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59화 (259/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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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1)

“계약······.”

[그래. 네 선조, 초대 깃털의 마녀와 나눴던 계약 말이다.]

나직한 전성. 시에나는 미간을 좁히며 눈앞의 사내를 쳐다봤다.

버번의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갈색 머리칼은 뒤로 모아서 묶은 채였다. 바텐더 특유의 흰 셔츠와 바지는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다.

가게를 보는 중이었다면 드러내지 않았을 녹갈색 눈과, 마찬가지로 손님 앞에서는 열지 않았을 입 역시 그녀에게는 익숙한 특징들.

“···다르네.”

허나 시에나는 알 수 있었다.

용신의 일격으로 인해 입은 내상 탓에, 기감을 포함한 그녀의 감각은 평소처럼 작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달만에 눈앞에 나타난 이 사내가, 평소에 보던 바텐더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신체의 격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열세 대룡 중 하나인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의 진체라는 걸 말이다.

“···분신체라는 거, 정말이었구나.”

[그럼 거짓이겠느냐. 금강궁의 초월자들이 아무리 청동 구역에 무관심하다고 하나, 대룡의 본신이 대로를 버젓이 활보하게 둘 정도는 아니다. 아무리 내가 용신에게 찬동하지 않는 쪽이라 해도 말이지.]

오랜만이라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찌뿌둥하구나. 덧붙인 말에 시에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해보니 본체는 무슨 고대의 악인지 뭔지를 봉인하고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분명 대륙 서부의 칼날산맥 어딘가에, 수천 년 동안 악과 함께 잠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댈런에게 들은 적 있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 종언의 선고자들이 대륙의 외곽을 핥기 시작했음에, 내가 봉인해두고 있던 괴이가 하나 더해진다 해서 큰 차이가 있을까.]

“···주문쟁이처럼 말한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이제 댈런이 좀 이해가 가.”

[다섯 악신에 비하면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악이라는 소리다.]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걸 왜?”

[······.]

당황했는지 다물어지는 바텐더의 입. 시에나는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몇 걸음도 못 가 휘청거렸다. 뒤늦게 몸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 실감이 갔다.

“···윽.”

[무리하지 말아라.]

팔을 붙들고 부축하는 손길. 버번의 어깨는 단단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어깨가 이렇지 않았을까.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깨에 기댈 때가 아니었기에.

“···가야 해.”

시에나는 손길을 밀어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비틀.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시 움직인다. 무질서하게 쌓인 잔해더미 위로 손과 발을 모두 써가며 기어오른다.

용신의 검이 도시를 반으로 갈랐다는 건, 단순히 가위로 천 자르듯 깔끔하게 조각냈다는 게 아니다.

마치 부드러운 두부를 두꺼운 칼로 내리친 것처럼, 일대의 지면이 완전히 박살나고 뒤집어지는 대재앙.

땅이 속살을 드러내고 성벽이 비스킷처럼 바스라졌다. 지하 유적의 잔해가 부상해 지상의 부서진 건물들과 뒤섞였다.

용신의 일격은 적아마저 가리지 않았다. 잔해 사이에 뿔이며 비늘, 꼬리 따위는 뭉게진 용들의 부속품이었다.

“···댈런.”

본단과 그 주변 수십 킬로미터를 아우르는 파괴를 만들어낸 일격을, 정면에서 가감 없이 받아내고 무사할 사람이 있을까.

이 자리에 전쟁신이 강림한다면 가능하겠지. 그러나 댈런은 신이 아니었다.

그 행보가 고대 대전쟁 속의 영웅과 겹쳐보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가 봐온 댈런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었을 뿐.

[시에나. 진정하거라.]

“댈런은 신이 아니야. 그러니까 죽을 수 있어.”

[기감마저 꼬여놓고서 뭘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그 사내는 살아있다. 내 감각에 멀쩡하게 느껴지는구나.]

멈칫.

상처투성이 손발이 굳었다. 시에나의 시선을 마주한 용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내가 직접 집도한 용과 심장을 끼워맞춰주는 수술도 버틴 사내다. 이 정도에 쓰러질 리 없지.]

“···정말로?”

[그래. 나머지 일행들도 모두 무사하니 걱정 마라. 그 사내가 위력을 경감시켜준 덕분에, 간단한 몇 마디 언령만으로도 지킬 수 있었으니.]

“······하아.”

풀썩 주저앉는 몸. 검고 긴 머리에 흘러내리듯 뒤덮인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버번은 시에나의 곁을 지키듯 자리했다. 세로로 찢어진 녹갈색 눈이 조용히 폐허 너머를 응시했다.

고룡의 장대한 기감은 폐허가 된 도시 근방을 전부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이목이 집중된 곳은 생명이라고는 씨가 말라버린 도시 바깥, 두 진영이 마주한 강렬한 대척점이었다.

한쪽은 용신과 그 휘하의 살아남은 용 군단. 다른 한쪽은 홀로 우뚝 선 전사.

적창의 피와 청린의 심장, 지저룡의 골격을 품은 전사는 사실상 반쯤 용이었다.

‘적창이 소멸한 이래 수천 년 만의 갈등인가.’

말하자면 이건 용들의 내전이나 다름없었다.

수천 년 전 중립성을 버리고 한쪽 편을 택한 용 군단이, 종말을 앞두고서 다시 한 번 어느 쪽에 설 것인지 택하기 위한 전쟁.

어느 쪽이 이길 것인가.

관건은 용들에 대한 용신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어떻게 극복하냐겠지.

그건 수천 년 전, 용신의 탄생 당시 열세 대룡이 맺은 계약의 결과물이었다.

댈런의 혈관에도 적창의 피가 흐르는만큼, 간접적으로나마 그 제약에 구속될 수밖에 없을 터.

‘···모르겠군.’

용신의 첫 포효,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은 고개를 털었다.

승패를 점치기 힘든 싸움이었다. 애초에 그는 옳고 그름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의 옛 연인과 쏙 빼닮은 어린 마녀가, 천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

천 년도 더 묵은 계약으로 그녀의 생명을 손수 구해냈으니, 허무하게 스러져서야 안 될 터였다.

“···버번.”

쿠구구구구······!

그리고 새하얀 설산의 산봉우리가 지면을 알껍질처럼 뚫고 올라오는 한가운데, 어린 마녀가 입을 열었다.

“계약은 끝났지만···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나는 부탁은 듣지 않는다. 거래와 계약에 응할 뿐.]

“그럼 거래를 제안할게. 양쪽 모두에게 좋은 조건이야.”

용이 웃었다. 누굴 닮아 저리 당돌한지.

[어디 들어보도록 하지. 어린 마녀야.]

***

치이이이······.

온몸에서 뿌옇게 피어오르는 증기.

폭주하다시피 몸을 수복하는 용혈에 전신이 뜨끈하게 덥혀졌다.

“시발 존나 아프네.”

댈런은 핏덩이를 퉤 뱉었다. 신경이 수복되며 온몸이 욱신거렸다.

심장 뛰는 게 팔다리와 머리로 느껴지는 감각.

초인적인 육신을 얻게 된 이후 이런 감각을 느끼는 일은 드물었다. 종의 한계를 초월하고서야 말할 것도 없었고.

[과연 적창의 유지를 이어받은 자인가. 대룡 중에도 내 일검을 받아낼 자는 많지 않거늘.]

“······.”

[제대로 들리지 않는 건가. 감각보다 운동능력을 우선해서 회복하는 자세라니 감명깊구나. 무릇 용이라면 육신이 제대로 움직이는 한, 뒤떨어지는 육감으로도 어떻게든 적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어야지.]

소년이 즐거운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댈런은 무시하고 회복에 집중했다.

오감이 완전히 회복되자 그제야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창백한 피부 위로 형형색색의 무장을 둘둘 두른 모습.

폐허 위를 멤도는 건조한 바람이 잿빛 머리칼을 흩날렸다. 소년의 등뒤로 드리운 그림자들은 수백의 용이었다.

백검을 내리그은 일격에 절반 넘게 죽어버리고, 삼사백 정도만 살아남은 용 군단.

생존한 용들도 꼬리가 잘리거나 날개가 찢어지는 등 부상당한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정상적인 몰골이 거의 없을 정도.

“너네도 참 징하다. 꼴에 신이라고 그 지경이 되고도 따라다니는 거냐?”

[그 꼴이라니?]

“신이라는 작자가 자기 신도들을 아무 이유 없이 반 넘게 죽여버렸는데도 따르는 게 이해가 안 가서.”

[종은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뿐이다. 주인의 검에 죽는 것이야말로 참된 영광이 아니겠느냐.]

댈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중세랜드가 미개하다지만 나름 신이라는 작자까지 저럴 줄이야.

하긴 그러니까 악신 소리를 듣는 것일 테였다. 생각해보면 지구에서도 신 이름 외치며 칼 쑤시고 폭탄 던지는 놈들은 널렸었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주워섬기며 검을 고쳐쥐자 용신이 슬며시 웃었다. 놈이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구나. 허나 너 역시 그 질서에 복종해야 할 것이다.]

“뭔 개소리냐.”

[너는 적창의 피의 계승자이며, 좌완 갑주의 심장과 오른쪽 권갑의 뼈를 이식받았지. 대룡전의 계약에 의해, 네 심장과 피, 그리고 뼈는 나의 것이니라.]

쿠구구구···!!

대룡전의 계약이라는 그 단어가 울려퍼진 순간, 붉게 물든 하늘에서 기이한 힘이 내려찍힌다.

대기 자체가 살의를 품고 달려든다. 심장과 뼈, 혈관과 그 안에 멤도는 피를 쥐어짜려는 듯한 움직임.

뒤틀리는 마력의 흐름은 소년의 몸을 둥실 떠올렸다.

하얀 검을 든 채 양손을 넓게 펼치고, 댈런을 굽어보는 잿빛의 눈동자.

[대룡전의 하늘 아래 나는 유일무이한 신. 만룡의 자식이며 그들의 피와 의지를 이어받은 자. 용의 힘으로 용에게 대적하고자 한 네 발상은 칭찬받을 만하나, 그 힘 역시 나의···응?]

소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혹감이 선명하게 묻어나는 표정.

[어째서 네 힘이···어떻게 계약을 벗어났지? 그 육신 안에 흐르는 건 분명 적창의 피이거늘.]

“그런데?”

[대룡전이 강림한 이상 내 명에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분명 너는 조각조각 찢어졌어야 할 텐데! 어째서···!]

댈런은 말없이 검을 한 바퀴 돌렸다. 성검이 작게 울었다.

용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신위의 존재가 강림시킨 세계는, 영역의 완전개방과 달리 그림자가 아닌 완벽한 실체.

놈이 강림시킨 대룡전의 공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댈런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다만 성검에서 울려퍼지는 나직한 공명음이, 그 모든 살의를 가로막고 있었을 뿐.

[그 검···.]

“하늘의 힘을 다루기 위해, 지저에 사는 고룡의 뼈를 기초로 둘렀다고 했지.”

댈런은 검을 내밀었다.

“신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검이라던가. 내가 아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역작이다.”

***

성검의 날이 아래를 향해도록 뻗은 채,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어낸다.

저절로 떠오르는 성검에서 퍼져나오는 울림은, 각기 다른 세 가지 힘의 공명이었다.

드드드득───

지저룡의 권능이 대지를 속박하고.

휘이이이!!

북부 대륙을 지켜냈던 서릿바람이 하늘을 가린다.

우우웅······.

하늘과 땅을 뒤덮는 두 가지 힘을 경계로 삼아, 용신의 권능을 밀어내는 건 신성이었다.

북부에서 쑴과 싸울 때 몸에 부어졌던 활력.

북부의 전사신이자 성기사단의 전쟁신이라고 여겨지는 사내가 내리는 알 수 없는 힘.

웅웅웅웅―!!

마른 빵을 파고들듯 지면에 꽂힌 성검이 규칙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지평선 끝을 망라하는 공명에, 살기등등하던 대룡전의 압박이 씻은 듯이 날아갔다.

모든 용에게 강제력을 부여할 수 있는 용신의 힘이 일시적으로 무효화된 것.

자신의 권능 중 하나가 날아간 걸 자각한 용신이 비명처럼 외쳤다.

[불가능하다. 인간과 용의 마력이 어찌 하나될 수 있지? 애초에 전쟁신의 역겨운 권능이 대체 어떻게 그깟 기물에···!]

댈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잘 알지 못했다.

이 성검은 그가 아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지저룡의 부산물을 이용해 수복하고 강화한 역작.

한편 그가 아는 건 모니터 너머에서 키운 대장장이 캐릭터의 상태창 내역 뿐이었다.

능력치며 스킬이 무엇이고, 인벤토리와 창고에 쌓아둔 아이템은 무엇인지 따위의 정보들.

‘크하하하!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마치 다 죽어가는 노인처럼 이야기하는군. 인생을 두 번쯤 살아보기라도 한 건가?’

호탕한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스치고 사라진다.

거친 몸짓과 쩌렁쩌렁한 목청과 다르게, 마지막 인사조차 없이 떠났던 대장장이.

수십 수백의 용을 죽인 용살자가, 용신에게 무릎 꿇으며 느꼈을 절망은 얼마나 깊었을까.

또 영겁에 달하는 우물 속의 시간에서, 수만 정의 무구를 빚어내며 키워간 결의는 얼마나 높았을까.

“······.”

두 인생을 합쳐봐야 반 세기도 살지 못한 댈런에게, 그건 아마 평생을 지나도 깨달을 수 없는 감정이겠지.

허나 대장장이는 그를 신뢰해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유산을 계승한 자로서 해야 할 일은, 그가 마무리하지 못한 싸움을 대신 마무리짓는 것.

「영역 완전개방」

「설산에 내리쬔 시작의 빛」

쿠구구구구······!!

지축이 뒤흔들리고 땅이 갈라진다.

폐허가 된 본단을 뒤집고 솟아오른 건 수십 수백에 달하는 순백의 산봉우리들.

휘이이이이!!

산맥의 차디찬 바람이 대룡전의 열기와 부딪혔다.

옷자락이 사정없이 펄럭이는 가운데, 댈런은 르베론제 미스릴 창을 뽑아들었다.

자연스럽게 창에 휘감기는 검붉은 불길.

용신의 잿빛 눈을 마주보는 댈런의 눈동자는, 어느새 세로로 찢어진 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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