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81화 (28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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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갱의 바닥(1)

“···그렇군요.”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성기사들이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종종 욕을 먹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눈치까지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소년 시절부터 만사에 무덤덤하던 아카샤.

수많은 전장을 거치면서도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던 펠버.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감정적 동요를 보인 것도 특이한데,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우연히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보다는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다름아닌 댈런과의 연관성이었고.

“진룡은 알에서 깨어날 때 처음 본 진룡을 부모로 인식해, 영혼과 영혼이 연결되는 생태를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탑주님께서는 댈런의 권속으로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셨고요.”

“···그렇지.”

“연결이 끊어졌다는 건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루시아가 물었다. 펠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둘 중 하나일세. 댈런의 존재가 영혼의 연결이 끊어질 만한 장소로 가버린 것이거나···아니면 죽은 것이거나.”

“···그 장소라는 건.”

“미궁에서 막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었네. 시간의 흐름마저 다르게 흐르는 미궁 심층도 이 연결 고리는 끊을 수 없었다는 게야. 그러니······.”

그러니 이 단절은 아마 댈런의 죽음을 의미할 걸세.

비록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길게 늘어뜨린 말끝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루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음?”

“저는 댈런을 믿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그는 분명 잘 해내고 있을 거예요.”

툭. 툭.

황금 거리의 매끈한 판석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물방울.

펠버는 땅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올렸다. 촉촉하게 젖은 성기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악신인지 뭔지가 가로막았죠. 무저갱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홀로 건너가야 할 거예요. 하지만 언제 그러지 않은 적이 있나요? 이전이라고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었습니까?”

‘나도 두렵소.’

루시아는 분명히 기억했다.

저 대륙 북쪽의 얼어붙은 동토를 행군할 적, 짐승 가죽을 덧댄 막사 안에서 댈런이 했던 말을.

‘나는 죽는 게 두렵소. 잊혀지는 게 두렵고.’

‘항상 쉬운 선택을 해왔소. 그런데 결국 그게 가장 어려운 길이더군.’

‘이곳에서는 그러지 않을 거요.’

막사를 파고들던 찬바람은 그 안의 온기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날 살결에 와닿는 단단한 체온을 느끼며, 루시아는 댈런의 두 마디를 마음 깊은 곳에 간직했다.

‘실패하는 것보다 무력하게 무릎 꿇는 게 더 싫으니까.’

‘그렇게 두 번이나 잃을 수는 없으니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대체 어떤 상실을 겪은 건지. 그리고 어떤 과정으로 이를 극복해온 건지.

허나 이해하는 대신 믿어주기로 했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던 싸움을 몇 번이나 극복하며 스스로를 검증해왔고, 이번에도 그러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믿어주는 것뿐이에요. 댈런이 자신의 싸움을 싸우는 동안, 우리 역시 각자의 전장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내 생각이 짧았군. 루시아 경의 이야기가 맞네.”

펠버가 고개를 들며 웃었다. 낮지만 힘 있는 웃음이었다.

“전우란 서로를 믿으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지. 나도 댈런을 믿는다네. 그 외에 정답이 있겠나.”

노인의 갈색 눈에는 황금빛 이채가 돌아와 있었다. 한 마탑의 대마법사다운 눈빛. 루시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몸은 컸지만 여전히 어린 용에게도 격려가 필요하겠지. 손을 들어 눈가를 훔친 그녀는, 이내 목을 큼 하고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카샤와도 이야기해봐야겠네요. 아버지를 잘 따르던 아이인만큼, 누구보다 상심이 클 테니까요.”

***

‘···차갑다.’

그리고 어둡다.

맨 처음 든 생각이었다.

댈런은 어둠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었다. 그의 육신을 휘감은 암흑은 단순한 빛의 부재가 아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아.’

부드럽게 뭉클거리는 묵빛의 공허가, 물리적인 몸뚱이를 넘어 본질적인 영역을 파고든다.

그건 심상과 영혼, 더 나아가 존재 그 자체를 잠식하려 드는 어둠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말을 듣지 않는 몸뚱이를 움직이는 대신, 댈런은 차분히 기억을 되새겨봤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두 섬광의 충돌이었다.

내뻗은 주먹에서 터져나가던 뇌격의 섬광. 그리고 잿빛으로 물들어가던 댈라인이 휘두른 검은 번쩍임.

두 힘의 부딪힘은 영역의 강림으로 불안정하던 미궁의 경계를 다시 한 번 무너뜨렸다.

그리고 용암으로 끓어오르는 해저면이 바스라지며 나타난 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바다였다.

‘···미궁 6층. 무저갱.’

여기가 댈라인이 최후를 맞았다는 그 무저갱인가.

다섯 악신과 정면으로 맞붙던 투신이 왜 그렇게도 속절없이 당했는지, 직접 빠져보니 이제야 이해가 됐다.

무저갱의 어둠은 마치 날카로운 면도날처럼 모든 연결 고리를 분리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육신과 의지가 분리되고, 심상과 영혼이 분리된다.

감각은 남아있으나 몸을 움직일 수는 없고, 심상의 소유자임에도 영역을 불러내지는 못하는 이질감.

고개를 조금이라도 들어보려 하지만, 마치 사슬로 칭칭 감아놓은 것처럼 몸뚱이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의식만 고개를 들었다고 느꼈을 뿐. 육신은 하던 대로 어둠 속을 둥둥 떠다닐 따름이다.

무력한 단조로움이 그나마 남아있는 이지마저 서서히 갉아먹어간다.

무더운 여름날 지친 몸이 꿉꿉한 잠에 빠져들듯, 스르르 의식의 끈을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음?’

희미한 인력이 느껴졌다. 위쪽이었다.

마치 누군가 부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

흐릿해져가던 정신이 조금 돌아온다. 남은 의지를 모아 그 인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 ···저는 댈런을 믿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하지만, 물기가 묻어나는 음색.

- 나도 댈런을 믿는다네.

- ···맞아요. 아버지는 어떤 난관이라도 이겨내실 분이시죠. 하마터면 얄팍한 감각에 속아 잊을 뻔했습니다.

- 믿냐고? 당연하지! 나는 댈런이 비잘리나의 시신 앞에서 한 약속을 잊지 않았다네!

결의가 담긴 마법사의 주억거림. 떨림을 애써 감추는 진룡의 전성. 호탕하게 외치는 난쟁이의 선언.

- 내가 아는 댈런이라면 충분히 이겨냈으리라고 믿어. 그 양반이라면 우리 없이도 소원의 돌을 얻어낼 거야.

그리고 흘러가듯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 깊게 새겨진 마녀의 의지까지.

희미하던 인력은 어느 순간 저릿한 고양감으로 바뀌었다.

흐릿해가던 의식이 또렷하게 밝아지고, 마지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시야가 스르르 떠오르기 시작한다.

‘······!’

솟구친다.

붉게 끓어오르는 용암의 바다를 지나치고, 안개를 두른 산맥을 넘어 부상한다.

바다 위의 늪지대와 사막을 지나, 미궁 1층의 전경마저 순식간에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찔하게 가속하는 시야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로 인한 짓눌림이나 부담은 하나도 없었다.

몸뚱이는 여전히 무저갱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중이었고, 의식의 한켠은 그걸 여실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

흩어지려는 집중을 다잡는다.

한없이 솟구치던 시야는 어느새 미궁을 넘어 대륙으로 올라온 상태였다.

답답한 어둠 끝에 눈이 아리도록 내리쬐는 빛.

지평선 끝에서 떠오르는 햇빛 아래 보이는 건, 악마의 군세에 빽뺵하게 포위당한 미궁도시의 전경이었다.

***

꽈릉!

콰과과광!

대지를 울리는 육중한 포성.

붉은 포격이 하늘을 까마득하게 수놓는다.

제국의 대공세에도 굳건하게 버티던 청동 성벽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댈런은 의식만 남은 관찰자의 모습을 한 채, 아득한 창공에서 그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콰광! 쿠르르르···.

지옥불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성벽.

녹아내린 판석이 냇물처럼 흐르는 거리 위쪽으로, 힘 잃은 건물들이 카드로 쌓은 집처럼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 캬하학! 으헥!

- 크룸바! 에낙사구스!

- 피! 살점! 쇳물! 해골!

초토화된 거리 위로 마물들이 들이닥친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주민들이 제때 대피했는지, 청동 구역에 남은 건 극소수의 부랑자들뿐이었다.

종말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술과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간들은, 목전까지 들이닥친 죽음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뇌를 절여버린 술과 약이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여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일까.

- 피! 피! 더 많은 피!

- 심장을 바쳐라! 에낙사구스께서 이 도시를 원하신다!

- 길을 예비하라! 성벽을 무너뜨려라!

쥐떼처럼 쏟아진 마물의 군세에 뒤이어, 보다 질서정연한 군대를 이끌고 온 악마들이 거리를 점령했다.

악마들은 제빠르게 청동 구역의 주요 광장마자 제단을 세우고, 불운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전부 잡아들여 산 제물로 바쳤다.

비명과 괴성, 고문의 소음과 악마들의 웃음소리가 끔찍한 불협화음을 이룬다.

그 참혹한 광경을 깨뜨린 건, 도시 저 안쪽에서부터 쏟아진 황금빛 정광이었다.

「영역 개방 : 태엽을 되감는 대지의 손」

금빛 동심원이 하늘을 수놓는다.

황금 구역 한가운데 높게 솟은 첨탑 위, 펠버 발렌티노와 그 제자 토미 발렌티노는 두 손을 넓게 펼치고 있었다.

첨탑 아래에는 수천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동시에 술식을 시전하는 중이었다.

가지각색의 수인과 영창이 선명한 마력광으로 광장을 밝히고, 완성된 주문의 마력이 하늘 위로 솟구치며 거대한 황금빛 소용돌이 속에서 버무려진다.

「영역 공명」

「만률일원포(萬律一原砲)」

쐐애애애━━━━!!!

모여든 술식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동심원의 중앙에서 시작되어, 수만 갈래로 갈라지며 수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청동 구역의 각지를 두들기는 술식의 포격.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댈런의 시야에, 그 광경은 마치 도시를 뒤덮을 크기의 황금빛 나무가 사방으로 가지를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가지 끝마다 맺히는 다채로운 색깔의 열매들은, 하나하나가 대포 이상가는 화력의 술식이었고.

꽈르릉! 콰과과과···!

- 끄에에에!

- 캬아악! 캬학!

마물들이 찢겨나간다.

일인전승의 비전부터 각 마탑에서 정형화된 술식까지.

저마다 다른 속성과 범위, 파괴력을 가진 주문들은, 지옥에서 올라온 것들을 찢어발기며 검붉은 폭풍을 만들어냈다.

그때 황금빛 포격의 일부분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청동 구역 안쪽으로 기백에 달하는 거체들이 들이닥쳤다.

- 필멸자 따위가 신비의 근원 앞에서 헛짓거리를 하는구나!

용들이었다.

진룡이 수십. 아룡은 그 몇 배.

그 선두를 이끌고 있는 건, 다른 개체들보다 눈에 띄게 커다란 두 진룡이었다.

황금빛 포격의 파도를 당연하다는 듯이 갈라버리며, 순식간에 도시를 가로지른 용들이 순은 성벽에 몸을 부딪히기 시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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