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58화 (258/288)

258

만룡의 자식(5)

자박.

한 발자국.

용신이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내디딘 발걸음.

“······!”

그 가벼운 몸짓에 끓어오르던 주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일곱 위계의 끝자락에 다다라, 존재 자체로 세계의 질서를 비트는 존재감.

그르르르···.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괴성이 하늘에 울려퍼졌다.

붉게 물든 하늘은 물결처럼 요동치더니, 이내 한 점으로 모여들며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대룡전의 힘이다. 용신이 움직이기로 결정했구나.]

적창이 말했다.

그녀의 피를 이어받은 댈런 역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혈관을 따라 도는 용혈이 기이하게 달아오른다. 버번에게 시술받은 심장과 골격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을 아우르는 기묘한 고양감 가운데,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혈령의 목소리.

‘여섯 번째 위계는 밟고 있는 세상 위에 자신의 세상을 덧씌울 수 있지. 일곱 번째 위계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

세계 자체를 움직이는 건 신만이 가질 수 있는 권능이라던가.

무한한 가능성의 환상세계 위에 지어 올려진 세계들은, 현실의 법칙을 통째로 다시 써내려가는 특징이 있었다.

그렇다면 용혈과 용골에서 느껴지는 이 고양감은, 용신의 대지옥인 대룡전이 가까이 도달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용신의 권속이 아닌 그가 이만큼이나 변화를 느낄 정도라면.

그건 물경 천에 달하는 대룡전의 군세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 ―――――!!]

[―――― ―――!]

도시를 쩌렁쩌렁 울리는 용언의 합창. 오래 생각을 이어갈 여유는 없었다.

마치 자신의 군주를 호위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백검을 위시로 한 일곱 대룡이 전부 땅으로 내려앉았으니까.

쿠웅―!

육중한 갑주를 걸친 사내가 지면으로 뚝 떨어졌다. 모니터 너머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폭주한 주술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갑옷을 입었다기보다는 갑옷 안으로 들어갔다는 게 맞는 듯한 외견의 무투가.

갑옷 그 자체를 무기로 삼은 사내는, 바로 용신의 흉갑이 인간형을 취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빙정(氷晶)」

「개화(開花)」

「청파랍(淸波拉)」

투가가강!

쏟아지는 얼음창을 팔을 휘저어 걷어낸 흉갑이, 흐름을 이어 한 걸음 내디디며 주먹을 내지른다.

구우─

권압만으로도 시계가 이지러지고, 지면이 쩍 갈라지며 속살을 드러내는 일격.

공간을 찢어발기는 충격에 분신체 둘이 휩쓸려 사라졌다. 허나 댈런은 물러서지 않았다.

‘용신의 흉갑. 빙계 술식에 면역. 마력으로 빚어낸 갑옷. 뇌전에 취약.’

오히려 모니터 너머에서 달달 외웠던 정보를 복귀하며, 몸 전체에 푸른 전격을 둘러내고 전진한다.

「술식갑주 : 청뢰갑(靑雷甲)」

「청륜(靑輪)」

파지지지직!

허공을 짓밟고 올려찬 무릎에서, 푸른 뇌격이 송곳처럼 쏘아지며 권풍을 가르고.

「말원(抹原)」

검끝에 맺힌 흐릿한 기운이 남은 여파마저 소멸시키며, 흉갑과의 거리를 검의 간격 미만까지 좁혀낸다.

「합투권 : 철격(徹擊)」

왼주먹을 뻗는 순간, 날개뼈에서부터 공명해 주먹까지 내달리는 마력.

「여중쇄(閭重碎)」

다섯 갈래의 나선으로 꼬여든 마력이 날카로운 창극의 형태로 변해, 갑주의 판금과 방어 술식을 죄다 부수고 들어갔다.

떠어어어엉!!

[카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흉갑이 튕겨나갔다. 허나 숨 돌릴 여유 따윈 없었다.

네 개의 팔로 꼬챙이 같은 세검을 찔러오는 검사.

큼직한 깃발을 휘두를 때마다 수백 가지 술식을 터뜨리며 다가오는 기수.

‘검사는 용신의 오른쪽 견갑. 저쪽은···.’

[용신의 망토다. 다계통 술사를 상대한다고 생각하거라!]

적창의 도움을 받아 모니터 너머에서 용의 모습으로 마주했을 때를 되새긴다.

용신과 싸운 건 수백 회차 중에서도 단 두 번뿐.

허나 그 권속인 대룡들과는 용의 형상이든 인간의 형상이든, 한두 번쯤은 모두 부딪혀본 경험이 있었다.

모니터 너머에서의 경험과 기억을 기반으로 일대의 마력풍을 새로운 흐름으로 고쳐 휘어잡고, 술식과 이능들을 무의식 기저에서 완전하게 재정비해 상성상의 우위를 점한다.

「빙정 : 백향근(百向根)」

촤자자자작!

손끝에서 피어난 얼음꽃이 백색 결정의 뿌리를 뻗어내 네 자루 세검의 검로를 어지러이 꼬아놓고.

「홍염주(紅炎柱) : 삼력거반(三力擧反)」

「청파벽조(淸波劈肇)」

쿠과과과과과···!!

집채만 한 파도가 세 줄기 불기둥과 뒤섞여 쏟아지며, 정교한 수백 가지 주문의 연쇄를 열기와 압력으로 밀어버린다.

‘후위의 주술사와 창사! 저 둘은 누구지?’

[주술사가 첫 숨결. 측면에서 달려오는 창사가 투구니라!]

두두두두두!

집채만 한 불덩이들이 하늘에서 유성우처럼 떨어지고, 용신의 투구가 든 창이 살아있는 뱀처럼 휘어져 들어온다.

일대의 지형 자체가 뭉그러지며 토사와 잔해의 폭풍이 시계를 어지럽히는 아수라장.

기감마저 신뢰할 수 없는 마력풍의 왜곡 한가운데, 댈런은 적창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달려드는 용들의 면면을 재빠르게 살폈다.

인간형으로 맞서본 적 있는 건 흉갑과 오른쪽 견갑, 그리고 쌍두마를 탄 기사의 모습을 한 각반.

백검, 망토, 첫 숨결과 투구는 용의 모습으로 싸워봤던 놈들이었다.

[아홉 중 일곱이다! 방패와 익갑은 오지 않았다. 놈들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열세 대룡 전부가 용신의 편에 서지는 않았다는 것일까.

지저룡 타테앙카트 파르지움은 그의 손에 죽었고, 청린과 적창은 댈런의 아군이었다.

용신의 첫 포효, 카일버르쿠스 아르번 역시 시에나의 보호자를 자처했으니 놈의 편에 설 리는 없겠지.

열세 대룡 중 넷이 배제되었고, 남은 아홉 중 일곱만이 종말을 앞두고 용신과 뜻을 같이한 셈.

하나하나가 대악마급인 대룡들이 사실상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면, 이쪽의 승산도 그만큼 높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염사(炎巳)」

화르르르르!

그럼에도 쉽지 않다.

허공에서 불꽃으로 이루어진 뱀을 빚어내 망토를 향해 날려 보내고, 아르보르의 사슬로 갑옷을 수복한 흉갑의 움직임을 속박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쿠구구구구······!!

하늘 위의 붉은 소용돌이는 시시각각 커져가고 있었다. 용들의 상태 역시 그에 맞춰 점점 바뀌어갔다.

인간의 발성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이질적인 울음소리가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고.

세로로 찢어진 파충류 특유의 동공이, 마치 약물에 취한 것처럼 기괴하게 확장된다.

움직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형상을 포기하고 용의 모습으로 숨결을 뿜었다가, 다시 돌아오며 신체의 일부분만 변환해 공격하기까지.

조금 전까지 이지를 엿볼 수 있었던 전투가 점점 더 본능적인 무언가로 바뀌어갔다.

방금까지의 합공이 각자 이성을 지닌 개체로서의 협력이었다면, 이제는 아예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일곱 대룡들.

일곱이지만 마치 한 마리의 용과 싸우는 듯하고, 그러다가도 일곱 갈래로 몰아치며 퇴로를 막고 선택을 강요한다.

카가가각──!

용신의 투구가 뻗어낸 창을 성검으로 비틀어 흘리면서, 댈런은 놈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소년은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뚜름하게 끌어올린 입꼬리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인다.

[본신의 위계를 무시하고 신위에 닿은 힘. 내 신하들의 합공을 영역 없이 막아낼 수 있는 저력이라.]

두 갈래로 갈라진 길쭉한 혀가 입술을 핥고.

[내 직접 나서서라도, 네 심상 너머의 정경을 들여다봐야 하겠구나.]

내디딘 발걸음에서 붉은 파문이 느릿하게 퍼져나간다.

하늘의 회오리와 발 아래 붉은 파문이 공명하는 순간, 놈을 비롯한 일곱 대룡의 신형이 녹듯이 사라졌다.

댈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새빨갛게 이글거리는 대룡전의 기류 아래로, 작은 점 하나가 높이 솟아있는 게 보였다.

“······.”

작은 점은 용신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하늘에 둥실 떠오른 잿빛 소년.

소년의 창백한 몸뚱이에는 방금까지와 달리, 형형색색의 무구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거무튀튀한 흉갑에 매끈한 각반과 투구. 가시투성이 견갑에 단단하게 메인, 수천 가지 술식진이 수놓아진 망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까만 불길이 넘실거리고, 새하얀 검에 서린 살기는 댈런마저도 몸이 굳게 만들었다.

으드득.

덜덜 떨리는 턱으로 입 안쪽을 씹었다. 뜨끈한 핏물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댈런은 가볍게 뛰어올라 용신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용 새끼들 이름이 좀 별나다 했더니, 진짜 무슨 합체로봇이었어?”

[합체···뭐?]

“아, 로봇 모르지. 고리타분한 도마뱀 새끼.”

소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놈이 말했다.

[재미없는 농담이구나.]

“그러니까 꼰대 새끼라는 소리 듣는···.”

[보아하니 동료들을 아끼는 것 같던데. 어디 그 숭고함의 한계를 알아볼까.]

그그그그극──

놈이 검을 들었다.

검끝이 느릿하게 그리는 호선을 따라, 하늘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듯 보인다.

그 안에 모여든 힘의 총량은, 말 그대로 산맥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

놈의 검이 드넓은 성기사단의 본단 전체와, 그 한가운데서 용 군세와 사투를 벌이는 동료들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순간.

“이런 시···.”

하늘에 구김살을 만들며 들어올려진 백검이, 마치 수련용 목검처럼 툭 하고 휘둘러졌고.

으지지━━━━━╋╋╋╋╋

도시가 반으로 갈라졌다.

***

쿠르르르.

머리 위 무너지는 소리. 툭툭 얼굴에 떨어지는 모래와 돌조각들.

시에나는 눈을 떴다. 그녀는 기침을 하며 목구멍 안쪽의 모래를 토해냈다.

“쿨럭! 쿨럭!”

살아있나?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

재빨리 몸 상태를 확인해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에 떠오른 건 어떻게였다.

‘먼저 하늘에 회오리가 생겼어. 그리고 나서 갑자기 용들이 강해졌고. 그 다음에는···.’

기억을 더듬어간 순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감정은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공포감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붉은 회오리 아래, 새하얀 검을 들고 느닷없이 나타난 소년.

천 마리의 용이 쏟아내는 주문도, 용 군세에 맞서 펼쳐낸 동료들의 영역도 그 존재감을 가릴 수는 없었다.

‘···용신.’

다섯 뿐인 종언의 선고자.

용들의 대지옥인 대룡전의 주인.

놈의 검끝에 모였던 힘은 산맥을 양단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한 번의 일격이 거대한 도시를 케이크처럼 가르고, 수백 미터 깊이에 있는 지하 유적의 속살까지 드러났으니까.

한낱 인간의 기준과 범주를 벗어난, 아니 설령 초월자라 하더라도 막아설 수 없는 강력한 권능.

허나 그녀의 기억 속 장면에는 분명 누군가가, 용신이 내리그은 검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댈런.”

콰르르륵!

마력을 끌어올려 머리 위를 가로막은 잔해를 밀어낸다.

날카로운 돌조각이 굴러떨어지며 팔다리에 생채기를 냈지만, 시에나는 개의치 않았다.

땅이 말 그대로 반으로 뚝 가른 검격이었다. 아무리 댈런이라고 해도 거기서 살아남기는 힘들 테였다.

“이렇게 끝날 수는··· 안 돼. 절대 안 돼.”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내의 지난 모습들.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최전선에 달려나가는 그의 등. 그러면서도 언제나 이 세상과 한 발짝 떨어진 듯한 눈빛.

떠날까 두려웠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사선을 몇 번이나 넘나들었어도, 여기서 그 선을 완전히 넘으면 안 됐다.

퍼벅! 콰르르르!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마력과 손을 놀린다. 파고 올라간 높이가 벌써 수 미터.

그때 희미한 빛이 잔해 사이로 새어들어왔다. 그녀의 주문이 아니었다.

[올라와라.]

귓가를 파고드는 한마디 전성.

꽈과과광!

몸이 붕 떠오르는 동시에, 머리 위를 가로막았던 잔해들이 순식간에 폭발하듯 날아갔다.

밝은 빛과 함께 얼굴에 부딪히는 맑은 공기. 시에나는 눈이 부셔 얼굴을 찌푸린 채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전의 언령은 익숙한 음색이었다.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들어본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목소리.

“···버번?”

[그래.]

녹갈색 눈의 용이 대답했다.

[계약을 이행하러 왔다. 깃털의 마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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