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76화 (276/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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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세계(1)

휘이이이······.

아릿하게 피부를 두들기는 칼바람.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촉에 댈런은 고개를 들엇다.

‘···난데없이 설산이라.’

마지막 기억은 분명 댈라인의 목덜미에 백락을 꽂아넣은 것이었다. 백락의 새하얀 번쩍임에 시야가 가득 채워지고, 그 직후에 암전.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에 떨어진 것일까. 댈런은 가만히 마지막 장면을 되새겨봤다.

‘분명 백락이 놈의 피부를 뚫고 회색 일렁임에 직격하는 걸 확인했다. 약점에 제대로 적중했음은 확실해.’

댈라인이 습관적으로 긁적거리던 목덜미 언저리. 그곳에서 불안정하게 일렁거리던 잿빛 색채.

세 자릿수에 달하는 시체를 회수해온 댈런이 그 잿빛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시체의 색깔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색채.

그가 모니터 너머에서 키워왔던 캐릭터들의 최후를 나타내는 상징.

원래라면 시체는 죽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잿빛 시체는 캐릭터가 사망할 당시의 모습을 본뜬 매개물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캐릭터들의 본체는 역천의 우물 안에 잠들어 있었지.’

처음에 단지 계승자 DLC의 컨텐츠라고 여겼던 건, 살아 숨 쉬는 이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댈런에게 힘을 나눠준 캐릭터들은, 사실 종말을 맞이한 다른 세계선에서 건너온 영웅들.

역천의 우물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는 각 평행세계에서 영웅들의 영혼을 데려와 일종의 안배로 남겨뒀었다.

지금까지 댈런이 봐온 시체들은 그 영혼과 현실을 잇는 매개의 역할만을 수행할 따름이었다.

‘초월자들의 시체는 좀 달랐지만.’

접촉만으로 능력의 일부를 계승받을 수 있었던 대부분의 시체들과 달리, 초월자들의 시체에서는 능력을 계승하기 위해 영혼의 인정을 받는 단계를 거쳐야 했다.

물론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잿빛 시체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유일한 예외라고 해봐야, 사령술사 댈룸 자이브의 시체가 억지로 그를 붙잡고 의식 세계로 끌고 들어간 것 정도.

하지만 댈라인은 스스로 움직였다.

제 발로 걸어서 움직였을 뿐 아니라, 마치 이 세상의 주민처럼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다.

‘아마 가진 힘의 상당 부분을 소모했겠지. 어찌저찌 위계의 하락까지는 면했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타격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 용신과 겨뤄 승리한 댈런이었지만, 애초에 그 용신 자체가 대룡의 절반을 잃고 완전하지 않았던 상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다섯 악신과 정면에서 겨룬 댈라인의 상대가 될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밀고 밀리는 싸움이라도 성립할 수 있었던 건, 댈라인의 능력과 육신 모두가 군데군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댈런이 백락을 꽂아넣은 목덜미 어림의 일렁거림은, 그 불안정함이 육신 자체에 드러난 약점이나 다름없었고.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자.’

댈런은 기억을 갈무리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백락의 새하얀 번뜩임 직후, 천천히 회복되는 시야에 비친 건 눈 덮인 설산의 정경이었다.

인적이 끊겨 차갑게 식어버린 오두막. 뒷마당에 널브러진 사냥 도구들.

모니터 너머에서만 수백 번 반복했고, 심상 너머 영역으로는 그보다 몇 배나 더 마주했던 정경.

댈런은 문득 그걸 바라보는 자신의 눈높이가 미묘하게 다름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긴 어디지?

내면의 음성이었다.

자신의 생각도, 적창이나 아르보르의 목소리도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음성.

‘······뭐?’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확히는 찌푸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눈가에 주름을 만드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내려 두 손을 바라봤다.

- 나는 누구야?

두툼한 사내의 손이었다.

굳은살과 흉터투성이 전사의 손 대신, 막일이라고는 거의 해본 적 없는 것 같은 매끈한 손아귀.

도끼며 단검이 매달려 있어야 할 허리띠는 얇은 가죽끈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튼튼한 부츠와 유물 갑옷 역시 허름한 가죽신과 천옷으로 뒤바뀐 채였고.

‘···이런.’

상황은 금방 이해됐다. 지금의 이 몸뚱이는 댈런 자신의 육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누구의 몸이냐는 것.

추측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 댈라인.

몸뚱이의 주인이 품는 생각이, 마치 자신의 생각처럼 내면에서 다시 한 번 들려왔기 때문.

- 내 이름은 댈라인이다. 나는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태어났다.

***

설산 이후의 삶은 꿈을 꾸듯 빠르게 이어져갔다.

마치 주마등이 눈앞을 스친다는 표현처럼, 순식간에 떠올랐다 흩어져 사라지는 수많은 장면들.

- 먼저 자금과 무력을 쌓고, 동시에 필요한 기연들을 얻어야 해. 용병업이 가장 적당하겠군. 금패를 달 정도까지만 실적을 쌓고 활동하면 되겠어.

- 초반에 얻어야 할 건 르비바흐 약초숲의 만드레이크. 팔시온 청동 구역 암월단 지부의 주문살해자. 도시연합 북부 루네 신전의 월광검. 그리고 여타 자잘한 비약들.

- 미궁의 저층부에는 쓸만 한 유물 무구들이 꽤 많다. 1층과 2층을 서너 번 정도 순회하면서 챙기면 좋겠어.

눈에 담을 새도 없이 지나간 장면들 사이에서, 또렷하게 남은 건 댈라인이 품은 생각들이었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철저하게 세워지는 계획들. 그 과정에 불필요한 욕구나 감정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용병으로 활동하며 온갖 기연과 히든 아이템을 싹 쓸어담은 끝에, 몇 년 흐르지 않아 댈라인의 무위는 금강궁의 초월자들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했다.

최적화된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가장 가치가 높은 것들만 골라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미래를 이미 알고 움직이는 기계처럼 보일 정도.

허나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댈라인의 인생은 삭막했다.

그에게는 가족이나 연인은 물론, 흔한 동료나 따르는 친구조차도 없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 스스로가 쳐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댈라인. 네가 루네 신전을 습격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어.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정보원을 좀 솎아낼 필요가 있겠군. 내가 한 게 아니야.”

“역시. 그럴 줄 알았···아악! 대, 댈라인?”

어느 날 그는 안심한 시에나의 뒤통수에 도끼를 꽂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은 칼날산맥의 심처에서 고대의 짐승을 봉인하고 있고, 시에나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면 그는 계약에 따라 봉인을 깨고 나온다는 사실 때문.

- 짐승과 고룡이 풀려난 자리에는 오랜 시간 응축된 마력이 단약처럼 남아있지. 그걸 흡수하면 보다 빠르게 고위 주문들을 습득할 수 있다.

순간이동 스크롤로 도망친 댈라인은 북부로 올라가 단약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차르국 동부는 풀려난 고대의 짐승으로 인해 피바다가 되고, 저 아래 미궁도시에서는 청동 구역 한복판에 소환된 고룡이 금강궁과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만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씁쓸한 단약은 목적대로 그의 마력을 대폭 증가시켜줬으니까.

“항간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댈라인 당신께서 미궁도시에 용을 소환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헛소문이오. 원래 사람들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를 시기하기 마련이지. 내가 무슨 재주로 용을 오라가라 하겠소?”

“하긴···암울한 시기에는 암울한 거짓들이 진실로 가장하곤 하죠 지금같이 기사단이 위기를 맞았을 때 도와주러 오신 분께서 어떻게···꺄아악!”

청린을 저지하기 위해 균열로 파견된 원정대에서는, 청린용의 기습적인 숨결 안으로 루시아를 던져넣었다.

악마 살해자의 성검은 영웅 레레도나라의 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보물이었다.

원정을 빌미로 가능한 신성 문신을 전부 받았으니, 기사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이유도 없었고.

레레도나라의 비검을 습득한 그는 남부를 떠나 동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서 기사왕을 죽인 뒤에는 다시 대륙을 가로질러 상인 길드장과 인질극을 벌였다.

제국 황도에 쳐들어가 황제의 갑주를 빼앗았다. 흑마법사들과 사교도들의 비밀 의식지에 쳐들어가 모두 때려죽인 뒤 자신이 직접 인신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평범한 용병으로 시작했던 인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핏자국으로 점철되어갔다.

그에게 따라붙는 별칭 역시 학살자에서 악마로, 악마에서 악신으로 바뀌었다.

- 내가 어떻게······.

모든 행보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던 댈라인이, 문득 의문을 품었던 건 별이 반짝이던 밤이었다.

7위계에서도 정점에 닿은 뒤, 얼마 남지 않은 다섯 악신과의 결전을 준비고 있던 어느 새벽녘.

- 내가 어떻게 이 지식들을 알고 있지?

마치 미래에서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뇌에 새겨져 있던 지식들. 그건 사실 출처조차 알 수 없는 불가해의 정보들이었다.

- 나는 왜 악신들을 막아서려 하는 걸까?

학살자가 되어가면서까지 학살자들을 막으려는 행보 역시,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정작 몸뚱이는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필요한 것들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얻어내는 것. 주로 그 방법은 강탈.

그렇다고 스스로의 의지가 아예 없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저 지금껏 쌓아왔던 행적과 그 결과들이, 그를 한 가지 길로 몰아가고 있었으니까.

- 내게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던 건가.

이미 대륙의 삼분의 일을 불태웠던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나 안식처 따위는 없었다.

멈추면 그건 그거대로 끝이었다.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나.

스스로의 힘으로 오롯이 살아왔다고 여겼는데. 누구보다 또렷한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생각했는데.

- 이 꼭두각시 놀이를 하고 있는 건 세계와 세계를 잇는 역천의 우물인가. 아니면 오래 전 베여 밑동만 남았다는 신적인 별나무인가.

어쩌면 그 둘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간에 그 누군가는 이 세계를 지키려 하는 존재인 게 분명했다.

비록 절반 가까이 불타버린 세계에서 대체 무엇을 지켜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문을 품은 채 댈라인은 악신과의 결전에 돌입했다.

- 나는 어떤 삶을 원했을까.

다섯 악신의 군세와의 싸움은 수십일 밤낮으로 이어졌다.

피 튀기는 혈전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결국 가장 처음 품었던 의문을 향한 도돌이표였다.

- 나는 왜 여기에서 눈을 떴을까.

설산에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했던 생각들. 그 당시 아주 짧은 순간 겪었던 혼란.

- 나는 누구지?

군세를 전부 소모한 뒤, 다섯 악신은 그에게 직접 달려들었다.

종말 직전까지 학살조차 마다 않고 십수 년간 쌓아올린 영역의 힘은, 다섯 악신이 쏟아붓는 대지옥의 권세에도 맞서는 게 가능했다.

[우물의 안배, 이 실패작 따위가 감히!]

[한낱 인간 주제에 과분한 힘을 가지고 있구나. 종언의 선고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려라!]

하지만 댈라인마저도 놈들의 끝없는 협공을 완전히 극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밀고 밀리는 싸움 끝,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몸은 어디론가 추락하고 말았으니까.

[미궁의 무저갱에 파묻어주마! 무한한 공허가 네 안식처이자 감옥이 될 것이니···!]

그건 에낙사구스의 함정이었다.

승기를 한순간 내주는 것까지 각오한, 가장 간교한 악신이라 불리는 놈다운 도박수.

무한한 공허가 눈앞에 아득하게 펼쳐졌고, 그 공간에 떨어지는 순간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숨 쉴 공기는 물론 마력 한 줌조차 없는 텅 빈 공간 속, 댈라인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삶을···.”

그리고 그의 등에 다섯 악신의 창칼이 내리꽂혔다.

***

“······.”

댈런은 눈을 떴다. 약간 어지러웠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새하얀 설산이나 까마득한 무저갱이 아니었다.

붉게 끓어오르는 용암의 바다. 울퉁불퉁한 금속과 바위의 섬.

댈런은 여기가 어디인지 알았다. 미궁의 다섯 번째 층, 살인적인 독기와 용암이 영원히 흘러넘치는 마경 ‘유황 바다’.

[정신이 들었느냐?]

그때 적창의 음성이 심중에 울려퍼졌다. 걱정과 긴장이 함께 어린 목소리였다.

[정신이 들었다면 앞을 보거라. 저···존재가 아까부터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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