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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2)
별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두 용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한 순간, 본능적으로 둘 중 하나가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함을 알았으니까.
꽈꽝―!
지면이 으스러지고 양측의 신형이 사라진다. 일대에 수십 번씩 잔상처럼 번뜩이는 격검의 순간들.
쩌저저저저저─!
어지간한 동체시력으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첨예한 공방 뒤편에서, 용 군단이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날기 시작했다.
[――――!]
[――! ――!]
신의 검격 한 번에 수백의 동족이 갈려 나갔지만, 그런 것 따위 위대한 의지 앞에서 사소한 희생일 뿐이다.
수천 년간 따라온 대룡전의 주인은, 그들 모두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야 할 존재.
쐐애애애―!
[······?!]
허나 그들의 날갯짓은 전사에게 닿지 못했다.
언덕 저편을 까맣게 뒤덮고 날아온 무구의 폭우가, 절묘하게 그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
「용의 숨결이 흩어지는 대장간」
「만병지주(萬兵之主)」
쿠구구구구구!
만 단위의 무구가 창공을 수놓는다.
하나하나가 상등급 유물 무기에 필적하는 기물들. 최고의 대장장이가 셀 수 없는 시간을 거치며 쌓아올린 의념의 총아.
변칙적인 곡선과 직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화살들 사이, 묵빛의 기병창이 기이한 울림을 토하고.
녹옥빛 전격을 뿜어대는 태도가 벼락처럼 떨어지는 데 뒤이어, 새빨간 저주의 기운을 품은 철퇴가 핏방울을 흩뿌리며 달려든다.
뿌우우우―!
그 종심에 도열한 건 수십 가지 술식으로 보강된 갑주들이었다.
고위 사령술사만이 소환할 수 있다는 리빙 아머와 유사한 모습이지만, 그걸 아득히 상회하는 파괴력과 마력을 품은 존재들.
마치 살아있는 기사 마냥 각자의 무기를 꼬나쥔 채, 마갑 위에 올라타 쐐기진을 형성한다.
진격의 나팔 소리와 함께 밀려든 무구의 파도가, 대룡전의 힘을 업은 용 군세와 충돌한 건 순식간이었다.
투과과과─────!!
두 파도가 부딪혀 깨진다.
한쪽은 차가운 금속의 파도. 다른 한쪽은 뜨거운 피와 살점의 파도.
쏟아진 용숨결이 폐허가 된 대지를 거듭 녹였다가 결정화시키고, 그 위로 반쯤 녹은 무구와 온몸에 꿰인 용들이 쓰레기처럼 널브러진다.
깨진 금속과 용혈로 점철된 대지 위에서, 댈런과 용신의 검격이 번뜩였다.
스가각!
창대를 기울여 검끝을 흘려낸다. 성큼 다가오는 소년의 걸음. 내질러진 왼손 주먹.
허리춤을 훑어 도끼를 하늘 높이 던지고, 다가오는 주먹을 향해 손을 뻗는다.
갑주격투와 합투권의 묘리가 자연스레 녹아든 체술. 물 흐르듯 권격을 엮어내 옆으로 뿌리친다.
투확―!
“크···!”
술식갑주를 둘러 떨쳐냈음에도 마찰된 팔뚝이 얼얼하다. 붉게 찢겨나간 피부가 급속도로 재생되고, 그 틈을 노리고 다시금 짓쳐드는 백검의 첨단.
카가가가각!
찰나의 순간에 창검이 백 차례 가까이 얽힌다. 가까스로 창끝을 뿌리치고 거리를 벌린 순간, 용신의 머리 위 하늘에서 금속광이 번뜩였다.
두두두두두!
하늘 높이 던져올린 도끼가 벼락같이 내리꽂히며, 수백으로 늘어나 일대에 융단폭격을 가한 것.
용신이 선 근방을 모조리 초토화시키는 유물 도끼의 활약을 바라보며, 댈런은 너덜너덜해진 창을 곁눈질했다.
‘쯧.’
미스릴 창은 이미 반쯤 고물이었다.
전설적인 미스릴의 제련자, 르베론 아하킴의 손에서 만들어진 무구임에도 용신의 검을 견디기는 어려웠던 모양.
당연한 일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용신은 화신이 아닌 본체.
대지옥의 주인이자 종언의 선고자, 신위라 불리는 7위계의 악신이다.
댈런이 매번 창에 한가득 마력을 담지 않았다면, 진작에 가루로 부서졌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성검이 가장 좋은 무기겠지만···.’
지금은 쓸 수 없다.
댈루카힘의 손에서 다시 제련된 성검은, 용신이 가진 지배의 권능을 무력화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었으니까.
아공간의 유물 무기들 중에는 꽤 쓸만한 게 있을 테였다. 르베론제 미스릴 창만큼 내구도가 좋진 않겠지만, 부가 기능들로 커버하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겠지.
[신의 존안을 면전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있느냐?]
“······!”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용신의 검끝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댈런은 반사적으로 창을 들어 막았다.
으지━━━━━
단단한 섬유질이 으스러지는 듯한 굉음.
창이 반으로 부러지고, 남은 충격이 흉곽과 복부를 강타한다.
뻐어어엉!
허공에 붕 뜬 육신이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가 능선 아래쪽에 처박혔다.
움푹 내려앉은 갈비뼈. 뭉개진 내장에서 피가 왈칵 치솟는다.
“···쿨럭!”
[인정하노라. 네 무력은 분명 필멸자 중 최고일 테지. 오래도록 우리를 견제해온 금강궁의 초월자들 중에도, 네게 비견될 이는 없을 것이다.]
저벅. 저벅.
새하얀 눈밭 위로 찍히는 발걸음. 능선을 고작 몇 걸음 만에 등반한 소년은, 댈런이 처박힌 절벽 앞에 멈춰 섰다.
[네 세계는 강대하다. 수십의 근원을 품은 정경은 나조차도 본 적 없는 것이니까. 역천의 우물이 예언한 대로라면, 이는 수십의 평행세계에서 비롯된 결말의 파편들일 터.]
“······.”
[허나 그 정도로 신에게 필적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냐. 수십 수백의 근원을 품었다 한들, 너의 육신은 반신의 위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
소년이 웃었다. 여유로운 미소였다.
[대지옥 앞에서 네 심상은 여느 필멸의 영역들과 다를 바 없느니라. 너도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이야기야.]
***
쿠구구구구······!
하늘에서 팽팽하게 대치하던 두 파도의 균형추가 기울기 시작했다.
무구들의 성질을 파악한 용 군세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술식과 숨결을 위주로 무구들의 내구도 자체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
물론 그런 대처가 늦었더라도 우세를 점하기는 어려웠을 테였다.
대룡전의 힘이 더해진 용 군세는, 숫자가 줄어들었음에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으니까.
와지끈! 쿵!
우그러진 갑주가 하나둘씩 땅에 처박히기 시작한다. 부식되고 녹슨 창검이 그 옆에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예언의 주인공인 전사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박살난 갈비뼈와 내장이 진작에 회복되었지만,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그래. 압도적인 힘 앞에 굴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라.]
용신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는 검끝을 길게 늘어뜨린 채 전사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이대로 예언의 주인공을 죽이고 적창의 피를 돌려받는다. 저 몸뚱이를 낱낱이 해체하면 청린의 심장과 오른쪽 권갑의 잔여물 역시 회수할 수 있겠지.
용 군세 상당 부분을 잃은 손해는 그걸로 보충하고도 남을 테였다. 그러면 첫 포효를 포함해 미적거리던 다른 대룡들 역시 자신의 행보를 따르게 될 터.
어차피 종말은 피할 수 없는 결말. 용신에게 중요한 건 그 지분이었다.
‘예언의 주인공에게 고마워해야겠군. 내게 무릎 꿇기 전에 손수 경쟁자를 제거해주기까지 했으니.’
쑴과 테모므론이 예언의 주인공에게 한 차례씩 패퇴했으니, 사실상 남아있는 경쟁자는 둘뿐이었다.
머저리 같이 바다 건너에 거점을 잡은 라필렘과, 무슨 꿍꿍이속인지 한동안 조용한 에낙사구스만 처리하면···.
[음?]
댈런에게 다가가던 용신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언가 그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었다.
‘우으······.’
내려다보니 작고 반투명한 영체였다. 거무튀튀한 비석 아래쪽에서 기어나와, 작은 손으로 발뒤꿈치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어린아이.
굳이 발을 털어낼 필요조차 없는 유약한 영체였지만, 용신은 불쾌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저 거무튀튀한 비석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고?
“네 말이 맞다.”
[···뭐라?]
“나는 신도 영웅도 아니다. 한낱 인간일 뿐이지. 그것도 아주 평범한···아니, 오히려 한참이나 모자랐던 인간.”
용신은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던 전사가 다시 일어서 있었다.
“게임 중독이었던 삼십대 청년이었다. 친구는 물론 여자친구도 질려할 정도로 은둔형 외톨이였지.”
[······.]
“효도는커녕 부모님 얼굴도 일 년에 한 번 보기 망설였던 머저리였고, 겨우겨우 취직한 회사에서도 서서히 진급자 명단에서 밀리기 시작했었어.”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들.
용신은 애써 맥락을 파악하고자 했지만, 그 노력에도 시선이 끊임없이 분산됐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셀 수 없이 많은 비석들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설산 전체를 가득 채운 묘비들.
“내 게임 캐릭터들은 나와는 반대였지. 각자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 설령 그 방향이 잘못됐을지라도, 자포자기하고 주저앉았던 나와는 달리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 결과가 어떻게 나왔건 간에, 진정한 영웅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지.”
[···이것들.]
그즈음 용신의 동공이 조금 더 커졌다. 묘비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었다.
검은 묘비는 흑마법의 힘으로 빚어진 작품이었다.
고위 흑마법사가 본신의 마력을 떼어 하나하나 손수 다듬은 듯한 빛깔과 마감.
어지간한 경지의 사령술사라도 쉽사리 흉내 내기 어려운 섬세함.
그런 묘비가 수십만, 아니 수백만 이상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용신조차도,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흘려보내서 만든 정경일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
“그런 영웅들이 나한테 기대를 걸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 기대를 배신할 수 있을까.”
그런 묘비 중 하나를 쓰다듬으며, 댈런이 말을 맺었다.
“책임감 없는 인생은 한 번으로 족해. 두 번째 후회는 없다.”
「묘지에 퍼져나가는 위령의 메아리」
우우우우―!
설산 전체에 울려퍼지기 시작하는 귀곡성.
골짜기 안쪽에서부터 산봉우리까지, 구슬픈 가락의 합창이 메아리친다.
댈런은 묘비에 부드럽게 마력을 흘려넣었다. 그러자 눈밭 저 아래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더니,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건 갓 스물을 넘겼을까 싶은 청년 병사의 영체였다. 투구 아래에 맺힌 푸른 안광을 바라보며, 댈런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대도 듣고 있을 테지. 약속은 약속이니 죄 없는 영혼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으리다.”
‘우으으······.’
“허나 영겁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어진 그대의 참회가 마침내 끝맺어졌듯이, 이들에게도 생전의 지독한 미련을 털어버릴 기회는 주어져야 하는 법이오.”
‘우으. 우으으···!’
“눈앞에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영혼들이오. 죽어서라도 악마에게 칼침 한 번 박아봐야지.”
퍼벅! 퍽!
나직한 속삭임을 끝맺자마자, 산맥을 가득 채운 묘비들 밑에서 희뿌연 영체가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두 눈에서 푸른 귀화를 타올리며, 용신과 그 휘하의 용 군세를 노려보는 수십만의 원귀들.
[신위의 정경···불가능하다! 이건 너에게 허락된 풍경이 아니다. 네가 다스릴 수 있는 심상이 아니야!]
땅에서 솟구치는 원혼들을 본 용신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댈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령술사 댈룸 자이브의 영역은, 아직까지 그가 손에 넣고 주무를 수 없는 7위계의 정경.
허나 지금 그가 하는 일은, 수백만의 묘비 밑에 잠들어있는 영혼들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그들의 잠을 살며시 깨우고, 눈앞에 원한의 대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뿐.
비유하자면 마중물을 부은 것이겠지.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은 그의 통제 밖이었다.
우우우우!!
우어어어어······!
묘를 박차고 튀어나온 원혼들이 용신과 그 군세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용에게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을 잃은 영혼들.
희뿌연 영체의 파도가 사방에서 밀려든다. 하늘에서 벌어지던 접전의 판도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여전히 수천 정의 무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모든 장애물을 무시하고 들러붙는 수십만의 원혼들.
댈런은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세 인영이 다가섰다.
[사령술사에게 계승한 혼령들에게 그 원통함을 풀 기회를 주다니. 역시 내 사내는 지혜롭구나.]
“이 와중에도 헛소리요?”
[헛소리라니. 진심을 무시하면 안 되느니라.]
댈런은 피식 웃었다. 그러게 평소 언행에 주의했어야지.
슬슬 이 싸움을 마무리 지을 때였다. 당장은 압도하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영역을 개방할 수는 없는 법.
“알겠으니 그쯤하고···.”
[그러니···그러니 말이다, 댈런.]
그러나 고개를 돌린 순간, 댈런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세로로 찢어진 붉은 눈동자에는, 처음 보는 물기가 맺혀있었으니까.
검붉은 단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내게도 원한 갚을 기회를 주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