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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4)
“별나무를 회수해 그 힘을 회복시킨 것도 그렇고, 지옥문 술식을 그렇게까지 비트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사내가 목 언저리쯤을 긁적거렸다. 잠깐 침묵하던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가장 의외인 건, 네가 동료를 아낄 줄 안다는 사실이군.”
“날 무슨 사이코패스 새끼로 아나본데.”
댈런은 헛웃음을 흘리며 허리쯤에 손을 얹었다. 그걸 본 사내도 마찬가지로 허리띠에 손가락을 끼웠다.
“사이코패스? 그게 뭐지?”
“알 거 없다.”
“그리 좋은 뜻이 아니란 건 알겠군.”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두 남자 사이,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가볍게 땅을 툭툭 차는 발끝. 콧잔등을 긁적이는 손짓.
미세하게 기울이는 몸의 각도와 순간순간 머무는 시선의 방향까지.
큰 의미 없어보이는 동작과 자세가 공방에 최적화된 저변을 설계하고, 동시에 그걸 읽어내는 상대방을 견제한다.
검격이나 술식은커녕 주먹질 한 번 오가지 않았지만, 싸움은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쉽지 않겠군.’
뻐근한 손목을 슬슬 돌리며 댈런은 생각했다.
쌓아온 노력이나 과정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지금 본신의 능력과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이었으니까.
적창과 전쟁신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승리를 거머쥔 전격술사 댈타리온과도, 다시 맞붙는다면 확실하게 이길 수 있었다.
전투 없이 넘어간 사령술사 댈룸 자이브 역시, 설산을 가득 채웠던 위령비를 고려해도 충분히 승산을 점쳐볼 만했고.
허나 마지막 회차의 전사이자 술사 댈라인은, 그가 키워낸 가장 강력한 세 초월자 중에서도 단언컨대 독보적인 존재.
수백 회차에 걸쳐 육성한 캐릭터를 전부 데려온다 하더라도, 마지막 회차 하나를 이길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이길 수 있겠느냐?]
‘글쎄. 대충 반반쯤 되지 싶은데.’
적창의 걱정어린 물음에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없이 불리한 전장처럼 느껴지지만, 이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 댈라인과 동등한 눈높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 역시 용신의 진체와 싸우며 7위계의 자락을 맛봤던 바.
세 마리나 되는 대룡과 하나가 되는 합일의 감각은, 투신이라 불리는 마지막 회차에서도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더불어 사내의 갑옷 틈 사이로 내비치는 잿빛 일렁임 역시, 완전하게 이 세계에 녹아들지는 못했다는 증거일 터.
본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해야 할 시체가 실체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힘을 소모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그나저나 여기까지 동료들을 끌고 왔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
사내가 문득 물었다. 댈런은 짧게 답했다.
“관문 때문에.”
“아, 관문. 여러 사람이 통과해야 되는 고대 문짝 말이지? 관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길에 대충 부숴놨으니까.”
“······.”
“고마워하지는 않아도 돼. 어차피 네 선물을 준비하려면 암묵해월령까지 올라와야 했거든. 잘 받아봤잖아?”
사내가 강박적으로 목을 긁어대며 말했다. 무덤덤한 목소리는 묘한 광기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미궁도시가 안전할 거라는 판단은 조금 웃겼어. 그 도시가 무너지는 걸 수백 번은 봤을 텐데,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거기에 동료들을 몰아넣은 건가?”
파직. 파지짓!
긁적대는 손가락 사이로 튀는 검은 전격. 붉어진 목덜미 피부 위로 잿빛 그림자가 일렁였다.
댈런은 말없이 그 모습을 쳐다봤다. 지금 여기보다는 미궁도시가 더 안전할 것이고, 미궁도시 역시 동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따위 늘어놔봐야 큰 의미는 없을 테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사내는 이내 목을 긁적이던 손을 내렸다. 손바닥을 탁탁 털며 그가 말을 이었다.
“뭐, 잘 됐어. 나도 굳이 저들의 피를 손에 묻히고 싶지는 않았거든.”
“설득력이 없는데. 마물을 몰아서 미궁을 빠져나가려는 탐험가들을 모조리 학살하지 않았나?”
“그거야 어차피 죽을 놈들이었으니까. 거기다 내가 직접 죽인 것도 아니지 않나? 미궁에 내려올 생각이었으면 어떤 상황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를 철저하게 해뒀어야지. 고작 마물 따위에 당해서야.”
찰박.
사내가 자연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 가벼운 동작에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균형이 깨졌다.
“그럼 어디···.”
용암이 철퍽하고 튀어오르는 소리.
댈런을 가리키며 까딱이는 사내의 손가락.
“잘난 예언의 주인공께서는 얼마나 준비가 됐는지 확인해볼까?”
전조는 없었다.
손끝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갈라진 하늘.
「흑뢰(黑雷)」
지면의 안개를 싹 날리고 떨어지는 건, 아름드리나무보다 몇 배나 굵은 벼락 줄기였다.
반응하려는 순간 늦는다. 손아귀가 도끼를 움켜쥔 순간, 검은 전광은 이미 땅에 도달해 있었다.
“이런 씹···.”
콰지──┴─┬─┴┬─
사위가 검게 물들었다.
***
꽈광! 꽈르릉──!!
뇌성이 산자락에 울려퍼진다. 한 박자 늦은 메아리였다.
하늘을 쪼갠 천둥이 지상에 닿았을 무렵에는, 이미 수백 다발의 흑뢰가 댈런이 선 자리를 연달아 강타한 이후.
“뭐야. 시시하게. 고작 이걸로 끝난 건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내려다보며, 하늘을 딛고 선 댈라인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물론 흑뢰는 그가 가진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공격 수단 중 하나이긴 했다.
수백 다발을 일점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반 호흡도 안 되는 찰나.
검은 번개가 닿은 산자락은 덩어리째 날아가 버렸고, 그 범위 안에 포함되었던 오두막과 공터 역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한 채였다.
“······.”
마치 거대 괴수가 산을 한 입 베어문 듯한 광경. 괴수의 숨결 마냥 남은 자욱한 연기를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비죽 기울어있던 사내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가 말했다.
“나쁘지 않군.”
무언가 번쩍 하더니 연기가 갈라졌다. 새하얀 섬광. 도끼였다.
총알보다 빠르게 날아든 섬광은 곧이어 수백으로 갈라졌다.
사내도 손가락을 딱 튕겼다. 수백의 흑뢰가 지면으로 떨어졌다. 그 사선의 끝은 하늘로 날아드는 도끼들이었다.
쩌━━━━!!
수백의 섬광과 수백의 낙뢰가 격돌한다.
연쇄적인 폭발이 줄지어 일어나는 광경은, 마치 하늘과 땅 사이에 검붉은 벽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신성력과 뇌전이 충돌하며 흑백의 음영을 뒤엎고, 도끼가 깨지며 터져나온 마력의 불길이 낼름거리며 허공을 핥아댄다.
“으하하! 루크부하임의 거병 도끼! 한때 나도 애용했던 물건이지. 헌데 어쩌나? 고작 도끼 투척 한 번에 박살나 버렸는걸!”
검붉은 폭염의 벽을 내려다보며 댈라인이 소리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쐐애애애―!
대신 돌아온 건 벽을 뚫고 솟구치는 수백 정의 무구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악마라도 썰어죽일 유물 병기. 거병 도끼와 마찬가지로 궤짝 단위 금화의 값어치를 하는 물건들.
“웃기는군! 미궁도시의 경매장을 매수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숨겨진 지저룡의 용굴이라도 털었어?”
번쩍이는 창검과 화살비가 품은 마력이 댈라인의 눈마저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물론 잠시뿐이었다.
전사이자 술사인 그의 굳은살 박힌 손가락은 익숙하게 변주를 자아냈다.
그러자 이내 검은 전격이 거대한 화망을 펼쳤다.
「흑뢰(黑雷)」
「무명답인(無明答刃)」
───두두두두두!!
내리꽂는 검은 벼락의 폭우.
솟구치는 유물 병기의 파도가 검은 전격의 폭풍에 휘말리며, 서로를 깨뜨리고 집어삼켜 장대한 폭발을 자아낸다.
꽈과과과······!!!
암묵해월령의 창공은 알록달록한 탁색의 화구로 물들어갔다.
그 열기에 높게 솟은 산봉우리 몇은 위쪽부터 증발하고, 능선을 빈틈없이 뒤덮고 있던 안개는 죄다 날아가 앙상하게 죽은 숲이 맨살을 드러낼 지경.
“후우···!”
미궁의 한 층계가 초토화되어가는 싸움터의 밑바닥. 댈런은 골짜기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비검의 묘리에 아르보르의 도움까지 받아 아공간에 쌓아둔 무기를 끊임없이 쏘아올리고 있지만, 흑뢰의 폭우를 완전히 막아내기에는 화력이 부족한 바.
[댈런! 조심하거라!]
유물 무구의 탄막을 뚫고 들어온 흑뢰.
댈런의 걸음을 예견한 듯 내리꽂는 번개의 궤적을, 가까스로 곡예하듯 상반신을 틀어내 피해낸다.
치지━┻┳━━┳
검은 번개가 가슴팍 바로 앞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 여파만으로도 유물 갑주가 파삭 바스라지며, 강철보다 단단한 피부가 열기에 타들어가 검게 그을렸다.
꽈과──!
직후 벼락을 대신 맞은 바윗덩이가 폭발하면서 직경 백 미터가 넘는 구덩이가 펼쳐지고, 한 걸음 뒤늦게 들려오는 뇌성.
꽈르르릉!
[댈런, 무슨 생각이냐! 당장 영역을 개방하지 않고서···!]
심상 너머 적창이 소리쳤다. 댈런은 곧장 방향을 바꿔 내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정면승부에서 이길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상대의 허를 찌르는 단 한 번의 수.
초월자 간의 전투는 수 싸움인 동시에 흐름 싸움이기도 하다.
결국 얼마나 철저하게 패를 숨기느냐 역시, 결정적인 순간 상대의 예상을 깨뜨리고 흐름을 빼앗아와 승산을 높이기 위한 방책.
그리고 마지막 회차의 캐릭터를 상대로 하는 싸움 한정으로, 댈런은 그 흐름을 가져오기 가장 완벽한 기회를 알고 있었다.
당장 화력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섣불리 영역을 내보일 수는 없는 이유였다.
‘···아직이다.’
꽈릉―!
정수리 위에서부터 내리찍는 벼락을 몸을 굴려 피한다.
한 바퀴 돌아가는 시계 저편, 저 하늘 위쪽에서 댈라인이 얼굴을 구기는 게 보였다.
“쥐새끼 같으니라고. 수백에 달하는 세계의 종결을 모아온 결과물이 고작 이딴 잔재주더냐!”
놈이 처음으로 발을 움직였다. 앞으로 내뻗는 왼발.
가죽 부츠의 밑창부터 발목까지 붉게 물든다. 끓는 용암 같은 색채였다.
「홍염신보(紅焰神步)」
「술식갑주 : 분하갑(噴河甲)」
투콰아아아앙!
하늘에서 내리찍은 발걸음이, 수백 미터 아래의 지면에 거대한 발자국을 새겨낸다.
길이만 백여 미터, 폭 수십 미터에 달하는 새빨간 용암의 고랑.
쿠구구구구···!!
공간째로 으스러진 대기가 진공 상태가 되어, 발자국을 중심으로 주변의 공기를 죄다 빨아들였다.
직후 응축된 열기가 폭발함과 동시에, 과도하게 삼켰던 공기를 다시금 토해내며 사방 지경을 열풍으로 쓸어버렸다.
댈런은 폭풍의 범위에 없었다. 댈라인이 발을 찍어누르는 동시에 수류의 갑옷으로 열기를 무마시켜 시간을 번 뒤, 곧바로 한참 떨어진 곳 몸을 옮겼기 때문.
댈라인의 시선이 그의 신형을 쫓았다. 놈이 소리쳤다.
“술식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공능으로 펼친다는 게 고작 그딴 갑옷···!”
말을 맺기도 전에 뻗어내는 왼손. 수인이나 영창은 없었다.
과정마저 생략한 채 지면에 날인된 거대한 마법진은, 곧바로 댈런을 중심으로 공간을 동결시키기 시작.
「편리박류(偏籬縛流)」
「회명(回冥)」
허나 댈런의 신형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진 뒤였다. 댈라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글쎄다.”
벌겋게 충혈된 투신의 눈동자에, 여기저기 그을린 흔적이 역력한 남자의 웃음이 담겼다.
“그쪽이야말로 지금 도망치는 재주 하나만 부리는 사람을 못 잡아서 쩔쩔매는 것 같은데.”
이죽이는 입술에 드러나는 송곳니.
명백한 비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