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75화 (275/288)

275

회고(5)

“이···!”

시퍼런 귀화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노기가 맺힌다.

분노에 찬 폭언을 내뱉는 대신, 사내는 손가락을 몇 번 튕기며 짤막한 수인을 맺었다.

「망라귀성(亡喇鬼聲)」

폐허가 된 숲 위, 한데 모여든 마력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복잡한 소환진을 그려낸다.

아득한 귀곡성이 울려퍼지는 한가운데, 소환진의 음울한 푸른빛을 뚫고 나타난 건 집채만 한 해골이었다.

그어어어···!

상반신만 드러냈음에도 그림자가 어지간한 도시 광장을 뒤덮을 정도의 거체.

댈런을 발견하자마자 발작하듯 고개를 휘적이더니, 이내 샛노란 광선을 텅 빈 눈구멍에서 뿜어낸다.

쿠구구구―!!

두 줄기 광선이 산줄기를 훑기 시작했다.

마치 잡초가 가득한 땅을 괭이로 갈아엎듯이, 이리저리 찢기고 뽑혀나가는 안개숲의 나무들.

해골의 고개가 휘적이는 대로 숲에 깊은 자상을 남기며 다가오는 광선 앞. 댈런의 대처는 단순했다.

[돌아가라.]

언령의 마력이 일대를 휩쓴다.

악신과의 계약에 묶여있음에도, 그 한계를 뛰어넘어 사령술 하나만으로 신위에 오른 흑마법사의 권능.

모든 망자들의 왕으로서 내린 명령 앞에, 방금 소환된 해골은 한 줌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무슨···!”

경악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댈라인.

댈런은 보란듯이 하품을 쩍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끝인가?”

“······!”

사내가 손을 뻗었다. 자주색 덩굴숲이 지면을 뚫고 자라나 독기를 뿜었다.

댈런은 곧장 신성문신의 저항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오래 전 균열을 탐사하는 대가로 기사단장에게 받아새겼던 신성문신 중에는, 기적을 사용하기 위한 것 외에도 역병과 시독에 저항하는 문신 역시 있던 바.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그 효과를 달리 하는 신성 문신이기에, 마력 능력치가 거의 100에 달하는 댈런은 사실상 완벽한 저항력을 가진 거나 다름없었다.

투확!

골짜기를 가득 메운 자줏빛 독무를 뚫고 내달린다. 화살처럼 움직이는 그를 향해 사내가 다시 손을 휘저었다.

「풍월곽(風刖廓)」

「풍영결계(風影結界)」

칼바람이 수백 수천 가락으로 얽혀 요새 규모의 덫을 쌓아올린다.

댈런은 마찬가지로 바람에 몸을 숨긴 채, 칼날 같은 폭풍의 틈새를 빠져나왔다.

「토륙함(吐陸陷)」

「청파벽조(淸波劈肇)」

산 하나가 통째로 폭발하며 용암과 불덩이를 쏟아낸다.

집채만 한 파도를 방패이자 이동 수단으로 삼아, 재빠르게 화마의 영향권을 벗어났다.

투광! 쿠과과과······!!

천재지변에 가까운 재앙이 연달아 펼쳐지며, 암묵해월령의 안개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어갔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초토화되는 대지와 하늘 사이에서, 댈런은 예상했다는 듯이 모든 공격을 적재적소에서 파훼해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댈라인이 사용하는 스킬은 하나 하나가 어지간한 마을 하나를 통째로 으스러뜨릴 법한 파괴적인 권능.

간발의 차로 그 범위를 빗겨가거나 준비했다는 듯이 상성상 우위의 능력으로 대응하는 건, 본래라면 초월자의 직관으로도 불가능한 기적이겠지.

그러나 댈런에게는 그 기적을 이뤄낼 힘이 있었다.

‘패턴은 동일하다.’

정확히는 힘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이라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

‘이 전투만을 수없이 상상하고 복기다.’

한없이 가속화되는 사고.

잘게 쪼개지는 순간의 틈에서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회백의 투사와 맞붙은 이후로부터···어쩌면 이 싸움이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결말이라 해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마지막 회차의 시체는 가장 강력한 희망인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나버릴 수도 있는 싸움의 단초.

과도할 정도의 리스크를 안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가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매 전투에 목숨을 걸지 못했다면 애초에 지금에 다다를 수도 없었겠지.

중요한 건 결국 어떻게 승리를 거머쥘 것인지, 그 방법 하나뿐이었다.

‘어떤 몹을 사냥하든 간에, 처음은 흑뢰 난사로 시작했었지.’

마지막 회차에서 얻어낸 가장 효율적인 고유 스킬, ‘흑뢰’.

모니터 너머에서 댈런은 흔히들 스킬 스팸이라고 부르는, 얍삽하지만 효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몹을 공략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보스몹을 포함한 적들 대부분이 경험치와 전리품으로 화했다. 마지막 회차의 완성된 캐릭터는 그만큼 강력했다.

‘대악마급 정도 되면 흑뢰 스팸만 가지고는 쓰러뜨리기 힘들어지지. 그러면 적당히 간을 보다가 홍염신보를 사용했어.’

벼락의 폭우에 정신이 팔린 상대를, 열기와 용암이 폭발하는 진각으로 으스러뜨린다.

그것마저 버텨내는 적이라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공간째로 동결시켰다.

뒤이어 속박이 채 풀리기 전에 다채로운 스킬을 연달아서 난사.

각종 원거리 술식과 권능을 뒤섞어가며, 상대의 속성과 약점을 간파하고 쥐어흔든다.

‘다섯 악신과의 마지막 결전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패턴이었지.’

그건 말하자면 일종의 커맨드였다.

수만 시간을 갈아넣어 쌓아올린, 모든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최적의 방정식.

대륙 전역의 기연과 히든 피스들을 모아 가능한 완벽한 캐릭터를 만들었고, 수백 수천 번의 싸움을 거치며 그 캐릭터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다만 모든 상대에게 최적화된 공략 방식이라는 건, 나쁘게 말하면 고착화된 일변도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댈런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형국에도 끊임없이 상대를 도발하는 건, 그렇게 고착화된 패턴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였고.

두두두두두―!

층계를 난자하는 수십 가지 술식의 향연.

산자락과 그 밑의 기반이 갈아엎어지고, 대기가 갈갈이 찢겨나가며 형용할 수 없는 굉음을 터뜨린다.

댈런은 아슬아슬하게 흘리고 피해내며 전투를 이어갔다.

비틀비틀 밀려나면서도 끝내 치명타를 허용하지 않고, 매번 비웃음 섞인 도발을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패턴을 미리 인지하고 예측한 덕분이었지만, 본신의 역량이 부족했다면 그마저도 제대로 써먹을 수 없는 이상론에 불과했을 터.

다만 용신과의 전투 이후 스킬을 최대한 자제하며 싸우는 과정에서, 넘쳐흐르는 능력치를 온전히 다뤄낼 수 있게 된 덕에 이 아슬아슬한 춤사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쥐새끼 같으니라고.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마!”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걸까. 댈리안이 노성을 토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분노에 몸을 맡긴 것 같지만, 댈런은 그 실상을 알고 있었다.

‘수십 가지의 술식은 일종의 탐색전이지. 원거리에서 스킬 난사로 쓰러뜨리지 못할 강적이라면, 그때부터는 근접전에 돌입한다.’

대충 스킬 단축키로 끝낼 수 있으면 가장 좋았고, 그렇게 마무리되지 않는다면 컨트롤이 좀 더 복잡한 근거리 전투로 넘어가는 식.

끝없이 빗발치던 검은 번개가 뚝 그치는 것과 동시에, 댈라인의 신형이 한순간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왼쪽···!’

대비했음에도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빠르기.

한계까지 예민해진 기감이 먼저 반응한다.

──────!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혔다. 검끝이 방금 전 목이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

피했음에도 잘려나간 듯 화끈거리는 목덜미.

기사왕의 보검 뒤랑달의 능력. 목표를 향해 휘두른 이상, 중간에 가로막히지 않는다면 반드시 상처를 입히는 권능이었다.

“썩을···!”

허리를 튕겨 자세를 되찾는다. 이어지는 찌르기를 성검을 뽑아 흘려낸다. 검끼리 얽어 떨쳐내고 역으로 찌르기. 검면으로 밀어올리는 상대방. 곧장 사선으로 내려그어지는 보검.

찌지────!

막는 게 불가능해 몸을 틀어 피해낸다. 공기 찢는 소리와 함께 뒤편에서 토막나 우르르 무너지는 안개산.

피했음에도 베여나간 가슴팍에서 피가 주륵 흐르다 굳었다. 직격당했다면 내상이 아니라 아예 상반신 전체가 지워졌을 테였다.

가벼운 휘두르기로 제국 황도의 성벽을 단번에 쪼갠 검격이, 초월자의 몸뚱이라고 으스러뜨리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테모므론의 권속으로 얻은 사령술도 모자라 진룡의 심장과 골격, 거기다 용혈까지. 너 역시 결국 반쯤은 악마로구나. 악신 운운하던 주제에 나와 다를 게 뭐가 있지?”

“지랄. 스킬 가지고 시비털기냐?”

내리긋는 보검을 검신과 폼멜 사이에 엮어 저지한다.

청린용에게서 이식한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며 흉곽 안쪽의 내상을 치유하는 사이, 오히려 한 걸음 더 파고들며 손을 들어올렸다.

「영역 완전개방」

「설산에 내리쬔 시작의 빛」

드드드드···!

초토화된 지반을 뚫고 산봉우리가 솟는다.

난도질당한 대기 아래로 검붉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쩍쩍 갈라지는 지반 저 아래쪽으로 엿보이는 건, 본디 층계를 하나 내려가야만 나타나는 유황 바다의 붉은 기운.

하늘과 땅이 한 번 더 뒤집히는 여파에, 안 그래도 흔들리던 층계의 경계선이 아예 통째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친 놈. 지금까지 내 화력을 흘려냈던 게, 설마 미궁 자체를 무너뜨릴 속셈이었던 거냐···!”

두 층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걸 눈치챈 댈라인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미궁을 무너뜨려서 소원의 돌을 얻어간다는 얄팍한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봐야 무저갱의 끝없는 공허를 넘어서는 건 불가능···!”

“아니.”

물 흐르듯 검을 옆으로 밀어내며 놓는다.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가는 보검.

화끈거리는 쇄골 어림의 격통을 무시하고 왼손을 뻗어 놈의 손목을 붙잡았다.

근접전으로 밀리는 와중에 더 거리를 좁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순간적으로 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층계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건 나도 예상 못한 일이다. 대체 어디까지 억측을 하는 건지.”

피식 웃으며 들어올리는 오른손. 완전히 개방된 영역의 의지가 그 행동에 반응한다.

초월자 간의 대결이 수싸움이라는 것과 별개로, 애초에 영역을 내보이는 것 자체는 상관없었다.

고위계 초월자들의 싸움은 결국 심상 속 정경의 격돌로 이어지기 마련.

그리고 위계부터 차이나는 두 사람의 싸움이라면, 어차피 영역을 먼저 내보이는 건 댈런 쪽이 되는 게 당연한 논리.

중요한 건 영역을 언제까지 아끼느냐가 게 아니다. 요지는 그렇게 영역을 개방한 순간, 얼마나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느냐.

‘그리고 그 타격으로 전투의 흐름을 가져올 수 있느냐뿐.’

생각을 갈무리한 댈런이, 오른손을 하늘 높이 뻗어든 채 말을 이었다.

“나도 처음 써보는 거라, 맞출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말이야.”

원거리 술식 난사 패턴을 지지부진 끌며 버티고.

그렇게 유도한 근접전에서마저 검의 간격 안쪽, 주먹질마저 어중간해지는 영거리를 만들어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지금부터 불러내야 하는 영역의 힘은, 그는 물론 그 영역의 원주인마저도 제대로 사용해본 적 없는 권능이었으니까.

「지옥을 삼킨 뇌전의 대해」

빽빽한 먹구름 너머에 넘실거리는 뇌해에서, 오색 번개의 마지막 색채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온 세상의 벼락을 모아낸 전격술사 댈타리온.

그러나 그렇게 모아낸 번개로 오색의 뇌해를 이뤘음에도, 마지막 한 색채의 번개만큼은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했다.

천공요새의 부름을 거절하고 연인과 친구들마저 외면하며 힘을 키운 그에게도, 마지막 번개는 다룰 수 없는 수준의 권능이었기 때문.

그에게 조금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신위에 올라 그 번개에 닿았을지도 모르지. 허나 종말은 그에게 여유를 남겨주지 않았다.

‘···얼마 전에 결정을 내렸다. 어쩌면 내가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너희의 비극을, 더는 외면하지 않기로.’

붉은 뇌우를 흩뿌리던 술사의 앞에서 했던 말을 떠올린다.

소중한 것들을 죄다 버려가며 도달한 멸망. 그 너머에서 지나간 것들을 그리워하던 사내에게 남겼던 대답.

‘그렇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겠지. 너희가 지키지 못한 걸 지켜내는 일.’

쑴의 화신체를 쓰러뜨려 무투가의 복수를 이뤄주었고.

용신의 목을 떨어뜨려 대장장이의 원한을 갚았다.

담아냈으나 거머쥐지 못한 번개를 대신 휘두르는 것이, 과연 전격술사에게 어떠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까.

죽은 자는 침묵할 뿐. 대답은 들을 수 없다.

허나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으면, 더이상 뒤를 돌아볼 필요 역시 없겠지.

“저···!”

새하얗게 튀는 안광을 본 댈리안이 위기감에 몸을 빼려 했다. 허나 놈의 손목은 이미 댈런에게 붙잡혀 있었다.

100이 넘어가는 근력 수치라면 충분히 뿌리칠 수 있겠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지체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댈런에게는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리긋는 손 안에서, 뇌해에서 일직선으로 내리꽂힌 번개가 번뜩이고.

「백락(白落)」

새하얀 낙뢰가 투신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