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만룡의 자식(1)
“댈런!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도우러 오다니, 그대는 역시 명예를 아는 전사로군!”
광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대답. 댈런은 눈썹을 슬쩍 기울였다.
방금 건 기사단장 에드거의 입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고대의 거신상 하나가, 진룡 한 마리를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힘겨루기를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파라오 대가리?”
“과연 우리 모래바람 왕조의 비급을 이은 사내다워. 자격 없는 이가 구사할 수 있는 언령술이 아니거거걱!”
콰과광!
한눈을 판 사이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가 거신상의 안면부를 강타했다.
머리통이 박살난 채 기울어지는 신상을 보며 댈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쪽 혼자였으면 굳이 갔던 길 안 돌아왔지. 이미 삼천 년 전에 뒈진 시체를 왜 살려?”
“크흐! 진정한 파라오는 따뜻한 심장과 날 서린 언변을 구사할 줄 아는 법! 인정하지. 피가 이어지지 않았을지언정 그대는 우리 왕조의 계승자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파라오의 목소리. 돌아보니 황동 풍뎅이 한 마리가 잔해 사이에서 삐그덕거리며 기어오고 있었다.
댈런은 등딱지에 파라오 가면을 얹은 풍뎅이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조금 돌려 광장의 남쪽을 향했다.
광장 일대를 뒤덮은 백색 불꽃과 자욱한 연기. 그 너머에서 일곱 개의 기척이 빠르게 다가온다.
당연하겠지만 에드거를 구하러 온 건 댈런 혼자가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반쯤 날아오다시피 했기에, 다른 이들보다 한 걸음 빨리 도착했을 뿐.
[엘르―]
가장 먼저 들려온 건, 광장에 아득하게 메아리치는 두 마법사의 전성이었다.
[메멘토.]
[툴리아.]
[메랄리아.]
[카시볼그.]
[아쿨로르.]
청년과 노년의 웅장한 목소리가 서로 교차한다.
영창의 짧은 소절마다 백염으로 타오르는 광장 바닥을 서서히 채워가는 황금빛 정광.
기이이잉···.
쌓아져가는 마력의 규모와 밀도 모두, 북부 전투의 서막을 알렸던 차리나의 주문 공명과 거의 동일한 수준이었다.
악신 쑴의 먹구름도 막아설 총량의 마력이, 켜켜이 쌓여가며 광장 저변에 대규모 술식의 기반을 다져간다.
[마법사다!]
[―――!]
[――! ―――!]
용 군세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용언 하나마다 수십의 주문이 맺히며 저녁노을 내려앉아가는 하늘을 주문의 광채로 가득 채웠다.
파라오의 지휘 아래 황동 풍뎅이와 거신상들이 주문을 받아내려 했지만, 유적 수호자의 병력 역시 오랜 싸움으로 피해가 막심한 상태.
콰과과과과···!!
하늘 높이 날아오른 풍뎅이 무리를 그대로 짓이기고, 오색 정광의 주문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순간.
[―엘레구스.]
발렌티노 사제의 목소리가 동시에 영창의 마지막 단어를 읊었다.
화악!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와 연기가 싹 걷혀나간다.
「영역 개방 :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파륜회술(破輪回術)」
「영역 개방 :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시계이격(時界離隔) : 반전」
광장을 거듭 뒤덮은 황금빛 동심원의 고리들이, 순식간에 다채로운 각도로 일어서며 황금빛 장막을 결성한다.
「영역 공명」
「칠칠쌍륜위계(七七雙輪衛界)」
츠즈즈즈즈즈···!!
광장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퍼져나가는 황금의 장막.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의 경계에 닿자마자, 쏟아지던 주문의 폭우가 동영상을 거꾸로 재생하듯 되감기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꽈과광! 꽈광!
저마다 다른 속도로 되감기다가 서로 부딪히며 터져나가는 수천 갈래 주문의 향연.
하늘 위에서 피어나는 마력의 불꽃놀이 사이로, 셀 수 없는 바위의 창극이 쏘아올려졌다.
촤자자자자작!
[크아아아아!]
[캬학! 날개! 날개가!]
[뒤로 물러나라! 전열을 다시 갖춰!]
날개 찢긴 아룡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광장 주변의 시가지에 유성처럼 매다꽂힌 뒤 기다리고 있던 바위 골렘들에게 찢겨나가거나, 떨어지던 중에 바위창에 추가타를 입고 숨통이 끊기는 거대 도마뱀들.
[6위계 술사가 펼친 공방일체의 대결계다. 시간과 대지 계열!]
[토룡들이 앞에서 방어해라! 나머지는 숨결로 장막을 파쇄해!]
아쉽게도 진룡들 중에 치명상을 입은 놈은 없었으나, 놈들 역시 주문을 쏟아내는 걸 멈추고 뒤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했다.
수십 마리 진룡과 그 열 배가 넘는 아룡의 군세를, 순간적으로나마 물러서게 만드는 대결계.
어지간한 주문은 죄다 되돌려버리는 대결계를 부수기 위해, 수백 마리 용들이 주둥이에 일제히 마력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금 장막에 수십 줄기의 숨결이 내리꽂히기 전.
「영역 개방 : 악의 심장을 꿰뚫는 백색 비검」
한 줄기 빛살이 하늘 위를 날았다.
***
──────푹.
[칵···!]
숨결을 그러모으던 용의 거체가 휘청인다. 용은 울컥 피를 쏟으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욱신거리며 밀려오는 격통. 어딘가 구멍이 난 듯 줄줄 빠져나가는 마력과 신비.
[···언제!]
고개를 내려보니 가슴팍에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말 그대로 작은 구멍이었다.
허나 구멍 안쪽에서부터 넘실거리는 백색 화염은, 진룡의 심장이라도 불태워버리기에 충분한 열기.
화르르르르!
[캬아아아아―!]
가슴팍의 구멍을 넘어서서 주둥이와 코, 눈에서까지 넘실거리기 시작하는 단마의 백염.
내장이 불타며 떨어지는 진룡을 뒤로 한 채, 백염으로 뒤덮인 성검을 든 성기사가 다음 목표를 향해 날아올랐다.
[성기사···!]
진룡의 날갯짓이 방어 주문을 빚어냈다. 상관없었다.
타락한 용족은 곧 악마와 진배없는 존재.
그리고 루시아가 펼쳐낸 영역의 힘은, 악에 한정해 그 어떤 방어라도 뚫어버리는 이해불가의 권능이었다.
─────촤악!
성기사의 손을 떠난 성검이 저 혼자 움직여 날개를 찢는다.
몸을 뒤튼 용은 간신히 치명타를 면했지만, 날개가 백염에 불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위기를 느낀 용이 거듭 주문을 중첩했지만 쓸데없는 일이었다.
날 때부터 신비의 존재로서 인리를 초월한 5위계의 용족이라 해도, 동격의 힘만으로는 이 극명한 상성을 찍어누르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니까.
────촤악!
[크아아악!]
수십 번 겹쳐진 방어 술식을 무시하고 성검이 틀어박힌다.
레레도나텔은 용의 심장에 백염을 붙인 뒤 순식간에 빠져나와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악마 살해자! 전쟁신의 검이다!]
[성기사 먼저 처리해라!]
펠버의 장막에 숨결을 뿜으려던 용족이 태세를 전환했다.
그러모은 마력을 주문으로 돌리고, 수천 갈래 공격 술식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루시아에게 집중됐다.
방어는 확실하지만 공격능력은 뒤떨어지는 대결계보다, 아군 전열을 헤집는 성기사의 검부터 제거하는 게 옳다는 판단.
틀린 결정은 아니었다. 악에게 극상성인 루시아의 영역이라도 만능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한 번에 하나의 목표만을 노릴 수 있는 특성상, 동시에 다수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
그러나 하늘 위의 용 군세를 상대하는 건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카아아악!]
꽈과광!
성기사를 향해 향해 숨결을 그러모으던 용이, 주둥이에서 터져나온 거대한 폭발과 함께 추락한다.
어디선가 날아든 흑백무늬의 새 한 마리가, 주둥이에 모이던 용숨결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
새가 주문에 부딪혀 산산조각난 뒤에도, 날카로운 흑백의 깃털은 예기를 잃지 않고 숨결의 마력에 뒤섞였다.
용숨결의 막대한 마력에 날카로운 백색 깃털이 뒤섞인 폭풍은, 용의 주둥이와 기도를 찢고 목을 반쯤 끊어버릴 위력이었다.
「영역 개방 : 빈민가의 소리 없는 날갯짓」
푸드드드득!
곧이어 깃털의 무리가 거리 저편에서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남쪽 시가지에서부터 날아오른 건, 방금 진룡을 떨어뜨린 새처럼 피륙 없이 깃털로만 이루어진 수천 마리 새떼.
그건 평소 마녀의 권능을 사용할 때와 달리, 흑색 사이에 백색 깃털이 뒤섞인 이색조(二色鳥)의 군집.
모니터 너머에서 하얀 깃털과 까만 깃털이 뒤섞이는 이팩트로 나타났던 영역의 힘이, 용 군세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흑랑백인(黑浪白刃)」
찌지지지지지직!
거리와 속도의 통념을 벗어난 듯,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간격을 순식간에 좁힌 새떼가 용 군세와 뒤섞이기 시작했다.
비늘과 가죽을 긁고 피막 날개를 찢는다. 완성 직전의 주문에는 몸뚱이를 들이받아 함께 폭발한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용 군세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루시아를 보호하며, 그녀를 노리는 주문을 적재적소에서 가로막는 치밀한 곡예비행.
하나하나가 진룡에게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검은 깃털은 아룡의 비늘도 간신히 찢어낼 정도였지만, 백색 깃털은 진룡의 가죽까지 가르고 파고들 수 있었으니까.
[크아악! 날파리 같은 것들이···!]
[진형을 바꿔라! 넓게 펼쳐!]
[술식의 주체를 추적해라! 그냥 도시 전체를 포격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용 군세의 전열.
그 사이 땅에서는 광장을 부수고 거무튀튀한 거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드드드드드···!
「영역 개방 : 원한을 쏘아올리는 왕가의 거병」
판석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포격이라도 맞은 듯 뿌옇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자욱한 먼지를 헤치고 솟아오른 거대한 강철 골렘은, 그 신장만 최소 오십 미터 이상이었다.
두 다리만 따져도 어지간한 고층 건물에 버금가는 높이와 너비.
도심부의 시가지조차 허리 아래쪽으로 두는 거병의 기세는,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탑과도 같았다.
“거병이여. 악에게 마땅한 화답을.”
기기긱! 철컹! 철컹!
외눈의 난쟁이가 나직하게 읊은 언령에, 거병이 룬이 빼곡하게 새겨진 두 팔을 하늘로 뻗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열리며 박격포에 버금가는 포구를 드러내고, 전신에 주렁주렁 달린 수백 문의 포신이 일제히 하늘을 가리킨다.
“난쟁이들을 학살한 황가와 그 뒤에 도사려온 다섯 악신에게, 천 년간 흘러내린 원한의 결실을 돌려주시오.”
댈런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이글거리는 외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난쟁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비요른의 주변으로는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했고, 발밑에서는 새까만 동심원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방랑하는 칼라드라쿰 왕조의 마지막 후손이자, 제국과 차르국의 기술을 훔친 외눈의 명공. 비요른 칼라드라쿰.’
오래 전 서릿발 왕좌 앞, 차리나가 그를 향해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펠버에게 듣기로 칼라드라쿰 왕조는 대륙 남부의 삼분지 일을 통치하다가, 인간의 제국이 건국되며 몰락한 옛 왕가이라던가.
차후에 따로 알아보니 칼라드라쿰 가문은 지난 천 년간 방랑하면서, 복수의 때를 두고 이를 갈았다고 한다.
“우리의 원한은 끓는 기름보다도 뜨겁고, 어떤 화약보다도 강력하게 터지리니.”
물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비요른의 대에 이르러서는 옛 왕조의 복수는 반쯤 잊혀진 과업이었다.
그러나 북부 전투 이후, 손녀딸 차리나의 죽음은 마지막 왕의 가슴에 다시금 원한의 불을 붙였다.
제국을 넘어 그 뒤에 도사리고 있던 에낙사구스를, 그리고 놈을 위시한 다섯 악신을 향한 왕조의 원한.
지난 천 년간 응집된 원한의 결과물이, 수백 문의 포대에서 불을 뿜었다.
“전 포대 발사.”
콰과광! 꽈과과광─!
폭발이 창공을 수놓는다.
화약 없이도 화약 이상의 폭발력을 내는 원한의 포탄.
셀 수 없는 폭발이 도시 위 대기를 뜨겁게 달구는 사이, 바위창과 깃털 역시 용들 사이를 끊임없이 헤집어댔다.
[푸른 비늘의 진룡이여! 그대는 왜 우리를 공격하는가!]
[청린이다! 청린의 자식이야!]
[제 어미의 심장을 쥐어뜯는 행위인 줄을 모르···크아악!]
거기에 백염의 성광과 함께, 용들의 심장과 목줄기를 물어뜯는 청린용 아카샤의 활약까지.
광장 한복판에 주저앉아 파른의 치료를 받던 에드거는, 그 광경을 멍하니 올려보다가 댈런에게 고개를 돌렸다.
댈런도 고개를 돌려 에드거를 쳐다봤다. 그리고 기사단장의 입이 열리는 순간, 그도 따라서 입을 열었다.
“어째서···.”
“어째서 구하러 왔느니, 왜 돌아왔냐느니 지껄일 거면 하나만 알아두시오.”
“······?”
“회복할 시간에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 한 마디마다 아구창을 야무지게 갈겨주도록 하지.”
댈런은 싱긋 웃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 사이로 번들거렸다.
“힘 남아돌면 백 마디쯤 떠들어보는 것도 괜찮겠군. 성기사단의 단장을 두들겨볼 기회가 오늘 말고 또 언제 오겠소?”
“······.”
에드거는 조용히 파른에게 다친 오른팔을 내밀었다.
전직 용병 출신의 성기사는 한 팔로도 붕대를 곧잘 감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