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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보루(1)
“···어, 네. 뭐, 그러시죠.”
루시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수긍하자 펠버는 곧장 아카샤를 데리고 사라졌다.
뭔가 허둥지둥 서두르는 듯한 마법사의 등. 쿵 하고 문이 닫히며 그 뒷모습을 시야에서 가렸다.
루시아는 그제야 조금 전, 본인의 말투에 조금 날이 서있었음을 눈치챘다.
왜 그랬지? 그녀는 작전도에서 손을 떼며 생각했다.
‘···탑주님의 행동이 평소답지 않았어.’
생사의 경계선을 한 번 넘어봤기 때문일까. 평상시의 펠버는 평정심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댈런의 권속으로 부활한 이후 숱하게 전장을 넘나들었음에도, 그가 당황하거나 주저하는 걸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 살아온 세월과 그에 따른 다채로운 경험만큼이나 능수능란한 대처.
언변도 뛰어나 외부와의 자잘한 교섭은 그가 맡는 경우도 많았다.
시에나가 파티 내에서 공격적인 협상가의 역할이었다면, 펠버는 느긋한 능구렁이 같은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는···이상할 정도로 초조해 보였어.’
미묘하게 가쁜 호흡. 불안정한 시선 처리.
지팡이를 잡았음에도 희미하게 떨리던 손가락과, 어딘가 정신없어보이는 말투까지.
펠버의 손에 이끌려 사라지던 아카샤도 마찬가지였다.
천대 청린의 오랜 안배를 안고 태어나 총기가 가득하던 진룡의 눈동자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멍한 눈빛만이 맴돌고 있었다.
“······.”
저도 모르게 용과 마법사가 닫고 나간 문을 향하는 시선.
왠지 뇌리를 간질거리는 불길한 직감의 단초.
아냐. 별 일 아니겠지. 그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작전도를 들여다보고 있어서 바빠 보였으니, 자신에게는 나중에 이야기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애써 생각을 돌려보려 해도 가슴은 답답해질 뿐이었다. 한숨을 푹 쉰 루시아는 검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순은 구역의 성벽은 높고 넓었다. 루시아는 한적한 성벽 위를 천천히 거닐었다.
원래라면 경비병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을 순은 성벽은 적막했다. 경계병력이 아예 없는 구간도 꽤 있을 정도였다.
치안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하고는, 경비 병력 대부분이 악마와 마물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한 특훈을 받는 중이기 때문.
그들이 비운 자리는 금강궁의 초월자들이 힘을 합쳐 광대한 범위의 탐지망을 펼쳐 보강하고 있었다.
‘탐지망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금화 수백 궤짝어치의 술식 재료와 비약을 소모중이라고 했지.’
하루에 금화 수백 궤짝이라. 금강궁이 돈이 많기는 했다.
댈런이 지난 몇 년간 온 대륙을 쏘다니며 종말을 두들긴 끝에 모은 게 간신히 그 정도였는데.
하긴 그 정도 돈을 팍팍 쓸 수 있으니까 이런 거대도시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겠지.
“후우.”
입가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숨결이 뺨을 어루만지며 흩어졌다. 맞바람이었다.
성벽에 올라온 건 썩 괜찮은 판단이었다. 시린 겨울 공기는 답답하게 끓던 가슴을 조금이나마 식혀주었으니까.
하지만 끓던 감정이 사라진 공백만큼, 가슴 한켠이 허전해지는 건 어째서일까.
루시아는 시린 뺨을 문지르며 성벽 여장에 기대앉았다.
‘···벌써 한 달이 넘었네.’
한 달 전, 그녀와 일행은 미궁에서 쫓겨나다시피 튕겨나왔다.
댈런은 아무 예고도 없이 차원문을 열었고, 영역까지 개방해가며 동료들을 그 안으로 밀어넣었다.
눈앞이 팽글팽글 도는 차원문의 출구는 무너진 탑을 중심으로 펼쳐진 광장이었다.
이전에 와본 적 있기에 루시아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무너진 탑은 폭탄에 당했다는 결계탑이고, 광장은 미궁도시 순은 구역의 중앙 광장이라는 걸.
‘결계탑에서 사람이 나왔어! 당장 상부에 보고해!’
‘괜찮으십니까? 안심하세요. 여긴 팔시온입니다. 여러분은 안전해요!’
광장을 지키던 기사들은 온갖 호들갑을 떨어댔다. 미궁에 갇혀있다가 모종의 방법으로 탈출한 탐험가라 생각한 탓이었다.
보고가 올라간 뒤 머지않아 금강궁이 직접 행차했을 때는, 호들갑을 넘어서서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고.
어쨌든 일련의 소란을 뒤로 한 채, 금강궁은 일행을 극진하게 대접하며 모셨다.
댈런을 제외하더라도 이들은 한 명 한 명이 초월자나 그에 준하는 강자.
전쟁을 앞두고서 강력한 소수 정예 전력이 생겼으니, 기뻐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
물론 그런 대접과는 별개로, 루시아는 한동안 방에서 나올 수 없었다.
처음 며칠간은 ‘왜’였다.
왜 나를 돌려보냈을까.
왜 함께 싸우지 않은 걸까.
검 한 자루에 신성력뿐인 성기사가 그렇게 못미더웠나? 다른 동료들은? 대마법사와 용은? 마녀와 폭발물 전문가는?
이미 숱한 전장에서 함께했으면서. 승산이 없어보이는 싸움을 같이 이겨냈으면서.
의문과 자책이 뒤섞인 감정은 원망에 가까워졌다. 돌아만 오면 단단히 따지리라 벼르고 있었다.
사흘쯤 됐을 때 다시 훈련을 시작하고, 열흘이 지나갈 무렵 세부 작전 수립에 참여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한 달이 지나도록 댈런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돌아올 때도 됐잖아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흘리는 중얼거림. 코끝이 찡했다.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추운 모양이었다.
그동안 댈런의 소식을 듣고자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천변만화의 얼굴 에버론을 통해, 백안의 선각자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으니까.
물론 돌아오는 답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애매한 것들뿐이었다.
운명에 예속되지 않은 자의 행적을 읽는 건 어렵다던가.
아니면 넘쳐흘러 목적지를 잃어버린 강물은 예측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던가 하는.
“망할 주문쟁이.”
[당황스러우니까 그런 뒷담은 자제해줄래? 까악―]
“······?”
난데없이 들려온 까악거림. 언제 내려앉았는지 까마귀 한 마리가 성벽 위에서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부리로 깃털을 슬슬 다듬고는 부르르 떠는 모습. 고개를 든 치켜든 새가 깍 하고 울었다.
“···그쪽 이야기 한 거 아니거든.”
[알아. 그냥 해본 소리야. 딱딱하긴. 누가 성기사 아니랄까. 깍깍깍.]
“깍깍대면서 말싸움하려고 온 거면 돌아가. 할 일도 많을 정보상이 여긴 왜 왔어?”
“나도 머리 좀 식힐 시간은 있어야지. 안 그래?”
마지막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
또각. 또각.
굽 낮은 구두가 성벽 위를 경쾌하게 또각거린다. 루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성벽 계단을 올라온 건 검은 머리칼의 여자였다.
길게 기른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검은 눈동자. 그 위를 덮은 길고 매혹적인 속눈썹.
복슬거리는 털옷에는 고급스러운 광택이 흘렀다. 어느새 까마귀는 사라지고 없었다.
“···시에나.”
미궁도시 최고의 정보상이자, 역대 조상들 중 가장 강력한 깃털의 마녀.
시에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말했다.
“왜 그런 눈빛으로 봐.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
“아니.”
“그럼 옆에 앉아도 되지?”
“···그래.”
기다렸다는 듯 근처의 나무 상자에 털썩 앉는 마녀. 루시아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사실 그녀는 성기사치고 음지의 사람들을 그리 배척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마녀는 좀 껄끄러웠다.
굳이 말하자면 믿음직한 동료이되, 괜히 불편해지는 대상이기도 했다.
“춥네.”
“······.”
“하긴 겨울이니까. 당연히 춥겠지. 우리 성기사님은 갑옷에 털가죽 옷도 안 걸친 거야? 춥지 않나?”
이번에는 루시아가 어깨를 으쓱할 차례였다. 시에나는 코밑어림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나만 춥지 또. 하여간 성기사건 용이건, 아니면 몸뚱이가 반쯤 용인 인간이건. 연약한 주문쟁이의 서러움을 모르는···.”
“왜 올라온 거야?”
“말했잖아. 머리 좀 식히려고 왔다니까?”
하- 스륵 퍼져나가는 흰 입김. 어이없다는 루시아의 반응에 마녀가 픽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걱정되니까 올라왔지.”
“···뭐?”
“악마 살해자에 전쟁신의 가장 날카로운 검 루시아 카스타챌드. 모두가 우러러보는 기사단의 영웅이라도 결국 인간인데, 정작 그 어마무시한 명성 때문에 챙겨주려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
“그쪽이 날 왜 챙기는데?”
“댈런 그 양반이 널 아끼니까. 그것도 아주 많이.”
마녀가 싱긋 웃었다. 둥글게 휘어지는 눈꼬리. 남자라면 누구나 혹할 눈웃음이었다.
“걱정 마. 마녀는 수명이 기니까. 수십 세기를 사는 진룡만큼은 아니더라도, 별 일 없다면 천 년까지는 거뜬해.”
“······.”
루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손거스러미를 만지작대던 마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순은 성벽 안쪽, 아득하게 뻗어나가는 거대도시의 시가지를 향하는 시선.
“사람들이 모이고 있어. 신기하지 않아?”
시에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성기사의 시선도 자연스레 마녀를 따라갔다.
“우리를 치료하던 약제사는 대륙 서부에서 제일가는 실력자야. 샤니아랑도 안면이 있을 정도지.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치유사와 사제들이 이 도시에 전부 모였어. 그 찾기 힘들다는 해주술사도 공식 집계상으로만 백 명이 훌쩍 넘어갔고.”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거대도시는 지난 몇 달간 온 대륙의 피난민과 지원 병력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새롭게 편성된 병력의 규모가, 기존의 정규군을 몇 배나 상회한다는 건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콧대 높던 기사왕국을 포함한 동부의 삼왕국은 물론이고, 엘프들은 아예 왕조를 통째로 끌고 망명해왔어. 차르국도 일만이 넘는 지원 병력을 파견했지. 하이 오크 대족장···타룸이었나? 오랜만이더라. 가족들만 북쪽에 남겨두고 나머지 일족 전체를 끌고 온 것 같던데.”
서부의 길드 연맹도 마찬가지였다.
용병과 기술자들은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와 무구들이 매일같이 도시 안으로 행렬을 이루며 들어왔다.
제국이 있는 남부에서는 황실에 봉기를 일으킨 귀족파 일부가 병력을 보내왔다.
추후 미궁도시의 지원을 얻고자 하는 정치적인 속셈이 훤히 보이는 판단. 다만 금강궁은 이를 배척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제국의 몇몇 기사단과 귀족들의 사병은, 당장 결전을 앞둔 지금 큰 도움이 될 테였으니까.
“알겠지만 나는 인간을 믿지 않아.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추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거든.”
시에나는 다리를 꼰 채 등을 성가퀴에 기댔다. 그녀는 조금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의 힘이 이렇게나 하나로 모일 수 있다니. 지금껏 본인의 평판 한 줄, 금쪼가리 한 조각 가지고 그렇게 피터지게 싸워놓고서?”
“점술가와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미궁도시를 마지막 결전의 장소로 언급하고 있잖아. 대륙이 통째로 사라지고 나서, 왕좌며 황금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
“글쎄. 사람은 네 생각보다 논리적이지 않아, 성기사님. 내일 죽는다고 해도 오늘 먹을 빵 한 덩이가 중요하다고.”
“알아. 나도 이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소리는 아니야. 아마 댈런이 없었다면···지금만큼 대륙이 하나가 되는 건 불가능했 테니까.”
힘을 모으고 어쩌고 하기도 전에 사분오열됐겠지. 루시아가 덧붙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마녀의 시선이 성기사를 향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뭐가?”
“댈런이 대륙을 들쑤시면서 했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한 번 믿어보자는 거지.”
마녀의 눈꼬리가 다시 한 번 호선을 그렸다.
“새로운 악신인지 뭔지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댈런이라면 충분히 이겨냈으리라고 믿어. 그 양반이라면 우리 없이도 소원의 돌을 얻어낼 거야. 그리고···”
“언제 위기에 처했냐는 듯 짠 하고 나타날 거라는 거지?”
“잘 아네.”
루시아는 가볍게 코를 훌쩍였다. 아무래도 갑옷만 걸쳤더니 정말로 추운 모양이었다.
시에나의 말이 맞았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역경을 뛰어넘은 게 몇 번이고, 이기는 게 불가능한 싸움의 판세를 뒤집은 건 또 몇 번이던가.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때 믿어주는 게 진짜 신뢰인 법이었다. 이미 과거에 몇 번이나 증명해낸 전적이 있는 댈런인만큼, 한 번쯤 믿어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마녀가 가볍게 웃었다. 이번에는 루시아도 마주 웃어줄 수 있었다.
답답함이 좀 가신 그녀는 기지개를 펴며 몸을 돌렸다.
순은 성벽의 여장 너머, 저 멀리 뻗은 서쪽 벌판 위로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지평선과 맞닿아가는 주홍빛 태양. 자주색과 어두운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그 휘황찬란한 빛을 배경으로 피어오른 세 줄의 희끄무레한 선.
흰 선? 루시아는 눈을 부릅떴다.
‘연기···?’
봉화였다. 서쪽 요새에서 피어올린 봉화.
한 줄이면 이상없음. 두 줄이면 이상 발생.
세 줄이면 침공.
“성기사님, 혹시 저거···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니지?”
곁에 선 시에나가 물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뿌우───
곧이어 두 사람의 등뒤에서 전쟁나팔의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일곱 성벽의 망루에서 일시에 터져나와, 도시 전역의 시가지 사이사이를 쩌렁쩌렁 울리는 수십 수백 나팔들의 합창.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