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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해월령(8)
[악마···아니, 그건 악신이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고대룡이 말했다.
“악신?”
[그래. 악신. 무슨 생각인지 안다. 본디 다섯 악신은 미궁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지. 하지만 놈은 다르다.]
“자세히.”
댈런은 핏자국 흥건한 검집을 한 바퀴 휙 돌렸다. 용은 잠깐 움찔하더니 주둥이를 천천히 열었다. 못다 아문 상처가 터지며 검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놈은 무저갱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어. 하지만 온갖 비술과 무도를 뽐내더니, 머지않아 이 세계 자체를 자신의 힘으로 삼기 시작하더군.]
치익.
핏줄기가 떨어진 자리에서 거무튀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용의 터진 주둥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용혈의 독성이자 재생력이었다.
[그러니 말하자면···놈이야말로 이 미궁의 신이지.]
미궁의 신이라.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그가 알기로 미궁을 다스리는 지배자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다.
애초에 지옥이나 영역과는 달리 미궁은 누군가의 심상이 빚어낸 정경이 아니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댈런. 미궁은 환상세계와 현실의 경계에 반쯤 걸쳐진 교집합이니라. 제약된 물리법칙과 무한한 가능성이 뒤섞이며, 세계의 변두리를 타고 일어난 혼란스러운 소용돌이야.]
잠잠히 듣고있던 적창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댈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심상 너머 적창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고대룡은 그걸 자신을 향한 끄덕거림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놈은 자줏빛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놈은 미궁의 악신이었지. 때문에 놈이 우리의 보금자리인 유황바다에 쳐들어을 때, 우리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관문은 놈을 막지 못했지. 유황바다의 꺼지지 않는 불도 놈을 사를 수 없었고.]
상처 때문인지 고대룡의 발음은 중간중간 어눌했다. 불분명한 발음에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타박하거나 끼어들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는 중이었으니까.
[머지않아 놈은 무저갱을 지배한 데 이어 유황바다까지 손에 넣었지. 끝내 우리의 삼분의 일을 홀로 학살한 놈은, 살아남은 모두에게 저주를 걸었다.]
“저주?”
[그래. 지상으로 올라가, 모든 인간을 죽이라는 저주.]
댈런은 턱을 쓰다듬었다. 하는 짓만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악신이 맞긴 한데.
하지만 모름지기 악신이라 함은, 어디 동네 어귀에서 심심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건달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자릿세를 빙자해 노점상 돈이나 뜯으며 굴러다니는 그런 잡몹들과 달리, 악신은 엄연히 인류의 역사보다도 아득히 오래된 대지옥의 지배자들.
놈들은 말 그대로 엔딩 보스 같은 존재들이었다. 수백 회차에 걸친 되풀이에도 악신이 쓰러진 적은 있을지언정, 새롭게 등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리고 이번 회차의 경험상, 없던 이변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댈런,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저갱에 내려갔다 나오기라도 했느냐?]
‘그건 또 무슨 헛소리요.’
[솔직히 말해보거라. 네가 무슨 짓을 벌인 게 아니고서야, 새 악신이 등장하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올 리가 없잖느냐. 물론 저놈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인 하다만···아주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 터.]
적창이 미심쩍은 투로 이야기했다. 댈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물론 그 역시 추측되는 바가 따로 있기는 했다. 가본 적도 없는 무저갱에 그의 영향으로 뭔가 변수가 생겼다면, 사실상 가능한 경우의 수가 하나뿐이기도 했고.
[···나 역시 홀린 듯이 무리를 따라 올라가다가, 바닥 없는 늪에서 정신을 차리고 숨어들었지. 그랬기에 네 모습에 놀랐다.]
고대룡이 붓기가 가라앉은 주둥이를 우물거렸다. 주둥이 뿐 아니라 몸 곳곳에 난 다른 상처들도 어느새 거의 다 회복된 상태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착각인 줄 알았지만, 이제 보니 더 명확하군. 너에게서 흘러나오는 영혼의 결···분명 미궁의 악신에게서도 비슷한 결이 느껴졌어.]
“그런가?”
[그래. 분명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겠지. 그것만으로 되었다. 복수할 방법이 생긴 것이니까. 여기서 너를 죽이면 분명 그놈에게도 타격이 갈 테지···!]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용의 주둥이가 쩍 벌어지며 불길이 일렁거렸다.
활짝 펼친 날개가 산자락의 안개를 훅 몰아냈다. 수십 미터 떠오른 거체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자욱한 안개 바다 위로 솟구친 용의 자태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를 집어삼킬 악룡처럼 보였다.
악룡의 거무튀튀한 주둥이가 숨결을 뿜었다. 이야기를 늘어놓는 중간중간 용언을 숨겨서 읊은 결과물이었다.
━━━━━!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자줏빛 광선을 보며, 댈런은 무심코 시간이 조금 늘어났다고 생각했다.
물론 평소에도 그의 시간감각은 꾸준히 예민해져왔고, 근래 들어서는 전투 중이 아님에도 떨어지는 빗방울 속의 기포를 셀 수 있을 정도이긴 했다.
하지만 능력치를 따로 흡수하거나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 역량이 늘어난 건 처음이었다.
어째서일까. 용신과 싸우고 나서 얻은 깨달음 때문에? 최대한 가진 힘을 능숙하게 사용하려눈 수련 덕분에? 아니면 그냥 환상세계에 가까워져서?
응축된 숨결이 지척까지 다가올 즈음, 댈런은 사령술사로 놈을 사냥할 적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숨결 속성이 허무였지. 익숙하지 않은 공략 방식에 죽음의 기사만 삼백 마리쯤 잃었던가.
시답잖은 생각은 검을 내리그으며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무형의 직선이 자줏빛 숨결을 반으로 갈랐다.
[흐윽···!]
고대룡이 단말마의 전성을 내뱉었다. 비명이라기엔 작고, 신음이라기엔 큰 소음이었다.
이내 팍 하고 피가 튀며 놈의 두개골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 안의 내용물도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놈의 몸뚱이도 세로로 갈라졌다.
토막난 거체가 쿵 떨어지며 땅이 들썩였다. 댈런은 산비탈을 굴러 내려가는 관문 수호자의 육신을 보며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경험치 막대가 소폭 올라있었다. 말 그대로 조금뿐이었다.
***
용을 죽인 댈런은 곧바로 길을 나섰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암묵해월령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일행을 찾아내, 미궁 5층 유황바다로 내려가 관문에 다다르는 것.
그리고 새로운 악신이라는 놈을 찾아가, 그 정체를 확인한 뒤 지금 벌이고 있는 악신 짓거리를 막는 것.
사실 고대룡의 목격담을 들은 뒤, 새 악신의 정체 자체는 반쯤 확신한 상태였다. 댈런이 궁금한 건 놈이 벌이는 행패의 이유였다.
놈이 인간에게 원한 살 거리라도 있었나? 오히려 다른 악신들을 잡아 족쳤으면 족쳤지, 가만히 있는 지상의 인간들을?
‘알 수 없는 일이지.’
대장장이 댈루카힘이 수만 정의 무구를 찍어낼 거라고 누가 생각했으며, 사령술사 델룸 자이브가 자신이 죽인 피해자들의 추모비를 세울 줄 상상이나 했겠나.
결국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궁의 악신을 직접 만나봐야 했다.
그러려면 일행을 찾아 함께 암묵해월령을 빠져나가는 게 먼저였다.
어쩌면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악신과 마주칠 수도 있을 테였다. 고대룡의 말에 따르면 놈은 이미 5층과 6층을 점령했으니, 암묵해월령까지도 넘볼 지 모르는 일.
‘흑, 흐흑···.’
‘이래도 꼴에 아들···!’
‘대리님······.’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그마한 속삭임들에 댈런은 발걸음을 멈췄다.
상념에 잠긴 사이 주변 풍경이 꽤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나무 꼭대기까지 걸린 옅은 안개는 여전했다.
다만 보다 짙은 안개가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속삭임의 근원은 그 안개였다.
발목 어림과 나무 뿌리를 뒤덮은 축축함. 중간중간 줄기를 타고올라 휘감은 짙은 안개는 마치 뱀이나 촉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휘이이······.
느닷없이 바람이 불며 그 촉수들이 출렁거렸다. 그 순간 속삭임이 외침 수준으로 커졌다.
‘오빠는 왜 그렇게 비전이 없어!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아들. 연락 좀 부탁한다. 네 엄마가 많이 아파.’
‘이 대리, 자네 자꾸 그런 식으로 할 거야! 자네 때문에 부서가 다같이 고생해야겠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들이었다. 이제는 꿈에서도 잘 나오지 않아, 얼굴도 서서히 느낌만 남아가는 지구의 인연들.
안개 촉수가 흔들거릴 때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는 화를 냈고, 누군가는 울었다.
그렇게 목소리들이 주의를 끄는 사이 안개 너머에서는 나무들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산자락을 따라 난 길이 각도와 폭을 미묘하게 바꾸고, 이정표가 될 법한 바위가 천천히 굴러갔다.
댈런은 뚱한 표정으로 그걸 다 지켜보고 있었다. 별 건 아니고 그저 신기해서였다.
설정상 암묵해월령은 원래 이런 곳이었다. 들어온 이들의 아픈 기억을 헤집으며, 동시에 산 그 자체가 스스로 움직여 길을 잃게 만드는 극악의 미로.
게임에서는 캐릭터의 과거 설정과 플레이 행적에 따라 디버프가 주렁주렁 달렸던가. 어찌됐건 미궁에 내려오는 탐험가들을 대상으로는 그야말로 최적의 함정인 셈이었다.
탐험가 치고 살인 한 번 안 해본 사람 없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미궁 1층부터 이곳까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끊임없이 누적되어 왔을 테니까.
‘새꺄, 친구니까 내가 솔직하게 말한다. 그놈의 게임 좀···.’
“저쪽이군.”
댈런은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넓게 퍼뜨린 감각에 일행 중 하나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게임 좀 작작······.’
“비요른인가?”
‘······.’
걸음을 옮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댈런은 일행 중 둘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비요른과 시에나였다.
“댈런···물을 빠져나왔더니 숲이라니. 여긴 대체 무슨 지옥이란 말인가···쿨럭! 크흠!”
“한참을 찾았어. 당신만 갑자기 떨어지면 어쩌려는 거야?”
시에나는 숲 공포증 탓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난쟁이의 등을 두들겨주고 있었다. 댈런은 술통 듀오를 가만히 보다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을 본 시에나의 눈이 번뜩였다. 마녀의 손이 잽싸게 칼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딱 칼이 반쯤 뽑혔을 즈음, 그녀의 머리에는 짧은 막대기가 돋아나 있었다. 도끼였다.
“대, 댈런! 이게 무슨 짓···!”
“도플갱어요.”
파르르 떨며 난쟁이의 곁에 털썩 엎어진 마녀. 그 손에 반쯤 뽑힌 칼이 쥐어진 걸 본 비요른이 입을 꾹 닫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뽑아든 산탄총을 마녀에게 겨눈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댈런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말했다.
“이상하군. 원래 암묵해월령의 도플갱어는 실체 없는 환각이어야 할 텐데.”
“···화, 환각?”
“이거 위험할 수도 있겠소.”
우드득.
그때 시에나의 머리가 반바퀴 돌아갔다.
몸뚱이는 흙바닥에 엎어진 채 그대로, 미간에 도끼 꽂은 얼굴은 기괴한 각도로 댈런을 쳐다봤다.
“위험?”
시에나가 씩 웃었다.
산자락의 안개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