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64화 (264/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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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해월령(2)

미궁의 각 층계는 저마다 독특한 지형과 생태계를 가지고 있다.

숲과 늪지대, 동굴과 황무지가 뒤섞인 1층.

스스로 빛을 뿜어대는 모래로 뒤덮여 작열사막이라 불리는 2층.

미궁의 초입이라고 불리는 두 층을 통과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마경이 시작된다.

그 일례로 차르국 특무대의 의뢰를 받아 칼카스와 한판 붙었던 미궁 3층은, 진득한 늪에 원혼과 프로그맨이 가득한 지옥도였다.

‘4층부터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지지.’

암묵해월령(暗墨奚越嶺).

탐험가들에게 ‘미궁 속의 미궁’이라 불리는 곳.

첩첩산중의 고산지대는 빛 한 점 없는 어둠에 잠겨있고, 산자락과 계곡마다 오감과 육감을 혼란시키는 안개가 짙게 흐른다.

회사 근처 편의점도 네이버 지도를 켜고 찾아가던 댈런에게, 그런 복잡한 환경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 시절 길찾기를 능력치로 환산하면 4나 5정도 되려나.’

능력치가 성인 남성 평균을 10으로 잡는다는 걸 가정하면, 그야말로 어이가 없을 정도의 수치.

마흔여섯 번의 캐릭터 삭제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나마도 오랜 게임 경험과 철저한 사전조사, 그리고 신들린 컨트롤로 최대한 극복했기에 그 정도로 그친 것이겠지.

덕분에 댈런은 길을 달달 외운 건 물론이고, 주기별로 변하는 함정과 몹 배치 알고리즘까지 파악해냈다.

‘학창시절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의대는 따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아무튼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물론 게임으로 보던 세계와 실제로 마주한 세계는 규모부터가 다르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보면 중요한 특징들은 대부분 비슷할 터.

설령 조금 다른 점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겠지. 이 세계에 떨어지면서 입은 몸뚱이는 길치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혼자 미궁으로 내려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길을 아신다니 다행이군요. 저는 그럼 기사단 형제들과 합류해 팔시온에서 다음 전투를 대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에드거는 북쪽으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따라가려는 버번을 시에나가 불러세웠다.

“버번. 단장님을 잘 부탁해.”

[그러지.]

“차르국과 하이 오크 대족장에게 전달할 편지도 잊지 말고. 르베론 영감에게 줄 용 부산물들은 아공간 주머니에 잘 챙겼지?”

[다 챙겼으니 잔소리 좀 그만하거라. 여기가 까마귀 둥지도 아니거늘.]

쯧, 용을 전서구처럼 부려먹는 마녀라니. 투덜거리는 버번의 말에 일행이 피식 웃었다.

버번은 용의 모습으로 변해 에드거를 태우고 사라졌다.

두 사람을 떠나보낸 일행은, 초토화된 본단을 뒤로하고 균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 군단과의 싸움이 마무리된 지 고작 사흘. 거대한 계곡인 균열 곳곳에는 전투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있었다.

무너진 방어선과 요새. 곳곳에 널브러진 성기사와 성전사의 시체들.

시체의 몰골은 하나같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창칼에 찔려 죽는 일반적인 전쟁과 달리, 곱게 죽은 경우가 물어뜯기거나 용 발톱에 찢겨나간 것들.

숨결에 녹아내린 성전사. 용의 뿔에 꿰뚫린 성기사.

기수는 군마와 함께 얼어붙은 뒤 조각났고, 무너진 요새의 돌더미 위에는 피가 흘러 굳은 자국이 범벅이었다.

“······.”

“······.”

일행은 약속한 듯 침묵 속에서 나아갔다. 싸늘하게 풍겨오는 죽음의 냄새. 댈런은 습관적으로 갑옷과 무구를 습관처럼 점검했다.

휘이이······.

균열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바람. 검고 긴 머리칼이 시야 구석에서 살랑거렸다. 일행의 후미에서 함께 걷고 있는 시에나였다.

매력적인 긴 속눈썹. 오똑한 코와 당당한 눈빛.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고 사라지는 사이, 며칠 전 시에나가 그에게 전했던 소식이 떠올랐다.

‘엘프왕이 미궁도시에 정식으로 망명을 요청했어. 동부 기사왕국과 서부 길드 연맹도 미궁도시에 동맹을 제안했고.’

동부와 서부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미래를 몇 번이나 겪어본 댈런이 생각하기에, 그건 전쟁이라기보다는 영토를 포기하고 미궁도시에 합류할 준비였다.

‘전장이 좁아지고 있군.’

북부 전쟁으로 차르국은 쇠약해졌다. 제국은 아예 사분오열됐다.

만신전의 폭주를 보다 못한 몇몇 귀족들이 들고 일어난 것. 황제는 사실상 에낙사구스를 뒷배로 둔 만신전의 손에 떨어졌으니, 이 경우 반란이 일어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성기사단의 본단도 박살났고, 엘프들의 고향 역시 점령되었으니 멀쩡한 건 동방의 삼왕국과 서부의 길드 연맹 정도였다.

‘양쪽 다 그리 믿음직하진 않지.’

연맹의 실질적인 무력은 그저 작은 왕국 수준.

동방의 삼왕국은 라필렘의 공세를 제대로 버텨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무너진 남부와 북부. 위태로운 동부와 서부.

남은 건 중앙의 도시연합뿐이었다. 다행인 건 인류의 힘이 대륙의 중앙으로 결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차르국은 원래부터 도시 연합의 오랜 동맹 국가. 거기다 동부와 서부, 그리고 엘프들까지 합류했다.

남쪽에서는 에드거와 버번을 비롯한 성기사단의 잔여 병력이 올라가고 있었다.

본단의 병력이 미궁도시에 온전히 합류한다면, 인류 최후의 보루는 한층 더 단단해지겠지.

버번의 아공간에 보관된 대량의 용골과 용심장 역시, 미스릴 제련소를 통해 강력한 무구와 병기들로 재탄생할 것이었다.

‘그럼 남은 건 이쪽인가.’

댈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남은 일행을 둘러봤다.

버번과 에드거를 떠나보낸 뒤, 균열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 일행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악마 살해자, 미래의 검성, 시간선을 다루는 마법사들인 펠버 발렌티노와 토미 발렌티노.

깃털의 마녀, 청린용 아카샤, 외눈의 명공, 그리고 댈런 자신까지.

한 명 한 명이 종말을 맞이하는 세계에 누구보다 활약할 영웅들이다. 모니터 너머에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파티였다.

‘절대 불리한 싸움이 아니다.’

그들이 소원의 돌에 먼저 닿느냐, 악신들의 군세가 미궁도시를 먼저 무너뜨리느냐.

승산은 결코 낮지 않았다. 이미 악신 둘을 약화시키고, 하나는 소멸시킨 상황.

그때 저 앞에서 뭔가 부스럭거렸다. 무너진 성채의 잔해 더미 사이로 보이는 푸르죽죽한 피부. 뒤룩거리는 눈알과 점액질 손바닥.

쐐애―

자연스레 허리춤을 훑은 손끝에서 도끼가 날았다. 양손을 들고 펄쩍 뛰어나온 프로그맨이 입을 연 것과 동시였다.

“인간! 인간족! 게륵. 도움! 도와주···꽥!”

뒤로 휙 꺾인 개구리 머리가 돌바닥에 엎어졌다. 곁에서 수인을 맺던 시에나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거···우리 공격하려던 게 아닌 것 같은데?”

“······.”

“도움이라고 하지 않았어?”

댈런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시발, 개구리 새끼가 사람 말을 할 줄 알았나.

***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방.

밤하늘을 똑 떼어 수백 배 확대한 듯한 반구형 천장은, 느릿하지만 어지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음울한 청광과 정열적인 적광이 타오른다. 또렷하게 빛나는 별들과 이름 모를 기이한 천체들 사이, 불길한 색체의 어둠이 뱀처럼 스르르 흘러갔다.

“······.”

금강궁의 전령, 이누오코 토드는 천구를 가만히 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곳에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저 천구는 보기만 해도 머릿속이 울렁거렸다.

“스물여섯 전당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이 방을 숨겨둔 이유가 있다고 하죠.”

“···천변만화의 얼굴.”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는 그의 곁으로 금발의 청년이 다가왔다. 곱상한 귀족 인상의 얼굴. 에버론 라크탈라였다.

“평범한 사람이 이 천구를 올려다본다면 잠깐 사이에도 자아가 갈가리 찢겨나간다던가요.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림자 없이 나는 새.”

“그쪽이 전당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까요. 만날 기회가 없을 수밖에.”

“그야 외부 업무가 워낙 많아서요, 선배님.”

사무적인 미소를 머금은 에버론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토드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미궁도시 팔시온의 정점에 선 금강궁, 그중에도 수장급인 초월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스물여섯 전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토드와 에버론이 대표적이었다. 몇 번의 중대한 갈등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빈말로라도 썩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

“들떠 보이는군요. 원래도 진중한 면이 없긴 했지만, 최근 몇 년 들어서는 더더욱 그래보여요.”

“틀린 말씀이 아니라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담을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그쪽이 왜 여기에 있는지나 말씀해보세요.”

“선각자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먼 거리 오가느라 고생하셨고, 이만 쉬라고 하시더군요.”

토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게 끝이라고? 전쟁이 코앞이라고 했는데?

그가 다른 성기사단 병력과 함께 본단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본단은 용 군단에 함락 직전의 상태였다.

기사단장이 미끼를 자처해 시간을 끌겠다고 했지만, 수백에 달하는 용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

최대한 빨리 날아온 건 그 때문이었다. 오랜 동맹인 성기사단이 궤멸 직전의 상태였고, 설령 지원할 여력이 안 된다면 최소한 용 군단의 침공에라도 대비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보고 잘 들었고 휴식? 심지어 직접 말한 것도 아니고 새파란 애송이를 대리인으로?

토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 애송이가 하는 말을 믿는 것 자체가···.

[돌아가세요. 토드.]

천구를 아득하게 울리는 전성. 토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아무도 없던 드넓은 전당의 정중앙, 모든 별빛이 모이는 곳에 백발의 소녀가 서있었다.

“···선각자님.”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토드.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가 걱정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용 군단의 위협은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니요? 어떻게···.”

[말 그대로 사라졌어요. 그러니 이제 그대의 전당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세요.]

명백한 축객령. 토드는 입을 꾹 닫고 침묵하더니, 에버론을 잠깐 노려보고선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기척은 머지않아 천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둘만이 남게 된 천구 아래.

백발의 소녀는 피곤한 기색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에버론은 토드가 사라진 방향을 슬쩍 곁눈질하며 말했다.

“거참, 나보다 두 배는 더 산 양반이 뭐 저리 부드럽지가 못한지.”

[······.]

“고작 몇 번 의견 충돌 좀 있었다고 이리도 까칠하게 굴 것까지야. 볼 때마다 답답하지 않아, 할망구?”

[뻔뻔하기 이를 데 없군요. 그게 그쪽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 생각하나요?]

소녀가 말했다. 새하얀 눈동자가 에버론을 쏘아봤다.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더니···그 낯짝을 여기에 들이밀 줄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

[굳이 내 입으로 그쪽 정체를 까발려야겠나요? 운명과 역행의 악신이여.]

금발 청년이 싱그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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