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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룡의 자식(2)
폭발이 창공을 수놓는다.
원한의 포탄과 바위창이 끝없이 하늘로 쏘아 올려지고, 이색조 무리가 주문과 충돌하며 연달아 터져나갔다.
쿠르르릉! 꽈릉!
대기가 달궈진다. 마력풍이 이지러진다.
사방으로 흩어진 구름 너머에서 시계마저 굴절되어, 내리쬐는 태양의 형체가 짓눌린 공 모양으로 왜곡될 정도.
[푸른 비늘의 진룡이여! 그대는 왜 우리를 공격하는가!]
[청린이다! 청린의 자식이야!]
[제 어미의 심장을 쥐어뜯는 행위인 줄을 모르···크아악!]
곧이어 도시 규모의 아수라장을 파고든 푸른 용 한 마리가, 다른 용들의 심장과 목줄기를 거침없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혹한의 숨결이 하늘을 얼리고, 그렇게 굼떠진 용들을 성검의 백염이 꿰뚫는 청린용과 성기사의 연계.
광장 한복판에 주저앉아 파른의 치료를 받던 에드거는, 그 광경을 멍하니 올려보다가 댈런에게 고개를 돌렸다.
댈런도 고개를 돌려 에드거를 쳐다봤다. 그리고 기사단장의 입이 열리는 순간, 그도 따라서 입을 열었다.
“어째서···.”
“어째서 돌아온 건지 묻고 싶겠지.”
“정확하시군요.”
나직한 웃음. 에드거는 반쯤 초탈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지안에 보인 건 분명 제 죽음이었습니다. 멀어버린 이 눈에 신께서 내린 축복이자, 두 세기 가까이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예지였···죠.”
움찔. 단장의 팔이 떨렸다. 붕대를 감아주고 있던 파른이 깜짝 놀라 치유 기도를 쏟아부었다.
“괜찮다. 계속 감아주렴.”
“···예.”
전직 용병 출신의 성기사는 한 팔로도 붕대를 곧잘 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앳된 용병 소년이었는데, 몇 년 사이 쑥쑥 자라 청년에 가까워진 모습이었다.
에드거는 파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예지안을 배제하고 전략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대륙의 명운을 걸고 두는 거대한 대국에서는, 6위계 초월자나 대악마조차 한낱 장기말일 뿐이죠.”
붕대 감기가 끝났다. 에드거는 어깨를 슬슬 돌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기에 더 큰 승리를 위한 마중물이 되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지켜낼 대륙의 수많은 인명에 비하면, 저 하나의 목숨은 너무나도 작은 희생이니까요.”
기사단장의 희뿌연 눈이 댈런을 바라봤다. 따지거나 추궁하려는 태도가 아닌, 그저 순수한 의문이었다.
자기 목숨을 놓고서도 저렇게 이해타산이 없는 걸 믿음이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미친 거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어디 하나씩 나사가 풀린 초월자들 중에, 저 정도면 지극히 양호한 편이겠지.
댈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헛소리요.”
“······.”
“애초에 한 사람도 지켜내지 못한 인간이, 대륙을 지켜내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이겠소?”
***
혼자서 지켜내려 했던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혼자서 게임의 끝을 보려 했던 시절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게임의 NPC들은 이상할 정도로 예측이 불가하고, 도움이 될 때만큼이나 방해가 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NPC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도 한두 번이면 족한 일. 두 자릿수 회차를 넘어갈 즈음부터는, 자연스럽게 데이터와 폴리곤 덩어리로 보였다.
‘그렇게 점점 더 솔로 플레이에 몰두하게 됐지.’
같은 무기라도 한 번의 삶을 사는 NPC보다, 몇 번이나 플레이해본 그의 캐릭터가 더 잘 다뤘다.
전략적인 판단 역시 모니터 너머에서 바라보는 그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수십, 수백 회차를 거듭하며 NPC와의 협력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대신 가능한 모든 가능성의 끝을 보고자 했다.
무투가로. 궁사로. 술사로. 흑마법사로.
갖은 가능성의 끝을 보고서도 벽에 부딪혔다. 마침내는 그 모든 경험을 한 캐릭터에 몰아넣었다.
‘잡캐의 극한이었던 마지막 회차였지.’
맨손으로 언덕을 부수고, 발걸음마다 용암이 끓어 넘치던 전사.
동시에 손짓만으로 수백 다발의 벼락을 떨어뜨리고, 지옥문마저 제멋대로 주무르던 술사.
그런 힘을 얻기 위해서, 마지막 회차의 그는 모든 것을 도외시했다.
삼왕국의 기사왕을 죽이고 보검을 빼앗았다. 길드 연맹에 쳐들어가 상인 길드장의 목숨을 인질로 금을 약탈하기도 했다.
거래든 약탈이든 가장 빠른 길만을 추구했다. 철저한 설계 아래 인신제사는 물론 악마의 심장을 뽑아먹는 일도 개의치 않았다.
바로 몇 회차 전에 흑마법사 캐릭터를 플레이하며 숱한 살육을 저질렀기에, 그 정도로는 양심의 털끝조차 동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악신들을 상대할 수 있는 힘 하나뿐.
그리고 다섯 악신의 연합 앞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벽을 마주하고 말았다.
“악신들과 놈들의 대지옥을 무너뜨리려면, 미궁 끝에 있는 소원의 돌이 반드시 필요하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의아했던 겁니다. 기껏 시간을 벌어 균열로 내려가는 길이 열렸는데, 갔던 길을 돌아오시다니.”
“소원의 돌에 얽힌 전설을 잘 아시오?”
갑자기 무슨 전설? 에드거는 의아했다.
댈런은 고개를 꺾어 일행이 싸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1층에서 출발해 작열사막과 바닥 없는 늪, 암묵해월령을 지나면 미궁의 다섯 번째 층이 나오지. 그 끝에는 관문이 있소.”
힘으로는 결코 여는 게 불가능한 관문.
열쇠가 없으면 무슨 방법을 써서도 통과할 수 없었다.
관문이 요구하는 열쇠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네 사람.
“인간과 마녀, 성직자와 마법사. 소원의 돌까지 단 두 층 남겨놓고서, 그런 관문이 있는 이유가 뭐겠소?”
“······.”
“혼자서 이곳을 통과할 생각은 하지도 말란 이야기겠지. 애초에 동료의 시체를 밟고 가는 놈은, 소원의 돌이 제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소리···.”
콰쾅───!
말끝을 끊어놓는 거대한 폭음. 순간적으로 번뜩인 백색 섬광.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휙 하고 돌아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두 군데였다.
보다 먼 쪽은 도시의 성벽 저 너머, 장벽 산맥의 관문 요새가 있는 방향.
그리고 가까운 쪽은 바로 머리 위···.
“쿨럭!”
“비요른 님!”
거멓게 죽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난쟁이. 파른이 달려가서 그의 몸을 받쳐 드는 것과 동시에, 머리 위에서 무언가 우르르 떨어지기 시작한다.
쿵! 쿠궁!
망가진 포신과 거대한 톱니, 그밖에도 가지각색의 기계부품들이었다. 땅에 닿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릿하게 사라지는 쇳덩어리들.
댈런은 고개를 들었다. 원한의 포탄을 끝없이 쏘아 올리던 거병이, 가슴팍에 구멍이 뻥 뚫린 채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댈런! 댈런!”
그즈음 루시아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용의 피로 칠갑을 한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입을 열었다.
“성공입니다! 용 군단이 물러가고 있어요!”
“···아니오.”
“이대로 쫓아가서 추가로 피해를 입힐까요? 아니면···예?”
“퇴각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요.”
댈런의 눈이 잿빛 마력광으로 번뜩였다.
이내 장벽 산맥 안쪽의 분지 전체를 뒤덮는 지도가, 머릿속에 아득한 흑백으로 그려졌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루시아의 말대로 줄지어 물러가는 용 군단이었다. 그리고 놈들이 물러가는 방향을 따라가 보면, 장벽 산맥의 관문 요새가 나왔다.
방금 전 폭음의 근원지임을 주장하듯, 완전히 박살나버린 관문 요새와 계곡.
장벽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가장 널찍한 출입구이자, 기사단의 관문 요새가 지키고 있던 계곡이 통째로 무너져 있었다.
“······.”
댈런은 그 계곡 안쪽의 존재감을 느꼈다.
그 존재 역시 댈런을 보고 있었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임에도, 마치 코앞에 있는 것처럼 서로를 명확하게 인지한다.
댈런은 눈에 번뜩이던 마력광을 지워내며 말했다.
“퇴각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의 신을 알현하기 위해 공간을 만드는 거요.”
“신······.”
“용신이 왔소.”
***
불편하게 차오르는 숨.
온몸의 털끝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
이 육체를 입고 난 이후, 댈런은 존재만으로도 그를 긴장하게 만드는 대상을 거의 만난 적 없었다.
단순히 용병일을 할 때도 그랬지만, 초월의 벽을 뚫은 뒤로는 아예 한 손에 넉넉하게 꼽을 정도였고.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일이 드물어졌기에, 몇 안 되는 경우만큼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똑똑하게 기억했다.
‘악신을 만났을 때.’
북부에서 쑴을 마주했을 때가 처음이었고.
혈령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스스로를 사령술의 제물로 바쳤을 때가 그 다음.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 이 순간, 붉게 일그러진 하늘 아래 천이 넘는 용을 이끌고 오는 존재였다.
아룡의 머릿수만 네 자리. 하나하나가 초월자 급인 진룡의 숫자도 백이 훌쩍 넘어간다.
에드거와 댈런 일행이 기습과 상성, 전장의 우위를 살려 이제껏 떨어뜨린 진룡이 가까스로 서른이 넘을까 말까인데.
단순 숫자만으로도 그 몇 배나 되는 용들이, 본단의 성벽을 넘어 다가오고 있었다.
꽈르릉! 쿠르르릉!
하늘에는 한 점의 푸르름도 남아있지 않았다.
새빨간 운무가 화산에서 분출되는 용암처럼 흘러가며 태양을 가리고, 붉은 뇌전이 번쩍이며 땅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대룡전.’
대장장이 댈루카힘의 눈으로, 모니터 너머에서나마 목도한 적 있는 광경이었다.
수천 년간 용들의 날갯짓 아래 놓여있던 땅. 열세 대룡과 그들의 주인인 용신이 지배하는 세계.
그 대지옥이 아예 현실을 침식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댈런은 고개를 저었다.
성기사단을 포위해 단숨에 섬멸할 수 있었음에도, 용 군단이 지난 몇 달간 공세를 질질 끌었던 게 우연일 리 없었다.
본단의 성법 결계가 강력한 대결계이긴 하지만, 그것 하나로 용 군단의 모든 공격이 막혔다는 것도 이상한 일.
그보다는 아예 이 땅 전체를 제단과 제물 삼아, 용신의 진체를 드리우고자 했다는 게 더 현실적인 해석이겠지.
애초에 그 결과물이 지금 눈앞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
[――. ―――.]
알아듣지 못할 용언으로 경배받으며, 희멀건 잿빛 비늘의 용 한 마리가 땅으로 천천히 내려온다.
진룡들 중에서도 유독 독특한 외형의 일곱 용이 그 용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잿빛 용의 체격은 도드라지게 작아 보였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십 미터를 간신히 넘길 듯한 몸 길이. 특색 없는 한 쌍의 피막 날개와 이빨.
그러나 그 주둥이 사이에서 이글거리는 검은 불꽃은, 댈런이 봐왔던 그 어느 숨결보다도 위협적이었다.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손을 얹으니, 어느새 땅에 발을 디딘 용의 형상이 소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용신.]
심상 너머에서 적창의 끓어오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릴 리 없는 목소리임에도 소년은 반응했다.
[적창의 피가 살아있다더니, 진짜였구나.]
길게 찢어지는 입꼬리.
번들거리는 날카로운 이빨들.
희뿌연 잿빛 머리의 소년은 댈런을 향해 손바닥을 펴 보였다. 둘로 갈라진 혀를 낼름거리며 놈이 말했다.
[내 자비를 베풀겠노라.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 그 앙칼진 계집의 피를 주인에게 돌려···.]
쐐액―!
그리고 도끼가 허공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