안감에 잠을 뒤척이기 시작했던 건.

과거를 직시하고 현재를 개변한 뒤, 스스로 맞이할 미래를 선택해 6위계에 올랐다.

초월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세와 향락을 포기하고, 죽는 날까지 세상의 귀퉁이에서 악마의 군세를 막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끝이 다가올수록 에드거는 알 수 있었다. 닫힌 결말 앞에서 그의 희생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종말에 맞선 그의 발버둥은 고작 한 줌의 모래로 강줄기를 틀어막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걸 직시했을 때의 무력감과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장이라는 위치 때문에 어디에도 말할 수 없던 갈등.

오랜 불안감이 끝난 건, 한 전사를 만나고서였다.

‘···댈런.’

신이 주목하는 전사.

천국과 지옥의 이목을 동시에 사로잡은 인간.

당시까지만 해도 겉으로 보기에는 썩 특별할 게 없는 남자였다. 그는 수십만 군세를 발밑에 둔 지도자도, 영역을 이룬 초월자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첫 만남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댈런은 오랫동안 균열 안에서 도사리던 대룡 청린을 쓰러뜨렸다.

그는 이후 몇 년간 대륙 전역을 휩쓸며 악마들을 죽이고, 악신의 화신체에까지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에드거는 확신했다.

그 전사야말로 이 종말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예지안과 경험 모두 같은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었기에, 그는 얼마 전 예지안에 계시된 그림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내가 죽을 자리였지.’

사실 에드거가 본 그림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첫 번째는 사람들에게 말한 것처럼 균열로 댈런과 일행이 내려가는 그림이었고.

그들을 내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홀로 본단에 남아, 용 군단에 맞서다 장렬하게 불타 전사하는 그림이 두 번째.

“용들이여! 찬란했던 모래바람 왕조의 기술력을 맛보시오!”

[멸망한 고대 문명의 유령 따위가! 여긴 네놈들의 터가 있는 대사막이 아니다!]

“유령이라니, 당신네들 대부분이 나보다 수백 살은 더 처먹었으면서! 풍뎅이의 저주! 거신상의 주먹!”

콰광! 쿠르르르!

상념 너머로 파라오와 용의 설전이 들려온다. 에드거는 피식 웃으며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둘렀다.

어쨌든 그래서 에드거는 죽기로 결정했다.

그 역시 결국에는 종말에 맞서다가 스러질 뿐인 인생.

자신의 죽음이 대륙의 구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뜻깊은 결말이 어디에 있을까.

머나먼 고대의 왕이 마지막 동반자로 함께해주는 만큼, 그리 외로운 죽음도 아니었다.

[――――!!]

용언.

공기가 떨린다. 숨결이었다.

에드거는 걸음을 내디뎠다. 백 년 넘게 몸에 배인 동작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신성 문신이 거세게 빛을 내뿜었다. 발걸음마다 백색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콰아아아────!

[무스···!]

용의 숨결을 정면에서 피해내는 유려한 움직임.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단조로운 일검.

진룡 하나의 목이 더 떨어졌다. 에드거의 춤사위는 끝나지 않았다.

검이 번뜩이고 날개가 잘려나간다. 다시 번뜩이면 살이 한 움큼 뜯겨나갔다.

발가락. 꼬리깃. 등골 돌기. 이마의 뿔.

이따금씩 통째로 잘린 꼬리나 발이 쿵 하고 떨어지고, 그러다보면 머리통이 하늘을 날았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진룡을 상대로 홀로 벌이는 칼춤. 검에 맺힌 불꽃이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드넓은 광장에 흩뿌려진 백염은, 마치 거대한 제단에서 잔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원시 부족의 조악한 주술사들이, 널찍한 돌판 위에서 도마뱀의 목을 자르고 배를 가른 것 같이.

목을 자르고 이리저리 토막친 용을, 뭉근한 백색 불꽃 위에 던져둔 거대한 제단.

쿵.

용의 시체가 쌓인다. 에드거는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가 용 군단을 일방적으로 썰고 있는 듯한 모양새. 하지만 실상은 천천히 갉아먹혀가는 신세였다.

시간이 갈수록 검격은 무더져갔다. 예리했던 감각이 뭉툭해지고, 근육의 자잘한 떨림이 심해진다.

신성 문신도 영원히 빛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무한하게 쏟아지는 신성력 역시, 육신이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쯧.’

애당초 몇 달간 결계를 유지해온 탓에 컨디션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다. 완벽한 상태였어도 승리가 불가능한 싸움이니, 이 정도도 충분히 잘 버틴 것이겠지.

쉬이이익!

주문의 폭격을 피해 용 한 마리의 목을 떨어뜨린 순간, 사각에서 들이닥치는 용의 이빨을 발견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죽어라, 노괴!]

눈앞에서 터져나오는 전성. 번뜩이는 이빨과 쩍 벌어진 주둥이가 기감으로 느껴졌다.

마차도 삼킬 수 있을 듯한 죽음 앞에서 에드거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끌었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꽈르┴─┬┴─┬─

한 줄기 벼락이었다.

먹먹해지는 귀. 온몸으로 느껴지는 저릿함.

용의 거체가 힘없이 쿵 하고 쓰러졌다. 방금까지 그를 집어삼키려던 놈이었다.

머리는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용심장이 있었을 가슴팍에는 대문짝만 한 구멍이 큼직하게 뚫린 채.

에드거는 감았던 눈꺼풀을 들었다. 그는 희뿌연 눈동자로 뒤를 돌아봤다.

묵직한 발소리의 기척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금까지 상념 속에 머물고 있던 전사. 그가 스스로를 불태워 보내려 했던 예언의 주인공이었다.

“···댈런.”

“나한테 거짓말을 했더군.”

전사가 말했다. 조금 불편한 기색의 목소리였다.

“설마 내가 이 경험치 노다지를 그쪽한테 양보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