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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해월령(7)
부그르르르···!
용의 주둥이가 기포를 뿜었다.
둥실둥실 무리 짓는 공기 방울들 사이, 놈의 세 쌍 눈깔 한가운데는 투박한 막대기 하나가 비죽 솟아있었다.
도끼자루였다. 어찌나 깊이 박혔는지 날은 보이지 않고 자루만 반쯤 튀어나온 것.
[그으······.]
머리에 도끼 꽂은 충격에 고대룡이 여섯 개의 눈을 잠시 빙글거리며 방황했다. 물론 말 그대로 잠시뿐이었다.
미궁 심층의 마물, 그것도 진룡이었던 놈의 재생력은 도끼 한 자루에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이내 초점을 되찾은 세 쌍의 시선이, 용숨결에 휩쓸렸던 도끼의 주인을 향했다.
“역시 튼튼하네.”
[······!]
댈런은 갑옷에 붙은 불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그 역시 고대룡의 특징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오랜 기간 미궁 심층에서 둥지를 틀었던 탓인지, 고대룡의 몸뚱이는 허상과 물질 사이에 반쯤 걸친 무언가였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육신. 같은 용이라도 죽일 수 있는 극악의 저주를 품은 이빨.
미궁 호수의 물속에서도 타오르는 숨결을 뿜고, 진룡 특유의 재생력마저 그대로 가진 존재.
7위계 오른 흑마법사 캐릭터로 상대했을 때도, 눈앞의 고대룡은 꽤나 까다로운 적이었지.
그래도 다행인 점은 적어도 고통에 내성은 없다는 것 정도일까. 댈런은 도끼에 시선을 집중하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꾸드드드드―!
[끼에에에에에!]
호수에 쩌렁쩌렁 울리는 고통스런 비명. 순식간에 수백으로 늘어난 유물 도끼가 성화의 불티와 함께 이리저리 튀어올랐다.
머리통에 한가운데 꽂힌 채 분열한 도끼들은, 고대룡의 머리통 앞쪽을 말 그대로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금이 쩍쩍 간 두개골. 찢겨나가 휘날리는 가죽과 근육.
세 쌍 눈깔은 터져서 형체도 찾을 수 없었다. 머릿가죽이 통째로 날아간 고대룡의 두개골은 거무튀튀했다.
“대가리만 언데드냐?”
[그에···!]
뇌랑 뼈만 남은 두개골인데도 비명을 지르는 걸 보면 확실히 용은 용이었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박찼다.
구웅―!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시현상. 물이 순간적으로 압축되면서 일대가 파동처럼 일렁였다.
쐐애애애······!
댈런의 몸은 그 파동의 반대 방향으로 작살처럼 쏘아졌다. 물살이 뺨을 스치고 흩어진다. 뒤섞인 난류가 온몸을 밀어냈다.
물속에서 균형잡기는 원래 지상보다 어려운 법이다. 거기다 미궁 호수는 일반적인 물속 이상의 환경이었다.
몸뚱이에 부딪혀오는 온갖 종류의 침전물. 썩은물 자체의 끈적이는 점도.
한술 더 떠서 미궁의 이질적인 마력풍이 만들어낸, 규칙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난류에 가까운 물살의 흐름까지.
그 사이에서 몸을 움직인다는 건, 마치 폭풍 속에서 원하는 대로 날아다닌다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겠지.
물론 댈런의 입장에서야 온갖 고유 스킬들 중 한두 개만 꺼내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장애물.
그러나 댈런은 스킬을 쓰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단순한 스킬의 숙련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근육의 힘과 그걸 다루는 섬세함.
물결의 흐름과 신체의 상태를 읽어내는 예민함.
마력의 흐름을 제어하는 마력 감응력과 그 모든 걸 아우르는 지성.
스킬은 완성된 기술이지만 동시에 그 한계선 역시 뚜렷했다. 결국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초월적인 육신을 다루는 역량 그 자체였다.
어느새 세 자릿수에 가까워진 능력치들은, 그 하나하나가 물리법칙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권능이나 다름없는 바.
애초에 신과의 전투는 단순한 수치 싸움이 아니다.
수많은 영웅들이 남긴 가능성을 흡수해왔고, 그 다양함을 바탕으로 몇 번의 승리를 거듭해왔지만.
이제는 단순히 가능성을 이용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걸 온전히 자신만의 힘으로 체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시점.
능력치가 100에 가까워진 지금은, 마지막 회차의 캐릭터가 하던 기예도 흉내 낼 수 있겠지.
스륵―
흐르는 물살을 사뿐히 즈려밟는다.
물속에서 물을 딛고 움직인다는, 상식을 아득하게 벗어난 발상.
허나 스킬의 도움 없이도, 심상의 힘이 없더라도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능력치였다.
그리고 세 자릿수에 가까워진 능력치는, 이미 신비와 크게 다름없어진 수치.
촤자자자자······!
물살을 가르고 몸이 쏘아진다.
댈런의 발끝이 물속을 휘젓는 족족 가속을 더해냈다.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난류들 역시 이용했다. 원하는 방향의 흐름에는 몸을 맡기고, 거스르는 흐름은 조금씩 빗겨내는 식.
스킬 하나 쓰지 않았음에도 삽시간에 총알 이상으로 빨라졌다. 뻥 하고 충격파가 일어나며 댈런이 지나온 궤적에 파문을 남겼다.
다음 순간 댈런이 도달한 곳은 고대룡의 면전.
가까이에 오니 피비린내가 났다. 그새 재생된 눈 하나를 뒤룩 굴리는 용을 향해, 댈런은 말아쥔 주먹을 내뻗었다.
[네가 어째···끄엑!]
떠어어엉─!
***
주먹과 두개골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충격파.
순간적으로 거대한 진공 상태의 구가 만들어졌다가, 수압을 못 이기고 빠르게 우그러진다.
콰아아앙!!
다만 진공의 구가 구겨지는 것보다 댈런의 주먹이 조금 더 빨랐다. 다시 터진 충격파에 진공구가 재차 확장됐다.
또 한 번 물이 쏟아지고, 그보다 빠른 권격. 팔꿈치로 찍고 무릎으로 올려 차며, 고대룡의 집채만 한 두개골과 몸뚱이를 사정없이 두들긴다.
두두두두두─!!
그야말로 일방적인 난타였다.
눈알은 재생되는 대로 으스러지고, 가죽과 근육은 채 뒤덮이기도 전에 찢겨나간다.
용과 사람의 그림자는 호수 아래쪽으로 끝도 없이 떨어졌다.
그러면서 연이은 충격파가 둘 주변의 물을 싹 밀어내는 광경은, 멀리서 볼 때 마치 바다를 가르고 아래로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
이대로는 답이 없음을 직감한 고대룡이 뼈만 남은 주둥이를 열어 용언을 뱉었다.
모든 용에게 내려진 권능, 술식이었다.
[―――케엑! 켁!! 어, 어떻게!]
“뭔 어떻게냐, 새꺄.”
다만 용언을 끝맺지 못한 용은 주문 대신 괴성을 질렀다. 댈런은 피식 웃으며 휘둥그레진 눈알을 후려갈겼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댈런의 마력이 놈의 용언과 술식체계 자체에 훼방을 놓은 것.
용신과의 전투에서 버번과 잠시나마 일체화된 이후, 댈런은 용언과 그 주문에 직접 간섭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그건 마치 주문에 대해 숙달된 이후, 어지간한 마법사들의 주문은 시전되기도 전에 파훼할 수 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당연하게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노릇이겠지. 고대룡이 반쯤 으스러진 턱으로 외쳤다.
[저번에는···그륵! 이런 재주는 없었···갸아악!]
“저번은 지랄. 언제 봤다고 아는 척 블러핑이냐, 새꺄.”
콰앙!
댈런은 말아쥔 주먹으로 놈의 턱을 다시 후려쳤다. 용은 끅 하는 신음과 함께 저 아래로 추락했다.
댈런은 몸을 날려 놈을 따라잡으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어두컴컴하던 호수에 옅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바닥이 가까웠다는 증거였다. 정확히는 호수 아래쪽의 수면, 미궁 4층의 경계선이 코앞이라는 이야기.
그래도 수중보다는 안개 속에서 싸우는 게 더 낫지. 댈런은 그렇게 생각하며 도끼를 짧게 내리그었다.
촤악!
눈앞을 막고 있던 거대한 물의 벽이 쫙 갈라진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바람이 훅 스며들었다.
푸확―
수면을 가르고 뛰쳐나온 그의 눈에 보인 건 안개로 뒤덮인 첩첩산중이었다.
거꾸로 뒤집힌 거대한 호수 아래 놓인 미궁의 네 번째 층, 암묵해월령(暗墨奚越嶺).
수면으로부터 산꼭대기까지는 대략 수백 미터쯤 되는 높이였다. 댈런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인가아아안!]
먼저 호수에서 빠져나온 고대룡이 그에게 달려드는 중이었다. 기껏해야 수 초 사이에 수십 개의 마법진과 입에는 숨결까지 그러모은 상태.
몸뚱이도 곳곳이 부러지고 벗겨져 있었지만, 미궁 5층 문지기의 위용이 어디 가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수십의 마법진에서 주문이 빗발치는 순간, 댈런은 성검을 검집째 뽑아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박찬 그와 용 사이의 거리는 0으로 수렴했다.
***
쿠우우웅!!
골짜기 한가운데 처박힌 거체.
백 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거대한 용은 더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놈은 몸 곳곳이 뭉개지고 으스러진 채,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었다.
댈런은 이따금씩 꿈틀거리는 용을 내려다보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존나 질기네.”
[······.]
과정과 결과 모두 일방적이었지만, 댈런에게도 마냥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놈은 탐험가 파티를 몰살한 촉수아귀나, 균열에서 마주쳤던 뿔 세 개 달린 코뿔소보다도 강력한 놈이었으니까.
굳이 비교하자면 죽어버린 용신의 백검, 혹은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이 봉인하고 있던 고대의 괴물쯤 되는 존재겠지.
그런 놈을 두들겨 패되, 말할 수 있을 정도로는 살려놓아야 했다.
죽이는 것보다 죽이지 않고 이기는 게 더 어려운데, 그 대상이 질기디질긴 몸뚱이에 재생력까지 갖춘 놈이라니.
“야.”
[······.]
“대답 안 하냐?”
용은 주둥이만 꿈틀거릴 뿐이었다. 댈런은 혀를 쯧 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머리 조금 더 만져주는 정도면 입을 열겠지. 진룡의 재생력이면 머리뼈랑 뇌가 좀 다치더라도 말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테였다.
집채만 한 머리통 위로 올라간 댈런이 가만히 발을 들어올릴 때였다. 반쯤 재생된 눈을 파르르 떨던 고대룡이 마침내 주둥이를 열었다.
[너, 너는 대체 왜 위에서···.]
“뭐?”
[왜 위에서 나타난 거냐. 분명 미궁 아래에 있지 않았나! 우리를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쫓아내고서도, 그 사특한 저주로 우리를 지상으로 몰아내고서도 만족할 수 없었던 건가!]
댈런은 들어올렸던 발을 슬쩍 내렸다. 가만히 코를 긁적이던 그는 고대룡의 머리통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듣자 하니 아까부터 놈이 하던 소리가 뭔가 이상했다. 재생되어가는 눈 앞에 선 채 댈런이 재차 물었다.
“내가 아래에 있었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지?”
[시치미 떼지 마라, 무저갱을 떠돌던 존재여! 너는 우리를 사냥하러 몇 번이나 관문을 열어젖혔고, 마침내는 우리 전부를 사냥개로 삼아 지상으로 몰아내지 않았나!]
“······.”
[겨우 저주에서 벗어나 층계 사이의 호수에 몸을 숨겼거늘, 그걸 끝까지 따라와서 죽이려 들다니. 너는···어?]
부득부득 이를 갈던 용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막 여섯 개의 눈이 모두 회복된 참이었다.
세 쌍의 보랏빛 시선이 댈런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그 눈동자의 움직임은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같은 놈인 줄 알았는데···아니었구나?]
떨떠름하게 내뱉는 고대룡의 목소리. 댈런은 턱을 쓰다듬으며 놈의 말을 복기했다.
아무리 두들겨 맞았다고 한들, 진룡의 감각으로 아무 연관이 없는 두 존재를 혼동할 리는 없을 테다.
무저갱을 떠돌던 미지의 존재가 누구인지, 아무런 추측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댈런은 턱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성검 손잡이를 쥐었다.
아무래도 진솔한 대화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