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80화 (280/288)

280

인류의 보루(2)

성벽을 가장 먼저 두드린 건 악마의 주문 포격이 아니었다.

끝없이 몰려오는 마물의 육탄 공세나, 불타는 창칼을 든 언데드 군단 역시 아니었다.

지평선부터 긴 궤적을 그리며 날아온 건, 시체를 한데 뭉친 직경 수 미터의 구체들.

지옥 마력으로 단단하게 뭉쳐놓은 인간의 뼈와 근육, 내장의 덩어리였다.

슈우우―

붉은색 덩어리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드넓은 평원과 거기 설치된 수성 장애물들을 훌쩍 뛰어넘은 붉은 구체들은, 성벽과 그 너머 청동 구역 시가지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콰직!

거친 파육음.

투가가가각―!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기와 조각.

수 톤에 달하는 질량의 충돌에 건물들이 기우뚱 넘어갔다. 드넓은 평야를 가로지른 시체덩이들의 속도와 무게는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꺄아아아! 피, 피가···!”

“으아, 으아아아!”

후두둑 비산하는 붉은 것들 사이로 주민들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썩은 핏덩이 육편. 내장 조각. 붉은 벽돌 조각과 살점이 뒤섞여 날아다니며 사람과 건물을 가리지 않고 더럽혔다.

“살려줘! 흐아아악!”

“질서를 갖춰 대피하십시오! 질서를···!”

미궁도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성벽 위에 마법사들을 올려보내 시체 덩이들을 요격함과 동시, 청동 경비단이 훈련받은 대로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훈련과 실전은 전혀 달랐다.

밀고 밀리던 주민들이 경비들에게 부딪히는 건 예삿일.

요격 명령을 받은 몇몇 마법사들 역시, 쏟아지는 시체 덩어리들을 채 반도 떨어뜨리지 못했다.

애초에 본격적인 주문 포격이 들이닥친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사기를 꺾을 용도인 고깃덩이 투척이었을 뿐.

본격적인 전투 전에 과도한 전력을 투입하는 것 자체가 적들의 손 안에서 놀아나는 꼴이었다.

단지 전황 전체를 살피는 냉정한 계산에서, 청동 구역 주민들이 안위는 다소 후순위라는 게 문제였지만.

“아아아악! 내 발! 밟지 마!”

“지미! 지미! 우리 아가 어디 갔니!”

수천 수만의 인파가 대로로 몰려든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군중들.

순은 성벽을 향해 물 밀듯이 밀려가는 인파 속에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 다음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제 힘을 못 이긴 군중의 밟에 짓밟히는 끔찍한 최후.

“저희 경비단이 청동 성벽을 철저하게 지키는 중입니다! 조금만 질서를 갖춰서···.”

“씨발, 질서는 무슨 질서! 비켜! 비키라고! 가로막는 놈은 다 죽여버릴 거야!”

눈 없는 폭력은 경비대원들에게도 향했다. 덩치가 이 미터쯤 되는 거한이 경비병의 가슴팍을 밀친 것이 화근이었다.

당황한 경비병은 반사적으로 창을 앞세웠다. 그러나 거한 역시 뒷골목에서 싸움깨나 해본 숙련자였다.

“어엇!”

자연스럽게 빼앗긴 창대. 무기를 쥐었다는 것만으로도 휙 돌아가버린 거한의 눈.

두려움에 절여진 군중 속에서, 전형적인 다혈질 뒷골목 건달인 사내는 쉽게 이성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거한이 본능적으로 창을 휘두르려는 순간, 무언가 번뜩이며 놈의 명치를 후려쳤다.

“커어어···!”

“쯧.”

위액을 쏟으며 주저앉는 거한. 놈과 경비대원 사이를 가로막고 선 건, 남루한 로브 차림의 중년 남자였다.

“가, 가웨인 경비단장님?”

“병사. 뒤로 물러서도록. 이 근방의 지휘는 지금부터 침묵중대가 맡겠다.”

경비대원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웨인은 혀를 쯧 차며 검을 뽑아들었다.

츠즈즈즈······.

검신 전체를 뒤덮고 선명하게 번뜩이는 기운.

푸른 마력의 예기에 주민들 중 몇몇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 숨을 깊게 들이쉰 가웨인이 입을 열었다.

[침묵중대! 앞으로―]

***

척척척척!

헤진 로브를 걸친 병사들이 골목에서 우르르 몰려나온다.

하나같이 낡아빠진 로브 안쪽에 번쩍이는 판금 갑주를 걸친 침묵중대원들은, 압도적인 완력으로 순식간에 거리의 인파 사이를 파고들었다.

“뭐야! 밀지마!”

“무슨 사람 힘이···자, 잠시만요!”

눈 깜짝할 사이에 인파의 허리가 끊어진다. 양분된 인파는 이내 마디마디 분리되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든 뒤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서서, 인파의 흐름 자체를 강제로 조정하기 시작하는 침묵중대.

예전이었다면 아무리 베테랑으로 소문난 침묵중대라 하더라도, 고작 중대급의 머릿수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청동 구역을 들썩였던 사교도 사건 이후, 가웨인을 위시로 한 침묵중대는 지난 수 년간 금강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해왔다.

지금 시점에서는 중대원 한 명 한 명이 사실상 기사급 이상의 전력.

[질서를 갖춰 대피하시오.]

마력을 담은 전성이 재차 거리 전체에 울려퍼진다. 가웨인의 목소리였다.

[소요를 일으키는 자는 침묵중대장이자 청동 경비단장의 권한으로, 군법에 따라 이 자리에서 처벌하겠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제각기 무기에 손을 얹는 침묵중대.

그 칼 같은 대응에 단순히 겁에 질렸던 주민들은 물론, 소요를 주도하던 사람들까지 주춤거리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시에 따라 이동하십시오.”

“순은 구역으로 진입할 때까지 불필요한 개인 행동은 일체 금지합니다.”

거리의 주민들은 침묵중대의 인솔 하에 차례차례 대피를 이어갔다.

가웨인은 소대장들에게 지휘를 맡긴 채 천천히 상황을 살폈다.

긴급하게 출동해 주민들을 진정시키긴 했지만, 그 역시 지금의 사태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

‘분명 금강궁 측에서도 앞으로 몇 주는 더 남았다고 했는데.’

금강궁의 예견에 따르면, 악신들의 군세는 대륙의 사방에서 조여들어올 예정이었다.

동쪽은 라필렘, 서쪽은 에낙사구스, 북쪽은 쑴, 남쪽은 테모므론과 용신.

개중에도 북쪽과 남쪽은 걱정할 게 없다고 들었다.

북쪽의 대공세는 이미 차르국을 중심으로 편성된 연합군이 한 차례 막아낸 뒤였고, 남쪽에서 준동하던 두 악신의 세력 역시 각지의 영웅들이 활약하며 일단락되었다고 했으니까.

동쪽 바다를 건너 가장 위협적으로 진격해오던 라필렘의 군세 역시, 어쩐 이유에서인지 보름 거리에서 진격을 멈춘 상황.

서쪽 대사막에서는 애초부터 별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길드 연맹의 방어선 역시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윗선의 오판이었던 건가.’

그렇기에 미궁도시는 악신들의 대대적인 침공이 아무리 빨라도 수 주 이상 걸린다고 보고 있었다.

도시의 전력 대부분을 훈련에 투입한 것 역시,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아직 약간의 여유나마 남아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미리 대비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좋았으련만.’

가웨인은 짧게 혀를 차고 시선을 돌렸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일단 일이 벌어졌으니 지금은 최선을 다하는 게 맞았다.

한 번 질서를 잡고 나자 대피 자체는 순조로웠다. 침묵중대와 청동 경비단은 주민들을 수백 명씩 무리로 모아 대피시켰다.

순은 구역으로까지만 대피한다면 당장의 안전은 확보할 수 있으리라.

순은 성벽 위쪽에는 장대한 보호막이 펼쳐져 있고, 그 방어력은 시체덩이 포격 정도에는 결코 뚫리지 않을 테니까.

“끄아아아악!”

그때 귀청을 찢는 비명이 인파 사이에서 울려퍼졌다. 가웨인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비명의 주인공은 아까 전의 그 거한이었다. 이 미터쯤 되는 덩치에 경비대원 하나쯤은 쉽게 제압하던 그놈.

“괴, 괴물···크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가슴팍이 꿰뚫린다. 놈의 흉곽에 촉수를 박아넣은 건 아담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정확히는 조금 전까지 여인이었던 괴물이었다. 지금은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마물이나 다름없었고.

그르르륵!

손발 피부를 찢고 돋아나는 촉수. 부글거리며 녹아내리는 얼굴과 그 안쪽에서 돋아나는 갑각.

여인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비슷하게 변이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웨인은 수납했던 검을 다시 뽑아들었다. 그렇지. 악마 놈들이 주민들의 대피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있나.

[침묵중대! 전투태세―]

경비단장의 외침이 다시 한 번 거리에 울려퍼졌고.

[전투태세!]

넝마 사이에서 뽑혀나온 무기들이 일시에 검기로 뒤덮였다.

***

타닥!

민첩하게 벽을 박차는 발끝. 격한 움직임에 흔들리는 금발.

청년의 신형이 창문을 잡고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붕 뜬 몸은 거리를 배회하던 반인반마에게 곧장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콰직!

촉수와 갑각으로 뒤덮인 팔 한 쪽이 땅에 떨어졌다. 금발의 청년, 에버론 라크탈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반인반마의 피부가 생각보다 질겼다. 하급 마물이라기에는 조금 넘치고, 중급 마물 기준으로는 약간 모자란 정도.

크긱! 크에에엑!

반인반마가 몸을 휘청였다. 비틀거리는 듯하더니 순간적으로 가속하며 달려드는 육신.

촉수가 휘릭 춤추며 에버론을 향해 쏘아졌다. 몸을 슬쩍 젖혀 피한 에버론은 곧바로 검을 내질렀다.

으직!

날카로운 세검이 촉수가 뻗어나온 눈구멍을 꿰뚫는다.

안와가 통째로 함몰된 반인반마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화륵!

그러기도 잠시, 세검에서 피어오른 백색 불꽃에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촉수.

백염이 붙은 검을 휘저어 반인반마의 머리통을 터뜨린 에버론이, 그대로 하늘을 향해 검을 뻗으며 의지를 집중했다.

“전쟁의 신이시여!”

「유섭(流燮)」

화르르르······!

불꽃이 먹구름을 뚫고 줄기줄기 흘러내린다.

마치 구름에 거꾸로 심긴 채 자라는 나무처럼, 지상을 향해 그 가지를 뻗어내리는 백색 불꽃의 줄기.

그르륵! 그억!

캬아아악!

단마의 백염이 훑고 지나간 자리마다 반인반마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촉수로 뒤덮인 채 녹아내리는 인간의 몸뚱이.

내구성이 강하다면 상극인 신성력으로 태워버리면 될 뿐이다.

천변만화의 얼굴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수십에 달하는 분신체의 능력을 전부 이용할 수 있는 그에게는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처럼 신성력을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중급 마물 정도야 신성력 없이 으스러뜨릴 수 있는 게 초월자의 저력이었고.

드드드득!

쿠르르르르―!!

아름드리나무 굵기의 덩굴들이 판석을 뒤엎으며 솟아오른다.

거리를 점령한 반인반마들을 휘감아 으스러뜨리고, 팔뚝만 한 가시로 찔러 부수는 수십 줄기의 덩굴들.

순식간에 거리 전체를 확보하고 적들을 학살한 덩굴은, 이내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서 부상자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에버론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렸다. 녹색으로 물든 거리 한가운데, 백발의 노인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청동 구역에서 가장 큰 약제상인, ‘필로폰의 약제상’을 운영하는 사업가.

동시에 금강궁의 유력 가문인 필로페린 가의 혈통이자, 그 자체로 심상세계를 현실에 투영할 수 있는 초월자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니아 필로폰님.”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관두거라, 에버론. 도움이 필요없는 이에게 손을 내밀 정도로 이 노인네의 여력이 넉넉하지는 않아.”

노인의 표정은 빈말로도 썩 좋지 못했다. 그녀는 곰방대를 물고 연기를 한껏 들이키며 말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금강궁의 전언과는 좀 다르구나. 덕분에 금강궁의 요청대로 모든 힘을 약제 생산에 쏟다가, 방비도 제대로 못한 채 과수원이 무너졌어.”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필로폰 님.”

“유감이고 나발이고,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알아듣도록 설명해주어야 할 것이야.”

“저희가 틀렸습니다.”

“···틀려?”

꿈틀거리는 노인의 흰 눈썹. 에버론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에낙사구스의 힘이 저희의 예상치를 아득하게 뛰어넘었습니다. 쑴과 테모므론을 잡아먹은 걸 넘어서서, 라필렘과 용신의 남은 세력까지도 죄다 흡수한 모양입니다.”

“뭐라?”

“놈은 어떤 대규모 의식도 없이 거대한 지옥문을 도시 근처에 열었습니다. 다섯 대지옥의 연합군이, 고작 하루 거리에 당도한 겁니다.”

281인류의 보루(3)

황금 구역에 설치된 지휘부는 발칵 뒤집혔다.

지옥문이 이렇게나 도시 코앞에, 그것도 아무 전조도 없이 열릴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체 포격의 빈도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청동 구역 전역에 걸쳐 오염체들이 대거 발생!”

“오염체들이 하수도와 낮은 거리를 점거했습니다. 놈들의 움직임이 점점 조직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마약이 원인입니다! 청동 구역 음지에서 싼값에 유통되던 마약에 저주가 덧씌워져 있던 겁니다!”

도시 각처에서 보낸 전령들이 드넓은 홀에 헐떡이며 뛰어들어온다.

하나같이 청동 구역을 휩쓸기 시작한 오염체들에 대한 보고를 쏟아내는 전령들.

홀 외곽의 정보장교들에게 수납된 보고는 몇 단계의 정리를 거치며 빠르게 중앙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도시 전도가 펼쳐진 홀 중앙의 원탁을 둘러싼, 초월자들을 포함한 금강궁 유력 귀족가들의 수뇌부에게로.

“동부 지구는 가웨인 경비단장이 침묵중대를 이끌고 막고 있다. 낮은 거리에 정통한 인물이니 전적으로 일임하고 지원하도록.”

“마약으로 섭취하는 저주는 저급한 종류라네. 해주술사들을 순은 성문에 배치해. 피신하는 주민들에게 광역 해주 술식을 퍼부으면 해결될 걸세.”

“치유사와 사제들을 순은 구역 중앙광장에 결집시켜! 성문에서 부상자들을 분류하고 위중한 환자들은 곧바로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각자 도시의 한 부분 이상을 맡아 관리하는 귀족가들의 수뇌부가, 각자의 분야를 살려 빠르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대응책을 지시한다.

미궁도시의 지배자는 스물여섯 전당의 초월자들이지만, 그 밑의 귀족들이라고 결코 무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월자들 대부분은 결계를 유지하고 스스로의 위계를 갈고닦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 터라, 평소 도시를 관리하는 건 사실상 귀족가의 실무진들.

수백 년간 도시를 유지해온 이들의 유연하면서도 칼 같은 판단과 전략 아래, 오염체들의 기습적인 공격은 소수의 초월자들과 경비단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제압되어갔다.

푸드드득!

그때 하늘에서 거친 날갯짓과 함께 반인반조의 신형이 내려앉았다. 금강궁의 초월자들 중 하나인 ‘그림자 없이 나는 새’, 이노우코 토드였다.

날개를 감추고 인간형으로 돌아온 토드는, 원탁 앞에 앉은 소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소녀에게 그가 말했다.

“선각자님. 악마 군세의 포위망이 예상보다 더 빠르게 좁혀지고 있습니다.”

“······.”

“동쪽과 서쪽 성벽은 지옥불 포격의 범위 내에 들어왔고, 수천에 달하는 공허 사냥개 무리가 북쪽의 라이칸트 강 일대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백발의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우주와 같이 어둑한 유리체 한가운데, 머리칼처럼 새하얀 눈동자는 별과 같이 빛나고 있었다.

조금 몽롱한 듯한 시선이 토드를 향했다. 잠깐의 침묵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북쪽의 사냥개들은 미끼입니다. 그리로 병력을 파견하는 건 다른 부분에 구멍을 만들 거예요. 서부는 에버론과 샤니아 필로폰이 맡았으니 문제 없습니다. 동부로만 순은 기사단의 대대 하나를 지원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포위망은 어느 정도 거리죠?”

“선두의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빨라서···한나절 거리로 보입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이야기했다.

“선두가 성벽에 닿을 때까지, 영역을 계속 전개해주길 부탁해요. 이노우코 당신이야말로 현 시점에서 가장 정확하고 광범위한 정찰 자산입니다.”

“예, 선각자님.”

고개를 꾸벅 숙인 토드는 몇 걸음 물러나 날개를 펼쳤다.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른 반인반조의 형상.

그 빈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소녀의 가슴팍이 작게 들썩였다. 작은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백안의 선각자, 알리아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권능을 한계까지 사용한 나머지 앞이마에서부터 뻐근한 감각이 골을 울렸다.

그녀의 능력은 운명의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별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은하수의 흐름을 읽어내리며 미래를 예측하는 권능.

허나 몇 달 전부터 운명의 강물은 원래의 흐름을 완전하게 벗어나 있었다.

때문에 지금처럼 무리를 거듭해도 내다볼 수 있는 미래는 기껏해야 몇 시간 정도였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지···너무나도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필멸의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이었지요.’

천 년이 훌쩍 넘는 생애를 통틀어, 이토록이나 무력하게 느껴졌던 시기가 있었을까.

무한한 분기점을 내다보며 미래를 예견하던 선지자는, 이제 오늘 저녁놀이 내려앉을 풍경조차 예측할 수 없는 점쟁이나 다름없었다.

‘이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불분명한 구원일까요, 아니면 예정되었던 종언의 선고일까요.’

짧게 번뜩이는 백안. 여전히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알리아트는 손끝으로 눈썹 어림을 더듬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몇 달 전을 떠올렸다,

‘······댈런.’

운명의 강물은 한 남자를 통해 범람했다.

천 년 이상 이어져온 천구의 흐름 속 난데없이 나타난 변수. 분명히 필멸자의 몸을 입고 있음에도, 그녀의 예지안으로 읽을 수 없는 기묘한 존재.

정해진 종말로 다가가던 세계는 그의 손에서 향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천 년 만에 한 줄기 희망을 목격한 알리아트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서부 길드 연맹, 북부 차르국, 엘프와 하이 오크를 포함한 이종족들, 남부 귀족 반란군과 동부의 삼왕국까지.

외교적이거나 경제적인 손해마저 기꺼이 감수하며, 도시연합의 전력을 투사해 온 대륙의 힘을 결집했다.

덕분에 악신들보다 한 발 앞서 준비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용신에게서 살아남은 성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도, 악신들의 행보는 여유로워보일 정도로 느릿했기 때문.

‘북부와 남부의 공세는 댈런과 그 동료들에게 꺾였고, 동부의 공세는 삼왕국의 격렬한 저항을 맞아 느려지고 있었죠.’

가장 큰 위협으로 생각했던 에낙사구스는 대륙에 모습을 드러낼 낌새조차 없었다.

전략가답게 스스로의 세력을 더 키우려고 하는지, 자잘한 테러와 방해공작들 이외에는 아예 진군의 전조조차 없었으니까.

‘설마 그게 단순히 힘을 조금 키우겠다는 수준이 아니라, 다섯 대지옥을 완전히 통일한다는 발상이었을 줄은···.’

허나 에낙사구스의 행보는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약화된 쑴을 집어삼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놈은 나머지 세 악신의 세력을 모조리 흡수해버렸다.

쑴의 파멸궁전을 제 것으로 만들 때까지만 해도, 평소 으르렁거리던 경쟁자를 처단한 것이라 여겼다.

애초에 깨질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음에도 수천 년 동안 유지되던 균형이다. 이렇게 쉽게 무너뜨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게 당연한 일.

‘에낙사구스는 특히나 각 악신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고, 악신 사이의 충돌을 오히려 중재하던 전략가였는데······.’

대체 무엇이 수천 년 묵은 능구렁이의 속내에 변화를 가져온 것일까.

짚이는 건 하나뿐이었다. 역천의 우물이 남긴 예언과 그 실현이라 여겨지는 사내, 댈런.

‘···가능성의 규합. 어쩌면 에낙사구스는 그 맥락에서 자신만의 실마리를 얻은 것일 수도.’

수많은 시간선들의 가능성을 모아, 결말을 타파할 인물을 예언한 역천의 우물.

본디 다섯이었으나 하나가 되어버린 대지옥의 권능은, 개념적으로 그 예언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어찌됐건 다섯 대지옥이 통일된 이상, 기존의 전략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평소 저들끼리 끊임없이 치고받던 악마와 마물들이, 한 의지 아래 규합되어 미궁도시만을 노릴 테니까.

“···젠장.”

다행히 금강궁의 귀족가들이 잘 지휘해 저지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본격적인 공세는 시작조차 하지 않은 상황.

훈련 중이던 병력 역시 시시각각 투입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버티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성기사단은 언제든 출동할 준비가 되었소, 백안의 선각자여.”

희뿌연 장님의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기사단의 단장, 에드거 라인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알리아트는 고사리 같은 손을 꽉 말아쥔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말했다.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아직은···.”

말끝을 늘어뜨린 그녀가 다시 눈을 감았다. 서서히 바닥에서 떠오르는 작은 체구의 육신.

홀 바닥에 드리워진 그녀의 그림자가 기묘하게 일렁거렸다.

희미한 별들이 휙휙 지나가는 듯한 착시.

에드거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홀 외곽으로 향했다. 문 곁에서 대기하던 루시아와 합류한 기사단장은 곧장 복잡한 전당을 빠져나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상황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다. 허나 우리 순서는 아직인 듯 하구나.”

“시에나가 카일버르쿠스의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용신의 방패와 익갑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에낙사구스의 군세에 합류했을 거로 짐작됩니다.”

“수천 년 만에 기껏 족쇄가 풀렸건만, 곧장 새 지배자에게 제 목줄기를 들이밀다니. 스스로 다른 필멸자들과 다르다며 뽐내고 다니지만, 용들 역시 실상은 인간과 그리 다를 바 없다는 증거지.”

두 기사는 황금 구역의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순은 구역과 마찬가지로 황금 구역의 거리들 역시 이동이 통제된 상태였다.

평소 귀족과 상인, 고위 관료와 그 수행원들로 붐비던 교차로는 번쩍이는 갑옷의 마찰음과 군마의 거친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어딘가로 바쁘게 뛰어가는 병사들.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수레의 행렬. 급보를 품에 안고 내달리는 전령, 화려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몰려가는 마탑의 마법사들.

“나는 고위 기사들에게 가야겠구나. 상황을 공유하고 세부 전략의 수정을 도와야겠어.”

“저도···.”

“루시아 너는 이번 공성전에서 따로 움직이거라. 그동안 함께해온 동료들과 등을 맞대고 싸우도록 해.”

몸조심하라는 말을 남긴 에드거가 곧장 기사단의 임시 본부로 향했다.

그와 헤어지고 성벽으로 향하던 루시아는, 문득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 있나! 묻지 않았나!”

널찍한 골목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 소리. 그녀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펠버의 면전에 서서 소리치는, 보통 사람 너덧 배쯤 되는 덩치의 거구가 보였다.

하이 오크 대족장 타룸이었다.

“왜 말을 못하나! 무슨 일이 있으면 있다! 아니면 아니다!”

“······.”

“이해가 안 간다! 똑똑한 마법사가 왜 그러···!”

“타룸.”

산만 한 덩치의 오크가 고개를 휙 돌렸다. 들썩이는 어깨는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성기사,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네요, 타룸. 잘 지냈어요?”

“잘 먹고 잘 싸웠다! 하이 오크는 그거면 된다! 하지만 칭구를 잃으면 다 소용없다! 마법사가 자꾸 말을 안 하는데, 대체 댈런은 어디···!”

“댈런은 미궁으로 내려갔어요.”

침까지 튀며 외치던 타룸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는 이내 눈살을 팍 찌푸리며 되물었다.

“미궁? 그 괴물 천지 지하동굴? 그것들 꼬기는 다 맛없다! 퉤! 댈런도 그것들을 먹진 않겠군!”

“정확히는 우리 모두 함께 내려갔죠. 그리고 우리를 돌려보냈고요. 걱정 말아요. 별 일 아니니까. 그저···.”

“돌아오면 맛있는 밥 한 끼 먹어야겠다! 댈런 좋은 밥칭구다! 꼬기 사두겠다!”

버럭 소리를 지른 타룸은 성큼성큼 골목길을 나섰다. 하이 오크 대족장쯤 되는 덩치가 그러자, 마차 한 대는 충분히 다닐 너비의 골목길이 꽉 찬 것처럼 보였다.

“맞다, 인사하는 걸 까먹었군! 고맙다, 성기사! 마법사!”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휙 몸을 돌려 소리치더니 순식간에 사라지는 타룸.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펠버의 시선이 어쩐지 황당한 눈빛이었다. 루시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이 오크가 사라진 골목길에는 미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루시아는 잠시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탑주님.”

“······.”

“댈런의 안위에 대해 뭔가 알게 되신 겁니까?”

예상한 질문이었기 때문일까. 답은 금방 돌아왔다.

“댈런의 존재감이 완전히 지워졌네. 주종의 계약으로 맺어진 연결 고리가 끊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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