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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해월령(4)
쿵!
거대 코뿔소의 머리통이 떨어졌다.
몸통에서 떨어지고도 뒤룩거리는 눈알. 파직거리며 뿔을 휘감는 보랏빛 전격.
그우어어―
콰직!
백염을 두른 성검으로 두개골 안쪽을 한 번 더 휘젓고 나서야, 코뿔소의 눈에서 번뜩이는 광기가 사라졌다.
검을 뽑아낸 루시아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사체에서 물러났다.
“무슨 마물이 진룡 수준의 회복력을···.”
“회복력만이 아닐세. 이놈들 가죽의 단단함이며, 몸에 두른 원시 술식의 위력 모두 진룡에 크게 뒤지지 않아.”
벌겋게 달아오른 산탄총의 총열을 정비하며 비요른이 말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반적으로 마물이라 하면 프로그맨이나 놀, 기껏해야 트롤 따위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
허나 일행이 방금 쓰러뜨린 열 안팎의 마물들은, 흔한 트롤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다.
“환경이 완전히 다른 지상에서도 이 정도라면, 미궁 안에서는 대체 얼마나 포악한 괴물들이라는 소린지······.”
“미궁 심층에서 올라온 놈이니까. 거긴 지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곳이오.”
댈런은 머리가 잘려 나간 코뿔소의 몸뚱이를 이리저리 살피며 대답했다.
얼마 전의 전투로 이제는 멸종 위기종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진룡은 본래 홑몸으로 어지간한 크기의 도시를 불태우는 게 가능한 초월적인 존재다.
뿔 세 개 달린 거대 코뿔소는 그런 진룡과 정면에서 맞붙어도 크게 밀리지 않을 짐승이었다.
이런 포식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 그들이 거쳐 가야 할 미궁의 다섯 번째 층이었고.
“미궁 심층의 괴이들···그저 탐험가들 사이에 떠도는 전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헛소문만은 아니었군요.”
“그렇지. 중요한 건 이놈들이 왜 지상으로 올라왔느냐는 거요.”
본디 미궁 심층의 존재들이 지상으로 기어 나오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미궁은 각 층마다 생태계가 뚜렷하게 구분된 곳이었고, 심층에 있는 존재일수록 제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어했으니까.
“결계탑이 무너졌기 때문 아닐까요? 미궁도시의 대결계가 맡은 주요 역할이, 일정 수준 이상의 마물이 저층부로 올라올 수 없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토미 발렌티노가 조심스레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시에나와 펠버가 곧장 이견을 제시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결계의 영향 범위는 저층부 한정이니까. 3층부터는 그 영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해.”
“우리를 본단까지 데려다준 금강궁의 전령도 그러지 않았나. 결계탑이 무너졌다고 해서 대결계가 힘을 잃은 건 아니라고 말이야. 말 그대로 미궁을 오가는 입구만 닫힌 걸 테지.”
토미 이후에도 이런저런 추측이 오갔지만, 뚜렷한 정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코뿔소의 사체에 이어 거대 두꺼비의 뱃가죽 안쪽을 살피던 댈런이 손을 흔들었다.
“다들 이리 와보시오.”
***
그가 발견한 건 오래된 상흔이었다.
두꺼비의 뱃가죽 안쪽에 맺힌 검게 죽은 핏덩이와, 그보다 안쪽에서 썩어들어가는 위장과 창자.
“물리적인 타격. 거기다 5위계 이상의 의념과 저주까지 섞여 있소.”
“저주가 담긴 유물 병기를 착용한 무투가. 혹은 강력한 소환술식이나 조련술을 익힌 흑마법사일 확률이 높겠군.”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상처의 상태를 볼 때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부상당했을 당시에는 목숨까지도 위협할 수 있었을 법한 상처였다.
거대 두꺼비가 살아있을 동안에야 특유의 괴물 같은 재생력으로 무마했지만, 생명이 끊기자마자 순식간에 내장의 삼분의 일 가까이가 썩어들어갈 정도로 지독한 저주.
애초에 미궁 심층부의 대형 마물들은, 목이 잘리고서도 살아있을 정도로 끈질긴 회복력을 가진 생명체다.
그런 회복력으로도 피부와 가죽을 수복했을 뿐, 그 안쪽의 조직들은 여전히 괴사된 상태였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이놈만이 아니오. 코뿔소나 미노타우로스도 그렇고, 하나같이 얼마 전에 치명상을 입었더군.”
“전부 미궁 5층에 서식하는 마물들이군. 자기들끼리 물어뜯은 상처라기라고 볼 수는 없는 건가?”
“미궁 심층의 포식자들은 각자의 영역을 철저히 엄수하는 편이오. 지금처럼 공멸하지 않고 함께 지상으로 올라온 걸 봐도, 서로를 적대하지는 않는 것 같고.”
“···그러면 설마.”
침묵하던 시에나가 입을 열었다. 긴 설명 뒤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는지 살짝 굳은 표정.
“뭔가가 나타나서 이 마물들을 자기 영역에서 쫓아냈다는 이야기야?”
“아마도.”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펠버가 침음을 흘렸다.
“진룡에 버금가는 마물들을 몰아내는 위협이라. 짐작 가는 게 있나?”
펠버가 은근한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댈런을 회귀자 쯤으로 생각하는 그였으니 당연한 기대일지도 몰랐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새로운 대악마, 혹은 그 이상의 존재일 거라는 추측밖에 할 수 없군.”
댈런은 두꺼비 내장을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수백 회차를 플레이하며 오만 가지 상황을 다 겪어봤다고 자부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미궁 심층의 존재들이 위로 올라오다니. 원래라면 일어나서도, 일어날 수도 없는 일.
수백 년 동안 지켜왔을 자신의 영역을 포기하고 저층부로 올라왔다는 건, 최상위 포식자인 그들의 목숨에 위협을 느꼈다는 이야기였다.
‘대체 뭐가?’
악신은 아니었다.
용신은 죽었고 라필렘은 엘프들에게 정신이 팔렸다. 쑴과 테모므론은 그럴 여유조차 없을 게 분명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 에낙사구스. 놈이 한동안 잠잠했던 게 이 때문이었나?
‘···아니. 그놈이 직접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다기에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간교함의 대명사인 에낙사구스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바에야 시작조차 하지 않는 악신.
그럼 대악마인가? 하지만 대악마라고 해서 미궁의 심층을 제멋대로 활보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좁디좁은 지상의 통로로 빠져나온 게 열 마리쯤 된다는 건, 이미 미궁 저층부의 생태계는 이런 포식자들로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대악마가 심층 마물 한두 마리를 상대할 순 있다 쳐도, 그렇게 무더기로 몰아낼 수는 없었을 터.
‘알 수 없는 일이군.’
속에서 간질거리는 불안감. 댈런은 두꺼비 진액을 옷자락에 닦으며 일어섰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미궁 4층 암묵해월령을 통과해, 그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수밖에.
도끼를 허리띠에 꽂아 넣은 그가 말했다.
“서두르는 게 좋겠소.”
***
균열.
땅속으로 깊고 길게 형성되어, 그 끝에 이르러는 미궁까지 닿는 거대한 골짜기.
성기사단이 지키는 균열의 초입부와 달리,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 지형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든다.
10킬로미터가 넘는 까마득한 높이의 절벽. 수십 갈래로 나뉘었다 교차하는 골짜기와 동굴들.
골짜기의 깊이 탓에 햇빛은 거의 들지 않고, 도처에 둥지를 튼 마물들은 길 잃은 먹잇감을 노리고 침을 흘린다.
다행스럽게도 루시아의 말에 따르면, 목적지가 미궁인 이상 도중에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성기사단의 문헌에 따르면 미궁으로 내려가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에스트라 강 하류를 따라가는 거죠.”
에스트라 강은 지상에서 제국과 노리아 왕국을 가르는 국경선이었다.
중류에서 하류로 넘어가며 균열과 닿아, 거대한 폭포가 되어 균열 안으로 떨어지는 물길.
십수 킬로미터 높이의 폭포에서부터 시작되어 느릿하게 흐르는 강 하류는, 거미줄처럼 얽힌 균열 심부의 골짜기들을 관통해 미궁까지 흘러내려간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마물의 습격만 넘길 수 있다면, 미궁까지 내려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셈이었다.
“강을 따라 내려가려면 일단 배가 필요하겠군.”
성기사단 역시 필요하다면 균열 안쪽의 물길을 이용했기에, 배를 처음부터 만들 필요까지는 없었다.
일행은 에스트라 요새의 선착장에서 적당한 크기의 배를 찾아 수리했다.
키는 루시아와 파른이 번갈아 잡았다.
혹시나 균열 안쪽으로 파견 임무를 맡을 때를 대비해, 성기사들은 모두 기초적인 항해술을 익히는 게 필수였다.
하루에 두세 번씩 마물들이 배를 공격해왔지만, 당연하게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돌덩이를 던져대는 바위 트롤은 자기가 던진 돌무덤에 파묻혔고, 날개 달린 절벽 고블린은 부족 단위로 생애 마지막 비행을 맞이했으니까.
그렇게 며칠이 흐른 어느 밤이었다.
[···빛이 사라지고 있어요.]
갑판 위에서 밤바람를 쐬던 아카샤가 중얼거렸다.
낮에 다리 열두 개 달린 털복숭이 거미의 둥지를 불태운 날이었다.
“빛?”
[예, 비요른. 지상의 빛이 자취를 감춰갑니다.]
햇빛이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해는 이미 떨어진 지 오래였고, 달마저 흐릿하게 구름에 가려진 밤이었으니까.
설령 낮이었다고 해도 양쪽에 높게 솟은 절벽 탓에, 일조량은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일 테였다.
곁에서 도폭선을 정비하던 비요른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익숙한 냄새가 느껴지는군. 미궁의 공기야.”
그날 밤 이후 공기나 빛 같은 자연환경이 이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마력풍의 흐름 역시 이리저리 뒤틀렸다.
삭막하고 단조롭던 골짜기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절벽이 점점 넓어지더니 탁 트인 지평선으로 변했다. 드문드문 자라던 연꽃 등의 수생식물 대신, 이빨과 발톱 달린 식물이 수면 위로 고개를 뻐끔 내밀었다.
쿠르륵. 구륵.
뽀그르르···.
부글부글 기포가 끓어오르는 강물. 배 밑창에 끈적하게 들러붙는 부유물들.
유속은 노가 필요할 정도로 느려졌다.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찌르다 못해 마비시킬 무렵, 배가 질퍽한 뭍에 닿았다.
“미궁에 도착했소.”
수년 전 칼카스와 사교도들을 쓸어버렸던 곳.
미궁 3층, 바닥 없는 늪이었다.
***
찰박. 찰박.
가죽 부츠의 발목까지 올라오는 오수. 발끝에 채이는 정체불명의 썩은 진흙과 찌꺼기들.
‘빌어먹을 늪지대.’
댈런은 침을 모아 뱉으며 투덜거렸다.
온갖 것들이 썩어들어가며 풍기는 퀴퀴한 냄새. 미궁 3층의 악취는 그로서도 도통 적응할 수가 없는 악몽이었다.
일행이 배에서 내려 늪을 걷기 시작한 지 닷새째였다.
지난 닷새 동안 늪지는 점점 더 깊어지고, 악취 역시 갈수록 심해졌다.
초반 사흘쯤은 마른 땅을 밟아가며 이동할 수 있었다. 늪의 외곽은 수심이 깊지 않았고, 고지대는 축축했지만 물에 잠겨있지는 않았으니까.
나흘째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무리 높은 지형이라도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이었다.
차르국 특무대를 이끌고 도착했던 지점은 이미 한참 전에 넘어선 상태.
수심은 앞으로 이보다 더 깊어지면 깊어졌지, 얕아질 일은 없을 테였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보름쯤은 더 걸리려나. 댈런은 꿉꿉하게 떡이 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댈런.”
“뭐요.”
“저기 봐봐.”
시선이 반사적으로 손끝을 따라간다.
시에나가 가리긴 곳에는 이십여 구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잔뜩 녹슨 갑옷과 창칼로 무장한 탐험가의 시체들. 마법사와 사제로 보이는 인원도 몇 섞여 있었다.
“탐험가 파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