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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3)
극한의 잡캐.
마지막 회차의 캐릭터를 생성할 당시, 댈런이 계획했던 유일한 목표였다.
그건 수만 시간의 플레이타임, 수백 회차의 반복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이기도 했다.
궁사, 전사, 마법사, 사령술사, 무투가, 대장장이, 등등.
가지각색의 육성 루트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던 후반부 회차들이, 하나같이 넘어설 수 없는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던 탓.
‘한 가지 재능만 가지고서는 다섯 악신을 전부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
맨주먹으로 언덕을 날려버린 무투가는 쑴에게 무너졌다.
파멸궁전의 주인을 쓰러뜨린 전격술사 역시, 존재 자체로 신비의 집합체인 용신에게는 항거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살 한 발로 대악마들을 척살하던 궁사는 역병의 화살비를 흩뿌리는 라필렘을 이길 수 없었고.
신위에 닿은 사령술사마저 그 술식의 근원이 되는 테모므론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었다.
‘애초에 악신이 다섯이라는 건, 단순히 숫자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숫자의 개념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동네 불량배 패거리가 다섯 명이라고 해보자.
그래봐야 기껏해야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몽둥이나 쇠꼬챙이를 꼬나쥔 건달이 다섯이라는 소리다.
굳이 다섯 모두 상대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개중 하나만 골라서 흠씬 두들겨패면, 그 사이 다른 넷은 겁에 질려 혼비백산 달아날 테니까.
허나 탐험가 파티가 다섯 명이라면? 그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대방패에 갑옷을 갖춘 창병과 유연하게 움직이는 검사는 전위에 설 테고, 후위에서는 사수나 술사 등이 자유롭게 화력을 쏟아부을 터.
주문쟁이나 칼잡이를 하나씩 상대할 때의 난이도가 1이라면, 제대로 된 탐험가 파티를 상대하는 난이도는 못해도 10 이상이겠지.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악신들과의 전쟁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악신들은 제각기 특화된 권능과 맡은 역할이 다르지.’
단신의 투지와 무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쑴.
혈령이라는 매개체에 사령술의 권능을 더해 누구보다 빠르게 군단을 결집하는 테모므론.
끊임없이 변이하는 역병을 비처럼 쏟아붓는 라필렘과, 열세 대룡의 주인으로서 신비와 주문의 정점에 선 용신.
그리고 대륙 곳곳에 수천 년간 마수를 뻗어둔 채, 다른 악신들의 등뒤에 암약해 권모술수를 꾸미는 에낙사구스까지.
평소에는 자기들끼리 으르렁대며 물어뜯기 바쁜 악신들이지만, 대륙을 집어삼키는 일에서만큼은 언제 그랬냐는 듯 협력 관계로 돌아서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기묘한 동맹에 두들겨 맞기를 수백 회차.
하다하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사령술사 캐릭터까지 말아먹고 만 댈런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던 플레이 초창기의 판단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잡캐만 주구장창 키우던 게 초반 백 회차정도까지였나.’
그동안 회수한 시체들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검을 쓰는 마법사의 시체.
길을 잃은 길잡이의 시체.
실험체에게 먹힌 사냥꾼의 시체나 스튜가 된 현자의 시체, 남몰래 마녀를 흠모하던 이단심문관의 시체, 등등.
특별한 컨셉이나 정해진 육성 루트를 고집하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수집하고 경험을 축적하려던 초반 회차의 흔적들.
결과적으로 댈런은 한 바퀴를 크게 돈 끝에, 다시 처음의 방식으로 되돌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결과물은 전과 같지 않았다.
플레이 초반과는 달리 그에게는 수만 시간에 걸쳐 축적한 경험과 정보, 그리고 그 모든 요소를 손에 거머쥘 철저한 계획이 있었으니까.
[무저갱에 떨어진 투신의 시체]
- 무저갱에서 최후를 맞이한 투신의 시체다. 출생지조차 불분명한 전사이자 술사인 그는, 대륙 전역의 기연을 휩쓸며 순식간에 초월자의 위계를 넘어 신위에 닿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을 촉발하고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간 탓에 세간에는 여섯 번째 악신이 탄생했다고까지 알려졌으나, 결국 대지옥의 다섯 지배자와 사투를 벌인 끝에 미궁의 심층인 무저갱으로 떨어졌다.
허공에 주르르 글자들이 늘어졌다. 한글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자.
이제는 점점 흐릿해져가는 옛 고향을, 반쯤 강제로 떠올리게 만드는 기억의 촉매.
“어떤 기분이지?”
수백 시간의 플레이타임을 몇 줄로 요약한 알림창 아래에서, 그 수백 배에 달하는 인생을 직접 살아낸 장본인이 물음을 던졌다.
댈런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어깨를 슬쩍 풀었다. 긴장 때문인지 근육이 조금 굳어있었다.
“무슨 기분?”
“내다버린 결말일 뿐이며 한때의 오판이라고만 생각했던 과거가, 스스로 되살아나 제 발로 찾아온 기분 말이야.”
사내, 댈라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놀랍나? 아니면 두렵나? 혹시 후회도 하나? 책임감 따윈 느끼지 않겠지?”
“······.”
“말해봐. 책임감이라면 그건 무슨 책임감이지? 먼발치에서 학살한 수백만의 생명에 대한 죄책감? 그러고서도 한 세계를 구해내지 못한 무력감? 수십, 수백의 세계를 똑같이 멸망 속으로 몰아넣고서도 어깨에 짊어진 무게는 변하지 않는 건가?”
빠지직!
손가락 사이에서 검은 전격이 스파크처럼 튀어올랐다. 사내의 발밑에는 흘러넘친 용암이 작은 연못을 만드는 중이었다.
이글거리는 시선을 댈런에게 고정한 채, 반쯤 광인에 가까운 얼굴로 답을 재촉하는 질문들.
딱히 들을 가치는 없는 헛소리였다. 댈런은 한 귀로 흘려넘기며 아공간의 악마를 불렀다.
‘아르보르.’
[···예, 주인님?]
‘예전에 꿈속에서 세계와 세계 사이를 건너가던 기술. 이제 사용할 수 있나?’
***
[환상세계와 가까운 이곳이라면···이것저것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제한적으로 가능할 겁니다.]
떡덩이 같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아르보르가 말했다.
[제가 직접 함께 이동할 수는 없지만, 세계와 세계 사이를 잇는 통로 정도는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통로의 기반이 되는 문 자체는 직접 열어주셔야 하고, 세계 사이의 거리가 멀면 아공간에서 용심장 몇 개 정도 주워먹어야 하겠지만···.]
‘상관없다. 그러면 환상세계 말고 대륙으로 통로를 여는 것도 가능한가?’
[대륙이라면 어디···.]
‘미궁도시.’
인류 최후의 피난처이자, 대륙의 모든 전력이 집약되고 있는 보루.
댈런의 말을 들은 아르보르는 곧바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녀석이 말했다.
[미궁도시라면 훨씬 쉽죠. 거리도 가깝고, 결계탑의 술식이 연결 고리가 되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잘 됐군. 바로 준비해라.’
[옙, 주인님.]
아공간에서 재빠르게 술식진을 그리기 시작하는 아르보르.
불사의 악마라고 알려진 녀석은, 사실 원래부터 악마였던 건 아니다.
역천에 드리운 어두운 별나무.
환상세계의 한가운데 자리한 역천의 우물 뒤편에 자라나, 수많은 세계선에 그 가지를 뻗은 거대한 나무라던가.
북부 전투가 끝난 직후, 차리나를 만났던 꿈속에서 댈런은 그 잘려나간 밑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전쟁신이 아르보르를 떡덩이처럼 메치는 통에 그 능력도 일정 부분 알게 되었고.
‘사실상 세계수와 같은 존재였다지.’
세계와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
단순히 이 환상세계의 여러 정경들만이 아니라, 세계선 너머에도 닿는 게 가능한 존재.
얼핏 생각하기에는 신이나 다름없는 녀석이, 어쩌다가 에낙사구스의 손아귀에 떨어져 악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당장 중요한 건 그런 뒷배경이 아니라, 녀석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뿐.
“조금 덜컹거릴 거요.”
댈런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에나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뭐라고?”
“먼저 가서 기다리시오. 마무리하고 나도 돌아가지.”
“지금 그게 무슨 말···.”
시에나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가 뭐라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때 아공간에서 아르보르가 속삭였다.
[주인님, 준비됐습니다.]
‘그래.’
답을 듣자마자 품속에서 단검을 뽑아든다.
오래 전 흑마법사의 시체를 회수하며 얻었던, 핏빛 제례용 단검.
그동안 강대한 적과 싸우며 중간중간 영혼을 먹여준 덕에, 붉은 검신은 사특한 기운을 줄기줄기 흘려대고 있었다.
검을 역수로 쥔 채 허공에 내려찍고, 동시에 짤막한 영창을 읊는다.
“쎄 글램.”
쩌저저적―!
허공에 금이 쩍 가더니 거대한 통로가 열렸다.
[흐아아앗!]
촤르르르!!
동시에 아공간에서 쏟아진 아르보르의 사슬이, 거대한 통로의 귀퉁이를 휘감고 안쪽으로까지 뻗어들어갔다.
현실에 지옥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지옥문의 열쇠’ 술식.
그 원리는 지옥이 있는 환상세계와 대륙 사이에 간이 통로를 구축하는 것.
그동안 아르보르가 회복한 별나무의 힘이라면, 그 목적지를 대륙으로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지옥문 자체를 극한까지 비틀어야 가능한 기예였지만, 얼마 전 회수한 사령술사 댈룸 자이브의 경험과 기억 덕에 그 부분은 해결된 상황.
휘이이이······!
순식간에 안정을 찾은 통로 너머에서 거친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마력풍이었다.
[아버지, 이건 지상으로 향하는 문···.]
제일 먼저 눈치챈 건 아카샤였다. 댈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년의 뒷덜미를 잡아들었다.
“먼저 돌아가 있어라.”
[예? 아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로를 향해 던져버리는 손길.
소년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통로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영역 개방 : 닫힌 설산의 하늘」
동시에 일부분 개방된 영역의 산봉우리가, 나머지 일행을 사면째로 밀어붙여 통로 안쪽으로 날려버렸다.
문자 그대로 맨땅에서 깎아지른 산비탈이 솟아올라, 순식간에 그걸 딛고 선 사람들을 전부 이동시킨 것.
쿠구구구구─!!
“댈런? 댈런!”
“으아앗, 이게 무슨···!”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루시아. 놀라서 산탄총마저 놓쳐버린 비요른.
갑작스럽게 밀어붙이는 설산의 움직임에서 벗어나려 시도하지만, 펠버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황금빛 마력이 그들의 움직임을 가로막는다.
“미안하네, 친구들. 권속으로서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어.”
아르보르가 술식을 준비하는 동안, 댈런은 펠버에게도 일행을 묶어둘 영역의 전개를 명령해둔 것.
두 사람의 놀란 표정이 지나가고, 반응조차 하지 못한 토미와 파른의 모습 역시 거대한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
끝까지 평정을 유지한 건 시에나와 펠버뿐이었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마녀의 시선과, 노인의 씁쓸한 미소를 뒤로 한 채 댈런은 영역을 해제했다.
쿠구구궁······.
설산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지상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 역시 힘을 잃고 소멸했다.
암묵해월령의 안개숲 한가운데, 오두막을 중심으로 펼쳐진 공터는 방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
공터에 선 건 이제 두 사람뿐이었다.
안개숲 사이로 흐르는 적막함.
어딘가 비슷해보이는 두 사내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의외로군.”
먼저 입을 연 건 댈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