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65화 (265/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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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해월령(3)

별들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천구 아래. 적막은 길지 않았다.

“그 눈빛···커헉!”

금발 청년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연 순간, 등뒤에서 날아온 창이 그의 등판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컥···키킥······!”

피를 컥컥 토하며 가슴팍을 뚫고나온 창대를 부여잡는 청년.

고통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도, 입가에 맺힌 미소는 지워지지 않는다.

곧이어 창 한 자루가 더 날아왔다. 이번에는 머리였다.

콰직―!

꿰이는 걸 넘어서서 수박처럼 박살나는 머리통. 두개골 파편이며 그 안의 붉고 흰 덩어리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할망구! 다치지는 않았어? 괜찮아?”

머리를 잃고 털썩 쓰러진 시체 뒤. 금발 청년이 소리치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느닷없이 분신체의 연결이 끊어져서, 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머리 잃은 시체를 창으로 연신 내려치는 청년.

그 얼굴은 조금 전 창에 맞고 박살난 시체의 얼굴과 묘하게 닮아있었다.

“이미 죽었어요, 에버론. 자기 분신체의 시신을 훼손하는 모습은 썩 보기 좋지 않네요.”

“하지만 에낙사구스가 빙의한 거 아니야? 그 새끼가 무슨 술수를 또 사용할 줄 알고···!”

“술수를 부리기에는 그쪽 분신체의 무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걸요. 수련을 게을리한 모양이에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소녀. 금발 청년, 에버론 라크탈라는 그 여유로운 태도에 미간을 구겼다.

“젠장. 별 일 아니었으면 괜히 혼자 설레발 쳤잖아. 난 또 할망구가 암살이라도 당할 뻔한 줄 알았다고. 안 그래도 분신체들 모으느라 정신없는데.”

“제 앞마당에서 암살당하기에는, 제가 에버론보다 월등하게 강한데요?”

“······.”

“알았어요. 장난이에요, 장난.”

말없이 창대에 묻은 피를 휙휙 털어내는 에버론. 그 얼굴에는 평소에 찾아보기 힘든 피로감이 잔뜩 녹아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륙의 정세는 나날이 악화되어갔고, 금강궁도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가문들을 움직여 전쟁을 준비하는 동시에, 초월자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했다.

에버론은 대륙 각지에 흩어진 분신체들을 한 곳에 모으는 동시에, 느닷없이 불어난 행정 업무에 파묻혀 사는 중이었다.

원래부터 맡은 업무가 많던 게 수십 배 불어난 상황이라, 문자 그대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

“어쨌든 내 실책이야. 내통자로 만들었던 흑마법사 분신체에 악신이 빙의하다니. 비록 에낙사구스를 섬기는 사교도이긴 했지만, 나름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이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소녀가 끄덕였다. 그녀는 천천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별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놈의 진체는 아직 성간옥좌에 남아있어요. 대륙에 진체가 강림하지 않은 채로, 저의 천구 아래 의식을 밀어넣을 정도의 권능이라···.”

앉은 자세 그대로 둥실 떠오르는 몸.

백발이 바람을 맞은 듯 질서 없이 흩날리고, 느릿하게 회전하던 천구가 조금씩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모종의 방법으로 놈의 힘이 더 커진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예견하지 못했던 변수가 또 발생한 것일까요?”

소녀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에버론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빠르게 회전하는 천구. 이해할 수 없는 궤적을 그려가는 별들.

소녀의 유리체 위로 천구의 기묘한 색채가 거듭 덧씌워졌다. 어둠과 밝음 사이에서 흰 눈동자가 섬광처럼 번뜩였다.

크게 숨을 들이쉰 뒤, 소녀의 전성이 울려퍼졌다.

[제국은 분열되었고, 만신전의 위상은 추락했습니다. 혈령의 제단은 부서졌으며, 혈귀에 종속되었던 거주민들은 저주받은 땅을 탈출하기 시작했어요.]

중후하게 공간을 잠식해가는 울림.

고저와 빠르기가 완벽하게 일정해, 마치 무생물 같이 느껴지는 목소리.

별들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운명의 강물을 굽어보는 알리아트의 백안.

과거와 현재를 읽어내고 시간선마저 주무르는 그 눈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분기점들을 내다보는 순간이었다.

[초대 깃털의 마녀가 용과 맺은 계약이 완성되었어요. 이름 잃은 고대의 화룡은 새로운 이름과 운명을 하사받았고요. 역병과 뒤틀림의 악신은 삼왕국을 향해 바다를 건너는 중이고, 미궁의 심층에서는 새로운 악이 모습을 드러냈···.]

전성이 뚝 끊겼다.

삽시간에 공동을 가득 메운 침묵.

에버론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예언의 현장에 몇 번이나 있던 그였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두 악신이 소멸했군요.]

“뭐?”

[쑴과 용신의 별이 빛을 잃었습니다.]

천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잘게 떨리는 입술.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녀의 눈이 연신 깜빡거렸다.

[악이 악을 잡아먹고, 무저갱에서 전에 없던 악이 올라옵니다. 대룡전은 소멸했어요. 용신의 목을 꺾은 건 댈런. 그 남자는 대체···.]

“······.”

[운명의 강물은 이미 겉잡을 수 없이 흘러넘쳤습니다. 범람하다못해 원래의 흐름을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털썩.

떠올랐던 소녀의 육신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흐트러진 채 우수수 내려앉는 백발. 한달음에 달려간 에버론이 쓰러지려는 그녀를 부축했다.

“하, 할망구···그럼 우리 망한 거야?”

“망하다뇨. 오히려 반대입니다.”

산발이 된 머리칼 사이로 소녀가 웃었다. 어린 외견에 어울리는 아이 같은 미소였다.

“미래가 닫혀있지 않아요. 종말은 더이상 필연이 아닙니다.”

“······.”

“이 대륙에 처음으로 희망이 생겼어요, 에버론.”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선각자가 말했다.

“전쟁을 준비하세요.”

***

마물이 말을 하게 되는 건 생각보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처음 미궁에 내려갔을 당시, 댈런이 해체해버렸던 놀 부족의 부족장도 어눌하게나마 인간의 공용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니까.

악신의 축복으로 급격하게 발전하는 지성은, 때로 평균적인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기도 하는 바.

그렇기에 난데없이 튀어나온 프로그맨이 도움을 요청한 사건보다는, 그 뒤에 숨겨진 맥락이 훨씬 중요했다.

“저희를 방심시켜서 함정일까요? 아니면 정말 도움을 원했던 걸까요?”

반으로 쪼개진 개구리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그걸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그, 댈런이 던진 도끼에 머리가 쪼개졌는데요?”

“뒈졌어도 입만 열게 만들면 되는 일 아니겠소?”

사령술 뒀다 어디에 써먹으려고. 댈런은 품속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사특한 기운이 일렁이는 붉은 단도. 고위 흑마법사들의 도구인 핏빛 제례용 단검이었다.

우직!

머리가 반쪽 난 시체에 제례용 단검을 꽂아넣는다.

핏빛 검신은 식어가는 육신에 박히자마자 탐욕스럽게 영혼을 먹어치우려 했다.

단검이 영혼을 흡수하려는 찰나, 댈런은 빈손으로 가볍게 수인을 맺었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검신으로 빨려들어가던 영혼이 끌려나와 형체를 갖췄다.

희뿌연 개구리 머리 인간의 모습. 프로그맨의 영체였다.

[게륵? 우그르르?]

“야.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다.”

[이, 인간!]

“그래. 네가 도움을 요청했던 인간···.”

[도끼! 번쩍! 배신···끄우아아악!]

촤르르르!

대답할 생각은 안하고 눈을 뒤집으며 괴성을 지르는 프로그맨. 그 순간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영체의 목을 칭칭 감았다.

서늘한 한기에 프로그맨이 입을 꾹 닫았다. 그때 아공간의 통로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뒈진 개구리 새끼가 함부로 입을 놀려? 주인님, 이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불사의 악마 아르보르였다.

떡덩이 같은 몸뚱이로 아공간 구멍을 낑낑거리며 기어나온 악마는, 영체를 사정없이 두들기며 심문하기 시작했다.

북부 전쟁 당시 악마의 정수 몇 개를 더 흡수했던 아르보르는, 칼카스의 사슬 외에도 기존에 나무의 권능이었던 힘을 몇 가지 더 회복했다.

대부분 물리적인 대상은 물론 영체에도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종류의 힘.

[당장 입을 열지 못해? 콱 저주로 절임해버린다!]

[게륵! 우르르르!]

이 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영체를, 땅딸막한 떡덩이 악마가 불덩이와 사슬 더미로 쥐어박는 광경.

댈런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의 곁으로 펠버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가왔다.

“언제부터 자네의 악마가 저렇게 능동적이기 시작했나?”

“···잘 모르겠군. 지저룡과 싸울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본디 악마가 아닌 존재라고 들었네만. 루시아는 저 악마가 신화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역천의 나무라고 하더군.”

밑동이 잘린 역천의 나무. 모든 세계선에 줄기를 뻗은 초월적인 존재라던가.

전쟁신인가 하는 양반은 꽤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말하던데, 그런 것치고 떡덩이 메치듯 사용한 걸 보면 곱게 다룰 필요는 없는 듯했다.

어쨌든 당장 급한 것도 아니니 차차 알아가면 될 일. 상념을 갈무리한 그는 허리춤에 메었던 도끼를 뽑아들었다.

“야. 거기까지 해라.”

[아, 아닙니다. 조금만 더 하면 불 것 같···.]

“대충 마무리해. 왜 도와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으니까.”

쿵······.

말이 끝나는 순간 들썩이는 땅. 일행의 고개가 동시에 휙 돌아갔다.

진동의 근원지는 미로처럼 갈라진 균열 저 안쪽이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걸 보아하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분명했고.

“댈런. 저것들···.”

“마물이오. 그것도 미궁 심층에 있어야 할 놈들.”

사실상 악마에 가까운 것들이지. 덧붙인 말에 루시아가 곧장 검을 뽑아들었다.

“···댈런, 미궁의 층계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폭탄을 주렁주렁 꺼내들며 비요른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미궁 심층에 있어야 할 놈들이 지상까지 올라오는 건, 수백 회차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댈런은 도끼자루로 옆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일단 처리하고 생각하지.”

***

쿵. 쿵. 쿵. 쿵.

지축을 흔드는 거친 진동. 점점 빨라지는 박자와 거세지는 울림.

뿌옇게 일어난 먼지구름이 계곡의 바닥을 가득 뒤덮고, 그 사이로 거대한 뿔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쿠오오오오―!

외양은 거대한 코뿔소와 비슷했다.

물론 그 크기부터가 평범한 코뿔소와는 천지 차이였다.

자그마치 수십 미터의 체고. 발걸음마다 지진 같은 울림을 빚어낼 정도로 육중한 질량.

세 갈래로 갈라진 뿔은 건물도 어렵지 않게 꿰뚫을 수준이었고, 몸뚱이 전체를 보랏빛 전격이 감싸고 번쩍였다.

‘대충 보라색 트리케라톱스라고 불렀던 마물이다. 미궁 5층에 내려가야 나오는 놈인데.’

미궁 심층의 마물들.

악마에 비견될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궁에 예속되어 벗어나는 일이 없는 존재.

뒤따라 오는 놈들도 하나같이 미궁 4층이나 5층에 서식하는, 악마에 필적하는 전투력을 가진 마물들이었다.

휘릭.

손 안에서 도끼를 한 바퀴 돌리고 달려나간다. 일단 풀려난 놈들은 막는 게 맞았다.

본단이 무너진 이상 놈들을 막을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이었다. 용신이 성기사단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균열의 위쪽을 보호하는 방벽도 일부 부서진 상황.

안 그래도 혼란스런 대륙의 정세에, 미궁 심층의 마물들이 난동까지 부리기 시작하면 답이 없는 일.

최소한 마지막 전쟁을 대비할 여유 정도는 벌어줘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물들의 전열을 비집고 거대한 실루엣이 훅 하고 튀어나왔다.

구오오오오!

코뿔소를 불쑥 앞질러 튀어나온 거체는 황소머리 거인이었다.

일견 흔한 미노타우로스처럼 보이나, 신장이 10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거인종.

놈이 도끼를 내리찍었다. 아름드리나무를 통째로 뽑아 만든 크기의 돌도끼였다.

쿠우우웅!

몸을 틀어 간발의 차이로 피해낸다. 땅을 후려친 충격에 붕 뜨는 육신.

도끼 궤적을 따라 휘몰아치는 바람의 와류에 몸을 맡기며, 한없이 늘여진 찰나의 시간 속에서 생각한다.

‘용신과 싸우며 얻은 건, 시체를 통해 계승한 능력치나 스킬만이 아니었다.’

대지옥과 영역이 충돌하는 전장.

세계와 세계가 부딪히는 동등한 조건의 싸움.

찰나를 가르는 수백 번의 공방 속에서, 눈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흘려보낸 게 대체 몇 번인가.

세 용의 힘을 덧입은 끝에 승리를 거머쥐긴 했지만,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연 놈을 이길 수 있었을까.

댈런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싸움에서 중요한 게, 단순히 영역의 넓이나 힘의 규모만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 날뛰는 육신과 심상의 잠재력을,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는 본신의 역량이라는 사실을.

타닷―

역류하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놈의 손목 위에 올라탄다. 잡생각을 떨쳐내며 곧장 팔뚝 위로 내달리는 발걸음.

이동기로 밥 먹듯이 사용해왔던 회명도, 허공을 원하는 대로 디딜 수 있는 답보도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정신은 온전히 육신에 집중한다. 마치 처음 이 대륙에 떨어져 비인간적인 몸뚱이를 손에 넣은 뒤, 무려 이 년간 적응해왔던 용병 시절과 같이.

스각!

팔에서 떨쳐내려는 왼손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고, 잘려나간 손가락 사이로 몸을 던져 통과시킨다.

그어어어어!

어느새 미노타우로스의 머리가 코앞이었다.

울부짖으며 들이받는 뿔을 피해 긴 수염을 잡아챈다. 그대로 그네처럼 몸을 튕기며 놈의 목 주변을 한바퀴 빙글 돌았다.

수염을 놓은 댈런이 자연스럽게 땅으로 내려앉은 순간, 머리 위에서 촥 하고 뿜어지는 검붉은 피보라.

둥글게 썰려나간 목이 뚝 하고 떨어지며, 십수 미터나 되는 미노타우로스의 거체가 주저앉았다.

쿠웅―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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