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71화 (27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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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1)

‘키히히.’

‘으히히히···.’

나무 사이로 메아리치는 웃음소리. 앙상한 손처럼 하늘거리는 안개 줄기들.

섬뜩한 미소를 머금은 마녀는 이내 스르르 일어났다. 머리에 도끼를 꽂은 채,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메달린 듯 흔들거리는 움직임이었다.

자신과 마주선 마녀의 모습을 보며 댈런은 뒷머리쯤을 긁적거렸다. 마녀의 얼굴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등을 돌리고 있기도 했다.

이거 어느 공포영화에서 본 장면 같은데. 반 바퀴 돌아간 머리통 앞에서 떠오르는 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모두가 그처럼 여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으···으으!”

사시나무처럼 떨던 비요른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댈런의 등뒤로 숨어들었다. 댈런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난쟁이의 검은 눈동자 안에 희뿌연 무언가가 휙휙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안개가 주는 환각 효과에 제대로 당한 것 같았다.

“때려서는 깨어나지 않을 거야. 외눈의 명공이 가진 어릴 적 트라우마는 그만큼 심각하니까.”

가짜 시에나가 말했다. 댈런은 뺨이라도 어루만져주려 들어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숲이라는 환경 안에서 그 트라우마는 극대화되곤 하지. 걱정 마. 목숨은 위험하지 않을 거니까.”

“지랄.”

손바닥으로 난쟁이의 뺨을 내려치는 대신, 댈런은 그걸 마녀 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마녀의 머리에 박혀있던 도끼가 휙 하고 돌아왔다.

“···끄엡!”

당연히 곱게 돌아온 건 아니었다. 깊이 박힌 도끼날이 빠지며 두개골 조각과 뇌수, 핏덩이가 함께 후두둑 쏟아졌다.

앞으로 휘청거리는 마녀를 보며 댈런은 도끼를 가볍게 털었다. 그가 말했다.

“사람 정신을 휘저어대는데 목숨이 어떻게 안 위험하냐.”

유령 기사의 면전에서 순은 입힌 산탄총을 갈기고, 악마의 목구멍에 폭탄을 쑤셔넣었던 난쟁이다.

아무리 숲과 물을 두려워한다 한들, 눈앞의 적에게까지 반응하지 못한다는 건 뭔가 단단히 잘못된 상태.

어렵게 생각할 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저주나 환각이라도 술자를 죽이면 해결되니까.

댈런이 도끼를 고쳐쥐자 안개에서 흘러나오던 웃음소리가 싹 그쳤다. 섬뜩한 정적 속, 가짜 시에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예상보다 너무 빨리 왔어.”

“······.”

“그래도 다행히야. 적어도 생각해뒀던 선물은 늦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으···.”

푸쉭 바람 빠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던져진 도끼가 이번에는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저항 없이 툭 떨어지는 마녀의 머리. 댈런은 그걸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올렸다.

피 묻은 도끼가 다시금 그의 손에 안착했다. 도끼를 짧게 털어낸 댈런은 난쟁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썩을.”

비요른은 사라지고 없었다.

앞을 돌아보니 마녀의 시체도 마찬가지로 사라진 상태였다.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에서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었다.

나무들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안개도 스르르 흩어졌다. 바위와 돌도, 바스락거리는 발밑의 흙도 모습을 감췄다.

탁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뭉그러진 배경은, 서서히 노랗고 하얀 빛깔들로 물들어갔다.

[자,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가짜 시에나의 웃음소리가 멤돌았다.

***

[···댈런, 이건 단순한 환각이 아니다.]

적창이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이건 단순한 환영이나 속임수가 아니었다.

댈런의 오감과 육감은 일개 술식에 당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뛰어났으니까.

아마도 미궁의 4층, 암묵해월령의 환경을 극단적으로 이용한 기예일 터.

그리고 본디 주인이 없는 미궁을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심층에서 깨어났다는 새로운 악신.’

뭉글거리던 주변의 풍경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간다. 어느새 그가 선 곳은 숲속이 아닌 거대한 전당이었다.

금박과 보석으로 치장된 벽과 기둥. 기사들이 양측에 도열할 수 있도록 길게 뻗은 새하얀 대리석 바닥.

그리고 그 모든 걸 내려다볼 수 있도록, 야트막한 계단 위에 세워진 황금을 부어 만든 커다란 왕좌.

“···기사왕의 알현실.”

숲이 사라지고 펼쳐진 건, 동부 기사왕국의 궁전 깊은 곳에 자리한 알현실이었다.

비록 이번 회차에는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지만, 모니터 너머에서는 제 집 드나들듯 했던 곳 중 하나.

그때 발밑에서 찰박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댈런은 시선을 조금 내렸다.

언제부터인지 중년의 남자가 그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남자에게는 이미 생기가 떠나간 채였다.

[누구인지 아느냐?]

“기사왕이오. 이름은 알란드.”

[기사왕? 동부에 있다는 기사왕국의 초인왕 말이냐?]

“맞소.”

피범벅이 된 채 떨어진 왕관이 아니더라도, 기사왕의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동부 기사왕국의 통치자이자, 본신의 능력 역시 5위계에 다다른 초월자.

일곱 기사단을 이끄는 수장인 동시에,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 ‘뒤랑달’의 주인.

17대 기사왕 알란드는 대부분의 회차에서 동쪽 바다를 건너오는 라필렘의 군세를 막아서는 주요 NPC 중 하나였으니까.

비록 완전히 막을 순 없어 시간을 지연시키는 정도였지만, 온갖 배신과 음모가 판치는 최후반부에는 꿋꿋하게 신념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영웅이라 불리기 충분했다.

이따금씩은 고향 땅을 포기하고 미궁도시의 방어전에 직접 합류해, 일선에서 악마 군세에 맞서 맹활약하기도 했었지.

[헌데 기사왕이 여기 죽어있다는 건···.]

적창이 말끝을 흐렸다. 댈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중요한 건 기사왕의 활약상 따위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왕국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알현실에서 왕이 죽었고, 그 코앞에서 피웅덩이에 발을 들인 게 자신이라는 사실.

“환각이든 환영이든 좆 됐다는 거지.”

도망칠 구석을 찾기에는 이미 늦었다. 알현실 밖은 이미 수백의 초인들이 진을 치고 포위한 상태였으니까.

댈런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뒤돌았다. 동시에 전당의 커다란 문이 박살나며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저, 전하!”

“저놈이다! 저놈이 전하를 시해했다!”

“미개한 야만인 새끼 주제에 은혜도 모르고! 사지를 자르고 화형에 처해라!”

염병. 댈런은 말없이 도끼를 고쳐쥐었다.

해명할 시간 따윈 없었다. 애초에 왕이 눈앞에서 죽어있는데 무슨 말인들 먹힐 리가 만무했고.

“죽어라!”

목줄기를 노리고 찔러오는 검. 시퍼런 날 위로 푸른 검기가 일렁거린다.

댈런은 옆으로 고개를 젖혀 검을 흘렸다. 아슬아슬하게 목표를 놓친 검이 머리칼 몇 가닥을 잘랐다.

“이놈···!”

찌른 자세 그대로 왼쪽으로 휘둘러 댈런의 목을 그으려는 기사. 댈런은 검날에 도끼를 걸었다.

힘을 조금 주자 검이 밀려났다. 그렇게 생긴 여유공간으로 묵직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커헉···!”

기사가 피를 토하며 나뒹군다. 우그러진 판금갑옷 사이로 치솟는 피. 보랏빛으로 물들며 경련하는 얼굴.

댈런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역시 일반적인 환각은 아니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공방을 주고받는 걸 넘어서서, 한 생명이 사그라드는 과정까지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놈은 초월자다. 조심스럽게 접근해!”

“나팔을 불어라! 사자 기사단에게 지원을 요청해!”

앞서 나섰던 기사가 쓰러지자 다른 기사들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졌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 허나 물러설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검기를 길게 뽑아낸 채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하는 기사들을 보며, 댈런은 죽은 기사의 검을 발끝으로 차올려 잡았다.

전당 밖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빠져나갈 시간이었다.

***

번뜩이는 창끝. 펄럭이는 깃발.

뿔나팔 소리가 높게 솟은 첨탑들 사이에 메아리치고, 수천의 말발굽이 기운차게 땅을 두드린다.

알현실의 포위망을 뚫고 나온 댈런을 맞이한 건,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기사단의 돌격이었다.

‘···사자 기사단.’

황금빛 검기와 사자의 머리를 형상화한 투구가 특징인 이들.

사자 기사단은 기사왕국의 일곱 기사단 중, 왕도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이었다.

화려한 금빛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대로를 빈틈없이 채우고 달려들었다. 뾰족한 랜스에 황금빛 기운이 흘러넘쳤다.

두두두두두···!!

댈런은 피하지 않았다. 격돌 직전의 순간 그가 손을 뻗었다.

싸움을 자각한 순간 기이하게 늘어나는 시간 감각. 앞으로 한 걸음을 떼며 랜스를 도끼로 빗겨낸다.

물 흐르듯 휘두른 검끝에 군마의 목이 뎅겅 잘렸다. 내디딘 발이 땅에 닿았을 때는 말 위의 기사도 반으로 잘린 뒤였다.

“단장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 다시 한 걸음.

쐐애―!

옆으로 움직이며 장창의 찌르기를 피한다. 투구 틈 사이로 분노에 찬 기사의 눈빛이 보였다.

분노는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검을 놓은 댈런이 기사의 장창을 빼앗아든 것이었다.

“무슨···크아아악!”

콰지지직!

장창을 크게 휘둘러 원을 그렸다. 덧씌워진 무형의 기운에 말이며 기사를 가리지 않고 죄다 찢겨나갔다.

그렇게 몇 번 휘두르자 창이 뚝 부러졌다. 돌격하던 기사들 역시 절반쯤이 죽어있었다.

댈런은 전진했다. 기사들 뒤에 달려오던 경비대가 일제히 쇠뇌를 발사했다. 도끼를 몇 번 휘둘러 전부 쳐낸 그가 발을 굴렀다.

대로 위쪽으로 붕 떠오른 신형. 경비대의 진형 한가운데 벼락이 떨어졌다.

콰드드드―!!

도끼를 긋는다. 검이 댕겅 부러졌다.

뒤돌며 팔꿈치로 찍는다. 금속 방패가 우그러졌다.

갑주가 찢겨져 종잇장처럼 날아가고, 주먹질 한 번에 투구가 폭발하며 내용물을 쏟아냈다.

댈런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받아낼 수 있는 경비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댈런에게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넣는 기사 역시 없었다.

금속과 살덩이가 함께 찢기고 으스러지는 현장. 피가 대로에 흘러넘치는 광경은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그 참혹한 광경에도 경비병과 기사들은 쉬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들의 눈은 공포에 질려있었지만, 몸은 전설 속 영웅처럼 용맹했다.

다리는 피칠갑을 한 전사를 향해 내달리고, 손은 꼬나쥔 무기를 한 번이라도 더 찌르거나 휘두른다.

마치 누군가가 이들의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광경.

상급 기사의 머리를 막 쪼갠 순간, 댈런은 고개를 휙 쳐들었다. 저 하늘 위쪽부터 공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주변 풍경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무뢰배가 길드장님을 감히!”

“자유 도시를 위하여!”

“덧셈도 할 줄 모르는 저 야만인을 죽여라!”

귓가를 찌르는 외침은 여전했다. 바뀐 건 그들이 소리치는 내용이었다.

댈런은 짧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잘 닦인 길을 중심으로 높게 솟은 고층건물. 발광석과 염색약을 아끼지 않고 갈아넣어, 현대 지구의 네온사인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간판들.

‘대륙 서부 길드 연맹의 수도, 자유도시 엘모라.’

본디 떠돌이 용병들과 호객행위에 열심인 상인들로 열기를 띄었을 길거리는, 이상할 정도로 분위기가 냉랭했다.

아마 뒤엎어진 가판대와 그걸 엄폐물 삼아 장전을 마친 수백 명의 쇠뇌수들 때문인 듯했다. 그들 뒤에 도열한 용병들과 도제 기사들도 한몫 하는 것 같았고.

댈런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곁에는 거인이 짓밟은 듯 반으로 으스러진, 황금과 고급 목재로 으리으리하게 치장된 마차가 있었다.

“···사, 살려주게. 내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제발······.”

마차 안에는 피투성이가 된 노년의 남자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길드장.”

“그, 그래. 맞네. 내가 상인 길드장이네! 금이야 내 계좌에 썩어넘쳐. 당장에라도 암호를 불러줄 수 있네. 그러니 제발······.”

뭉게진 손을 싹싹 문질러가며 비는 노인. 댈런은 미간을 문질렀다.

“놈이 길드장님을 위협한다! 전원 사격!”

그 손짓을 위협으로 인식했는지, 쇠뇌수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도끼가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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