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56화 (256/288)

256

만룡의 자식(3)

도끼는 목적지에 닿지 못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백색 검이, 공간을 빗겨낸 도끼를 절묘하게 막아선 것이었다.

콰아앙!

불똥과 함께 튕겨나가는 도끼. 단순한 공격과 방어임에도 충격이 일대의 먼지를 싹 밀어낸다.

댈런은 손을 뻗어 도끼를 회수했다. 그는 무덤덤한 눈으로 난입한 백색 검의 주인을 쳐다봤다.

[백검···.]

심중을 울리는 적창의 목소리. 댈런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저놈이 그 백검이오?”

[그래. 용신의 가장 충직한 수하이자···수천 년 전에 내 날개를 찢어놓은 장본인이지.]

그녀의 음색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적개심과 분노.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감정적인 모습.

댈런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용신이 그녀에게서 이름을 앗아갔을 때, 백검이 함께 합공을 가해 치명상을 입혔다던가.

그녀의 수하였던 지저룡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역시, 그 합공으로 약화된 끝에 맞이한 비참한 말로였다.

[거듭 말하게 되는 것 같지만···조심하거라, 댈런. 백검은 생전의 나만큼이나 강대한 힘을 가진 대룡이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형인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용의 모습으로는 그 역시 모니터 너머에서 몇 번쯤 붙어본 적이 있었다.

바다를 증발시키고 산맥을 날려버렸다는 적창의 날개를 찢어버린 만큼, 놈의 무력은 지금의 댈런이라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수준.

“······.”

[······.]

살얼음이 가득 내려앉은 침묵 속. 검끝을 천천히 까딱이며 상대를 살핀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검이었다. 이름에 걸맞게 검끝부터 손잡이까지 전부 새하얀 대검.

창백한 빛을 은은하게 흘리는 대검은, 큼직한 무기를 좋아하는 댈런의 기준으로도 과할 정도였다.

이 미터가 훌쩍 넘는 길이에 널찍한 검신만큼이나, 그 소유자의 덩치 역시 거대한 편이었고.

‘삼 미터 남짓 되는군. 사실상 트롤이야.’

인간형임에도 댈런의 한 배 반쯤은 되는 큰 키. 그 장신에도 불구하고 과장되었다고 느껴질 정도의 근육들.

그 근육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자, 놈이 혈색 없는 입술을 먼저 열었다.

[미개한 인간종답구나. 신을 향한 경외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그가 말했다.

“지랄. 저 애새끼가 그쪽 신이지 내 신이냐?”

[감히···.]

“아, 정정한다. 병신도 신이라는 말이 있었지. 그런 의미라면야 얼마든지.”

[······.]

앞뒤 없는 욕설에 백검이 입을 다물었다. 어이를 상실한 듯한 얼굴이었다.

댈런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짜고짜 남의 사람 내놓으라는 게 더 어이없는 일 아닌가?

그가 보기에 그건 신쯤이나 되는 작자가 할 짓이 아니었다.

오히려 헤어진 옛 연인을 잊지 못해서, 잘 사귀고 있는 남의 연애에 훼방 놓는 구질구질한 전 애인에 가까웠지.

[썩 마음에 드는 비유로구나. 그래. 우리의 관계를 굳이 따지자면 연인이 아니겠더냐. 이미 처음부터 한 몸을 이룬···.]

‘그쪽도 좀 조용히 해주시고. 남의 마음 읽을 거면 안 들키게라도 하던가.’

[표층 의식에서 생각해놓고 그걸 듣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참 얄궂은 사내로다.]

시발. 아주 양쪽에서 다르게 지랄이군. 댈런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 손짓에 백검이 움찔거렸다. 초월자의 손짓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수인이며 의지의 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건 댈런이 노린 바였다.

「영역 개방 : 악의 심장을 꿰뚫는 백색 비검」

6위계의 진룡을 정면에서 기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선을 빼앗아야 했으니까.

***

────쉬이익!

기척 없이 쏘아진 루시아의 검.

번뜩이는 백염을 두른 검이 갑옷과 방어 주문을 죄다 무시한 채, 그 안쪽의 창백한 피부를 파고든다.

[비겁한···!]

놀랍게도 백검은 반응해냈다.

백염이 근육까지 잘라내기 직전, 놈이 휘두른 거검이 루시아의 성검을 밀어낸 것이었다.

카가가가각!

거칠게 뒤얽히기 시작하는 두 자루의 백색 검.

거친 쇳소리와 불꽃이 연달아 터져나오며 대기를 찢어발긴다.

“···칫!”

성검을 제어하던 루시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영역은 전후 과정을 무시한 채, 악의 심장을 꿰뚫는 결과만을 가져오는 인과 역전의 권능.

상대의 위계가 더 높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기습이라는 점과 압도적인 상성상 유효타 정도는 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수천 년간 살아온 고룡의 반응속도는, 그녀를 악마 살해자로 만들어준 권능마저도 능가하는 것인가.

루시아의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 댈런은 이미 놈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회명(回冥)」

잿빛 음영이 시선을 분산시키고.

「사연답산(四聯踏散)」

한순간에 네 개로 늘어난 인영이 각기 전후좌우를 노리고 달려든다.

[···그런 헛짓거리 따위!]

가까스로 루시아의 검을 뿌리친 백검이 외쳤다. 댈런은 무시하고 아공간을 열어젖혔다.

단단한 비늘과 질긴 가죽을 뚫는 게 어려울 뿐, 어차피 칼이 박히면 죽는 건 고대의 진룡이라도 매한가지다.

지금 들고 있는 성검도 그렇게 쓰러뜨린 지저룡의 용골로 보강한 게 아니었나.

그렇게 넷으로 늘어난 인영이 각기 다른 경로로 백검의 급소를 노린 순간.

[흐읍···!]

검을 든 놈의 팔이 흐릿해졌다.

────쩌저저저저적!

다섯 자루의 무구가 얽힌다.

그 충격은 루시아의 검이 얽힐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으드드드드···!!!

기세 자체가 압력이 되어 땅을 짓누른다. 무른 반죽처럼 으깨진 지면 사이로 흐릿한 인영들이 교차했다.

「오연답산(五聯踏散)」

하나 더 늘어난 분신체가 창을 찌르고.

투칵!

검면으로 흘려보낸 백검이 왼손 수도(手刀)를 내지른다.

「육연답산(六聯踏散)」

잿빛 그림자가 일렁였다. 유물 방패를 들고 끼어든 인영은 아슬아슬하게 백검의 손날을 흘려냈다.

으지직!

손날 한 번에 걸레짝인 된 방패를 버리고 새 무구를 뽑아든다. 다만 그 너머에서 휘둘러진 백검의 칼날이 조금 더 빨랐다.

「칠연답산(七聯踏散)」

한 번 더 늘어난 인영이 쌍날검을 휘둘러 방어와 동시에 공세를 다시 가져오고.

「팔연답산(八聯踏散)」

하늘 위에서 나타난 인영이 지팡이에서 불길을 폭포처럼 쏟아내, 백검의 배후를 틀어막으며 활로를 제약한다.

「구연답산(九聯踏散)」

「십연답산(十聯踏散)」

「십이연답산(十二聯踏散)」

일대를 휘젓는 회백색 그림자의 향연. 번뜩이며 나타나 아공간에서 유물 무기를 꺼내드는 인영들.

몇 번의 공방 만에 부서진 무구를 버리고, 새로이 무구를 꺼내든 인영들과 교대하며 차륜전을 펼쳐낸다.

회백의 투사에게서 계승한 고유 스킬은, 단순히 허상을 늘리는 눈속임이 아니었다.

육신으로 공간을 빗겨내는 기예를 하이 오크 주술과 섞어 절묘하게 응용해, 실제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일종의 분신을 만들어내는 기술.

그렇게 만들어진 분신체는 신체능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것은 물론, 검술과 주문을 포함한 각종 이능 역시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비록 성검은 늘어나지 않아 한 자루뿐이지만, 아르보르의 아공간에는 그렇게 늘어난 분신들의 손에 쥐어줄 치명적인 유물 무기들이 한가득이었고.

[영역을 내보여라, 인간!]

백검이 소리쳤다. 댈런은 이번에도 무시하고 공세에 집중했다.

영역을 쓰지 못하거나, 상성상 불리한 게 아니다.

그의 영역 속에는 비교적 낮은 위계임에도 수많은 용들을 살해한, 대장장이 댈루카힘의 권능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초월자들의 시체를 계승하며 쌓아온 가능성들을 쏟아낸다면, 아무리 강대한 백검이라 하더라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허나 그럼에도 유물 무구들을 몇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으로 삼아가며, 두 자릿수의 분신체를 운용해 백검을 상대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천 마리의 아룡과 백이 넘는 진룡이 눈앞에 있었지만, 이 싸움에서 넘어서야 할 가장 큰 산봉우리는 놈들이 아니었기 때문.

‘놈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백검의 등뒤.

나른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잿빛 머리의 소년.

콰아아앙!

격검이 땅을 뒤엎고 마력의 칼날이 폭풍처럼 일대를 훑어내는 와중에도, 소년은 전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지형지물을 뒤엎고 일대의 공간을 수십 차례나 으깨버린 충돌 속에서도, 폭풍의 눈처럼 고요한 십여 미터 반경의 무풍지대.

상식을 개변하는 초월자들의 싸움터에서, 저 비현실적인 광경이 우연일 리 없겠지.

오히려 저 괴리감이야말로 눈앞의 소년이 신위에 오른 존재, 용신의 진체임을 증명하는 현상이었다.

‘적창. 용신은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거지?’

[관찰하고 있는 듯하구나.]

‘···관찰?’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오른팔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관찰이라고?

[댈런, 용신은 쑴과는 다르다. 태생부터 용족의 이기심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 호승심보다 실리가 앞서는 게 당연한 천성이니라.]

‘······.’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는 싸움이라면 그는 나서지 않는다. 그게 설령 다른 악신과의 전쟁이라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모니터 너머에서 용들을 수두룩하게 도륙했을 때도, 다른 악신들과 달리 용신은 어지간해서는 일선에 나서지 않았었지.

애초에 수백 번이나 반복된 회차들 중에서도, 용신과 맞붙은 적은 단 두 번뿐이었다.

‘대장장이 댈루카힘. 그리고 마지막 회차.’

한 번은 용신의 대지옥에 직접 쳐들어갔었고.

다른 한 번은 다섯 악신이 갈등을 멈추고 연합할 정도로 그를 중대한 위협으로 여겼던 때.

위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싸움에 뛰어드는 데 신중하다는 건, 그만큼 승산을 철저하게 계산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5위계 이상 초월자들의 싸움이 서로의 패를 까내리는 수싸움에 가깝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상황에서 영역의 정경은 더욱더 숨기는 게 옳은 판단일 터.

[백검! 네 뒤를 맡겠다!]

[용신을 위하여! 대룡전의 영광을 위하여!]

다만 전장이라는 환경은, 언제나 옳은 결정만 내릴 정도로 이상적인 장소가 아닌 법.

댈런과 백검이 싸우는 전장을 중심으로, 일행과 용 군단이 본격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

꽈르릉!

콰드드드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본단의 성벽.

용숨결과 성화가 교차하며 도시의 가도를 핥아내린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벼락 다발 사이로, 비요른의 새 거병이 대지를 부수고 일어났다.

곧장 하늘을 향해 포문을 돌리는 수백 문의 포신.

포격은 지체 없이 이루어졌다.

두두두두두두!

폭발과 화염이 창공을 수놓는다.

포격에 얻어맞은 용들이 우후죽순 땅으로 떨어졌다.

물론 용 군단 역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고도의 차이를 지형적인 이점으로 삼아, 놈들의 주문과 숨결이 거병이 선 일대를 사정없이 짓이겼다.

━━━━━━!!

번쩍이는 빛으로 눈부시게 밝아진 사위. 그 아래 어지러이 드리워진 그림자.

주문의 파도가 한 차례 훑고 지나간 일대는, 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평탄화되어 있었다.

[해치웠나!]

아룡 한 마리가 기대감을 담아 외쳤다. 놈은 난쟁이의 시체를 가지고 놀 생각에 냉큼 하강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러나 땅이 녹고 증발되며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보인 건, 난쟁이의 시체가 아닌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황금빛 마력이었다.

연기 속, 거병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가 씩 웃었다.

“도마뱀 새끼가.”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