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72화 (272/288)

272

회고(2)

타앙!

총구에서 불이 뿜어진다. 화염을 비집고 튀어나온 건 둥근 납탄이었다.

쏟아지는 빗방울을 부수며 심장을 노리고 날아드는 납탄. 댈런은 슬쩍 눈동자만 돌려 그 궤적을 확인했다.

직후 도끼가 번뜩였다.

깡―퍽!

쇳조각 부딪히는 소리와 둔탁한 피격음이 거의 동시에 울려퍼졌다.

휘두른 도끼에 납탄이 부스러지고, 그 도끼가 다시 날아가 사수의 머리에 틀어박힌 것.

댈런은 뻗은 손을 회수하면서 자연스레 옆구리로 찔러오는 창을 잡아챘다. 창을 찌르던 병사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큭!”

휘청이며 끌려오는 병사. 허나 어찌나 꽉 쥐었는지 끝내 창을 놓지는 않았다.

상관없었다. 그럼 병사까지 함께 휘두르면 그만이니까.

콰지지직!

사방으로 비산하는 갑옷 조각. 후두둑 떨어지는 살점과 핏방울.

장창과 거기 매달린 병사가 장정 이십여 명을 추가로 때려눕혔다. 댈런은 부러진 창을 툭 내려놓았다. 입안이 불쾌하게 짭짤했다.

꽈르르릉―!

하늘이 번쩍였다. 저 멀리 내리친 번개는 순간적으로 건물과 사람의 음영을 뒤집어 놓았다.

짧은 빛에 드러난 건 공포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며 무너진 건물들을 푹 적셨다. 깨진 판석 사이로 옅은 붉음이 강처럼 흘렀다.

“···괴물.”

“살인자! 악마!”

“황실의 앞잡이를 죽여라!”

횃불과 무기를 든 인파가 외쳤다. 겁 먹은 표정과는 상반되는 말과 행동들.

댈런은 말없이 도끼를 휘휘 돌렸다. 어차피 대답할 가치가 없는 외침들이었다.

‘이걸로 다섯 번째인가.’

댈런이 서 있는 곳은 제국 변방의 한 도시였다.

동부 기사왕국과 서부 길드 연맹을 지나, 벌써 다섯 번째 뒤바뀐 배경.

‘소도시 유르그란.’

고대의 잊힌 대주술이 파편으로 자리 잡은 장소.

그리고 경우에 따라 중후반부에 황실에 반기를 드는 도시.

마지막 회차의 캐릭터는 도시의 반란을 제압해서 제국에 보수를 받아 챙길 겸, 도시 전체를 제물 삼아 옛 대주술을 부활시켰었지.

오랜 기억은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발사!”

타다다다당!

건물 옥상에 자리 잡은 총병대가 일제사격을 가했다.

댈런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땅이 쿵 하고 뒤집어지며 수 미터 높이의 토사가 벽처럼 치솟았다.

“무스···커억!”

토사의 벽 너머에서 번뜩인 건 수십 줄기의 섬광.

흐릿한 달빛에 번뜩인 건 창, 검, 방패, 투구, 등등의 무구들이었다.

주인을 잃고 길가에 굴러다니던 무구들은, 흙더미를 뚫고 빗발치며 총병대가 자리 잡은 건물 상층부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쿠구구궁···!

무너지는 건물을 뒤로 한 댈런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섯 번 뒤바뀐 배경. 그때마다 피할 수 없이 자행된 전투와 학살.

쌓아 올린 시체는 족히 수만 구에 달했다. 당장 이곳 소도시 유르그란의 광장만 해도, 판석이 드러난 곳보다 시체에 덮인 면적이 더 많을 정도.

언젠가부터 그의 손은 무기질적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묵묵한 도살 속에서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롭게 탄생한 무저갱의 악신이, 어째서 그에게 이런 선물을 준비했는지를.

꽈르르릉―!

또 한 번 뒤집히는 음영. 하늘을 올려다보던 댈런의 눈썹이 무심코 꿈틀거렸다.

하늘 저 위쪽의 공기가 다시금 일렁이고 있었다. 충분한 죽음이 쌓였다고 생각해, 전장을 바꾸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짧은 순간, 댈런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전장이 뒤바뀌는 그 절묘한 틈. 기회는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했다.

괜히 지금까지 다섯 번의 전장을 거치면서, 묵묵히 환각에 놀아나준 게 아니다.

새로운 악신의 정체가 그가 생각하는 대로라면, 놈은 자신만큼이나 철저하게 상대의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을 터.

우웅―

수만 구의 시체를 쌓아가며 무기질적인 도끼질만을 반복해온 건, 그 경계심에 실낱같은 틈이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쌓아온 안배.

암월의 환상살해자를 품속에서 꺼내든 지금이야말로, 그 안배의 결실을 볼 시간이었다.

“탓숨.”

나직하게 읊은 시동어.

낮은 울림을 토하던 환상살해자가, 그 검신을 파르르 떨기 시작한다.

오래전 하이 오크의 성소로 가는 길에서, 주문살해자를 폭주시켜 결계를 부쉈던 것과 유사한 행위.

하이 오크를 돕던 시절에는 단순히 유물의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데 불과했으나, 고대 모래바람 왕조의 탄령(歎令)을 손에 넣은 지금은 다르다.

자고로 의지를 가진 존재는 스스로의 한계를 깨뜨릴 수 있는 법.

무구의 의지를 깨워 생령으로 일으킴으로써, 그 잠재력을 몇 배 이상으로 폭증시킬 수 있는 게 탄령의 진정한 힘이었으니까.

“룩스.”

키이이잉─!!

환상살해자의 검신이 물결처럼 요동치기 시작한다. 단순한 착시가 아니었다.

검을 구성하는 금속과 고대 문자들, 더 나아가 그 안에 새겨진 의지가 통째로 제 한계를 부수기 시작하는 것.

쩌저저적─

이내 끝부분부터 바스라진 단검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쏘아올려졌다. 하늘 저 위에서 일렁이며 바뀌기 시작하는 배경을 향해서였다.

지상에서 뻗어나간 빛줄기는 이내 먹구름 근처쯤에서 일렁이는 공기와 충돌했다.

그 순간 세상이 크게 울렁하고 뒤흔들렸다. 마치 뱃멀미를 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수년 만에 느껴보는 종류의 어지러움에 댈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주변 풍경은 다시 한 번 바뀌어있었다. 이번에는 환각이 아니었다.

나지막한 오두막과 그 주변의 공터, 그리고 공터 너머에 펼쳐진 암묵해월령의 빽빽한 안개숲.

오랜 싸움으로 찌뿌둥한 어깨를 돌리고 있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댈런?”

아까 목을 날려버렸던 마녀의 목소리였다.

***

“댈런, 정말 당신 맞아?”

시에나의 음색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까마귀 둥지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오르게 할 정도였다.

“만약 정말로 당신이라면, 뭐라도 좋으니 증거를 대봐.”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댈런을 향해 손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가 선 자리를 중심으로 깃털이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손가락 사이에서는 흑백의 마력이 이글거렸다.

“······.”

댈런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주변을 슥 둘러봤다. 경계심 품고 무기를 뽑아 든 건 시에나만이 아니었다.

루시아, 파른, 펠버와 토미, 비요른과 아카샤까지.

각자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여차하면 영역을 풀어낼 준비를 마친 건, 아마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도플갱어들의 시체 때문이겠지.

주문과 백염에 난도질당한 수십 구의 시체들은 하나같이 댈런을 제외한 일곱 명을 똑 닮아있었다.

방금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걸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만. 댈런이 맞네.”

팽팽한 긴장감을 깬 건 펠버었다. 지팡이를 내리고 마력을 누그러뜨리는 마법사의 행동에, 시에나가 긴 속눈썹을 꿈틀거리며 반문했다.

“어떻게 확신하시죠? 다른 도플갱어들도 겉모습이나 표층 마력은 동일했어요.”

“내 영혼은 댈런의 영혼과 묶여있네. 정말로 영혼까지 복사한 게 아니고서야, 용과 권속의 계약을 흉내 내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두 번째 어머님, 마법사의 말이 맞습니다. 아버지 외에 이토록 강인하고 드넓은 영혼의 그릇을 가진 존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세 번째 어머니의 존재도 확실하게 느껴지고요.”

“희미하게나마 신성이 깃들었군요. 댈런이 맞습니다.”

아카샤와 루시아까지 거들자, 시에나도 마력을 갈무리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물론 어딘가 살짝 불만인 듯한 표정은 여전했다.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듯 물었다.

“그럼 말해봐. 당신의 요리 실력은 어느 정도지?”

“···시발. 꼭 그딴 질문이어야 되는 거요?”

“정말로 당신 맞구나. 걱정했어.”

마녀의 얼굴이 푹 누그러졌다. 반대로 댈런은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고.

그 묘하게 뚱한 표정이 웃겼는지, 시에나와 루시아는 거의 동시에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댈런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썩을. 회수한 시체가 세 자릿수에 달하는데, 왜 요리 스킬 같은 건 한 번을 안 나오는 건지.

“어쨌든 마침내 다들 모였구만. 짧지만 긴 시간이었네. 환각이 어찌나 생생한지, 하마터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어.”

“그쪽은 무슨 환각이었소, 노인장?”

“내 젊을 적 과오들이었네. 소영역을 이루며 이미 극복해낸 과거였는데···암묵해월령의 환각 효과는 상상 이상이더구만. 자네는 어땠나?”

“···글쎄.”

수염을 쓰다듬으며 건넨 질문에, 댈런은 어깨를 으쓱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수만 명을 학살했다는 건 굳이 꺼내서 좋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악신이라는 놈이 노린 건 자신뿐인 듯했으니까.

“그래도 어찌저찌 출구까지 도착했군.”

일행이 모여있는 곳은 널찍한 공터였다.

고즈넉한 오두막을 중심으로 펼쳐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메마른 공터.

나무와 풀이 자라지 않아서인지, 공터 안쪽으로는 미궁 4층 전역에 깔린 짙은 안개 역시 스며들지 못했다.

마치 오두막 반경 오십여 미터를 기준으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딱 그어진 것만 같은 모양새.

이 오두막은 암묵해월령의 끝자락이자, 동시에 미궁 5층으로 내려가는 입구였다.

일행은 자연스레 오두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시에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암묵해월령의 도플갱어는 원래 실체가 없는 거 아니었나?”

[의외로 이런 곳에까지 해박하군. 역시 까마귀 둥지의 주인이야.]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오두막 문과 마주 보는 공터 저편, 빽빽한 암묵해월령의 안개숲 안쪽이었다.

“현시대의 탐험가들 중에는 4층에 닿은 이도 거의 없을 텐데···폴 아커만이 남긴 저서라도 공부한 건가? 내 세계선의 시에나에게 물어나 볼 걸 그랬어.”

쩍 하고 양쪽으로 갈라지는 안개의 바다.

그 사이로 걸어 나오는 건, 반쯤 헐벗은 거구의 남자였다.

쿵―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축이 흔들린다.

부그르르···.

걸어온 길을 따라 남은 발자국 너머로 새빨간 용암이 흘러넘쳤다.

손가락 사이로 줄기줄기 흘러넘치는 전격은 칠흑빛이었고, 두 눈동자에서는 푸른 기운이 귀화처럼 타오르는 모습.

얼마 전 맞서 싸웠던 용신과 비교해도, 사내에게서 새어 나오는 기운은 족히 배 이상 거대했다.

“댈런. 설마 저 사람···.”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육신을 억지로 붙잡아 세우며, 시에나가 더듬더듬 말했다.

댈런의 정체를 한없이 근접하게 추측한 그녀였기에, 눈앞의 사내가 누군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

“그래.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을 거요.”

남자의 체구 자체는 댈런과 비슷했다.

그는 찢어진 갑옷 사이로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한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가죽띠로 허리춤과 등 뒤에 도끼와 검, 방패를 걸어둔 채였다.

남들보다 머리 한 개 반쯤 큰 키와 덩치, 꿈틀거리며 흉터에 위압감을 더하는 바윗덩이 같은 근육들.

선 굵은 얼굴과 낮은 중저음의 음색, 검고 우묵한 눈은 쌍둥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댈라인.”

“오, 내 이름을 기억해주다니. 영광인걸.”

남자가 낮게 웃었다. 댈런은 놈의 웃음에서 희미한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어딘가 불완전한 듯, 갑옷 틈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잿빛의 일렁임도 연관이 있는 현상일까.

당장은 알 수 없는 일. 댈런은 상념을 흘려보내며 사내의 머리 위에 주르르 나열되는 문자들을 응시했다.

[무저갱에 떨어진 투신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마지막 회차의 결말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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