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84화 (284/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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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갱의 바닥(3)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심상 너머 설산의 오두막.

수년 전 이곳에 처음 떨어졌던 순간은 여전히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날 밤 댈런은 역행의 사도들과의 격전 끝에, 탄광에 숨겨진 제단 앞에서 놈들의 대사도를 상대했었다.

악마와 반쯤 하나가 된 놈을 일격에 찢어발기고, 지친 몸으로 시간에 쫓겨 떨어진 시체를 회수한 순간.

“제 근육이 불어나는 걸 감당 못해 죽을 뻔했었지.”

“······.”

“헬창들도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근력 올인캐를 그렇게나 많이 키우더니, 몸뚱이에 근섬유 한 조각 더 못 붙여서 환장하기라도 했느냐?”

허리띠에 손을 꽂은 채 큭큭 웃는 사내의 모습. 댈런은 떨떠름한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게 전쟁신에 하이 오크들의 대선조이고, 동시에 수천 년 전 악신들에 맞서 인류를 구원한 전설 속의 영웅이라니.

루시아가 저 경박한 웃음을 듣기라도 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 않을까.

“전지전능한 존재라면서 농담 따먹기 하나 못 하면 그게 또 무슨 모순이겠느냐? 애초에 신이라는 건 한없이 멀기만 한 방관자가 아니니라. 그럴 거였으면 세상을 왜 창조했겠어?”

“말 하나는 더럽게 잘 씨부리시는군.”

“피조물에게 말싸움으로 져서야 되겠나. 수행이나 더 쌓고 오거라.”

썩을. 여전히 한 마디를 안 지는군.

어쨌든 근력캐를 흡수했다가 죽을 뻔한 그 날은, 댈런이 소영역을 처음으로 자각했던 날이기도 했다.

영역의 정경은 그가 이 대륙에서 눈을 뜬 설산과 한없이 유사한 풍광.

너무나도 비슷해 순간이지만 회귀로 착각할 정도였었지.

다행히 그 당시에도 그의 감각 능력치는 이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영역을 거니는 의식의 감각과 현실에 머물러있는 육신의 감각이 동시에 느껴지며, 그 괴리로부터 피어오르는 기묘한 이질감.

바꿔 말하면 영역의 정경은 그런 예민한 감각도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울 만큼, 한없이 현실에 가깝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아예 현실이 아닌 것도 아니지.’

통상적인 물리법칙과 마력의 흐름이 적용되는 대륙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의 장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법칙들마저 정면에서 깨부수는 전혀 다른 규칙과 질서의 공간.

모든 가능성이 저마다의 존재율을 가지고, 가능성의 주인이 품은 의지에 따라 한없이 실재에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라던가.

눈앞에 보이는 설산과 하늘 역시,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 아래에서 태어난 풍경이었다.

‘···환상세계.’

생각할수록 신기하긴 했다.

미궁이 대륙과 환상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며, 그 심층이 사실상 환상세계의 경계 안에 들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소원의 돌이 있다는 마지막 7층이, 정말로 환상세계의 영역 그 자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착각하는 게 있구나.”

꼬리에 꼬리를 문 추측과 상념을 파고드는 목소리. 사내가 말했다.

“이곳은 미궁 7층이 아니다. 네 심상이 담긴 정경이지.”

“뭐요? 그럼 나는 왜···.”

“왜 이곳에 있는 거냐고? 그야 소원의 돌을 얻었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눈을 뜨기 전, 무저갱의 바닥에 닿은 것 같은 경험을 했었다.

실낱만큼 남은 힘을 쥐어짜 앞으로 나아갔고, 반짝이는 무언가 위에 엎어졌던 기억.

그게 정말로 소원의 돌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미궁 7층은 그때 딛고 있던 땅이라는 소리였다.

“맞다. 미궁 7층은 무저갱의 바닥이지. 또한 소원의 돌이 곧 미궁 7층이기도 하다. 바닥 없는 곳의 바닥. 그곳에 놓은 귀물. 아무나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원한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지.”

사내가 큼직한 미소를 머금었다. 순수한 즐거움이 느껴지는 함박웃음이었다.

“그리고 소원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담기는 법이다. 우리가 네 심상 너머의 영역에 있는 이유지.”

“···그럼 여기서 뭐 보물찾기라도 하는 거요? 소원이 여기 숨겨져 있다고?”

“무슨 헛소리냐. 네 소원은 너 자신이 알고 있는데.”

그러면 대체 여긴 왜 온 건데? 댈런은 이제 진짜 알 수 없었다.

남의 속을 곧잘 읽어대는 사내는 미소를 좀 더 크게 만들었다. 그는 허리띠에서 손을 빼며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산만 한 덩치에 가려져 있던 배경이 드러났다.

이름 모를 사냥꾼이 지어올렸을 통나무 오두막과, 그 뒷마당 쪽을 바라보는 허름한 뒷문.

“선택하기 위해서지.”

선택?

고개를 기울이기도 전에 오두막의 뒷문이 벌컥 열린다.

좁은 문짝 안으로 내비치는 광경은, 자그마치 수년 만에 육안으로 목격하는 기억의 한 조각이었다.

***

웅웅웅···.

쿨러를 포함한 기계장치들이 조용하게 울었다.

새까만 케이스 한쪽에 난 투명 플라스틱 커버 안쪽에서는, 그래픽 카드와 CPU가 네온사인 같은 원색광을 토해냈다.

2년 전에 최신형으로 바꾼 데스크탑 컴퓨터. 그 컴퓨터와 모니터가 올려진 높이 조절 가능한 책상.

피씨방에서 많이 들여오는 푹신한 의자가 책상 앞에 놓여있고, 번쩍거리는 키보드 곁에는 시원한 맥주와 함께 에어프라이에서 갓 나온 감자튀김이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

말을 잊은 채 천천히 오두막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책상 앞에 서서 높이 조절 버튼을 눌러봤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올라가는 책상. 손끝에서 딸깍거리는 기계식 키보드의 감촉.

맥주캔에 맺힌 물방울은 탐스럽기 그지없고, 감자튀김에서 흘러나오는 소금과 양념의 향취는 감미롭다 못해 유혹적일 지경이었다.

댈런은 그제야 선택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저 단어를 몇 번쯤 들어봤다는 사실 역시도.

‘내가 오늘 온 이유는, 네 선택이 머지않았음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그건 혈령과의 싸움이 끝나고 꿈속에서 만났던 사내가, 마지막 순간에 지나가듯 남겼던 이야기였고.

‘선택해야 할 거다. 오래 전 너의 선배격 되는 전사가 그랬듯이.’

스스로의 힘을 깎아가며 이 대륙에 현신한 마지막 회차, 댈라인이 싸움 도중에 언급한 말이기도 했다.

‘지구에서의 삶이냐. 아니면 이 대륙에서의 삶이냐.’

고민해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소원의 돌을 얻고자 하는 목표 자체가, 처음에는 지구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한때는 이 주제로 밤새 머리를 싸매 쥔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잊은 질문이기도 했다.

당장 눈앞에 해결해야 할 난관이 산더미 같은데, 아직 닥쳐오지 않은 선택으로 인해 고민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대답은 이번에도 동일했다.

“선택을 보류하겠소.”

옳음과 옳지 않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정작 중요한 현재의 순간들을 놓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애초에 더 나은 길을 위해 고민하는 건, 최소한 그 기로 위에 설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인 바.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선택지 중 하나가 없어진다면 선택의 의미라는 게 존재하기나 할까.

적어도 두 세계 사이에서 고민이라는 걸 하고자 한다면, 둘 모두 멀쩡하게 사람이 살아가는 곳으로 지켜내는 게 우선이었다.

“···보류라.”

사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네 생각이 맞다. 아직 기로에 서지도 않은 이에게, 선택에 대한 고민은 종종 불필요한 낭비이고 사치지. 허나.”

“···허나?”

“갈림길에 도달한 이상,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 역시 사실이야. 인생이라는 건 시간의 인도를 받기에, 도중에 멈추거나 쉬어갈 수 있는 여로가 아니니까.”

또 주문쟁이 같은 소리 시작이군. 댈런은 눈살을 찌푸렸다.

“쉽게 말하면 당장 선택해야 한다 이 소리요?”

“비슷하지. 하지만 아직 약간의 여유가 있구나. 조금 있다가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조금 있다가나 지금이나 뭐가 다르다는 건지. 댈런이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사이, 사내는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거라.”

사내가 말했다. 그리고 댈런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사내의 보폭과 걸음 속도는 모두 짧고 느릿했다. 어릴 적 동네 아저씨들 등산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한 모양새.

그러나 그 신형은 산자락을 훅훅 타고 올라갔다.

커다란 덩치가 순식간에 손바닥만 한 크기가 되더니, 이제는 작은 점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시발 축지법. 댈런은 중얼거리며 달렸다.

그의 신체 능력은 어렵지 않게 사내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댈런은 사내의 곁에서 계속 달리며 말했다.

“여유가 얼마나 남았는지 그런 건 모르겠고, 나에게는 지금 당장 싸울 힘이 필요하오.”

“힘 말이냐?”

“소원의 돌을 얻으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다 하지 않았소. 악신과 대지옥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소리 아닌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의 몸이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시시각각 빨라졌다. 댈런은 약간 숨이 가쁜 걸 느꼈다.

휘이이이···!!

앞으로 빠르게 나아갈수록 반대로 눈보라는 거세게 얼굴을 때렸다. 차가운 바람이 입안으로 싸라기눈을 밀어 넣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사내가 우뚝 멈춰 섰다. 댈런도 발밑에 깊은 고랑을 만들며 따라 멈췄다.

산의 정상이었다.

***

쿠구구구구······!

새하얀 빛기둥이 시야를 가린다.

게임 시작 때 화면을 가득 채우던 빛을 연상시키는, 수백의 산봉우리 중 가장 높은 설산의 첨단에 내리꽂히는 빛의 일렁임.

분명 빛의 직진은 소음을 수반하지 않아야 하건만, 눈앞에서 쏟아지는 광채의 폭포는 귀청을 두드리는 굉음을 내고 있었다.

댈런은 저도 모르게 기억을 더듬어봤다. 이곳은 일전에 꿈속에서 만났을 적, 사내가 선택이 머지않았다 말했던 그 장소였다.

“이 빛기둥이 무엇인지 아느냐?”

침묵하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댈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6위계에 올랐을 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던 빛이었다.

저 아득한 하늘 너머에서 내리꽂히던 빛의 폭포.

경험상 영역의 힘이 이 빛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건 알고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설산은 역천의 우물과 이어져 있다. 우물이 영웅을 보낸 통로이자, 우물과 연결되는 길이기도 하지. 너를 제외한 영웅들은 모두 역천의 우물이 만들어 보낸 영혼과 육체다. 이 통로를 통해서.”

우물이 만들어낸 영웅들의 영혼과 육체.

그건 오랫동안 품은 의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허나 불완전한 반쪽짜리 대답이기도 했다.

양측 모두에 개연성을 가진 영웅의 탄생이, 어디에서 어디로 인과가 이어지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으니까.

“···그러면 그 캐릭터들은 내가 만든 거요? 아니면 그저 그들의 삶이 내 모니터에 비친 것뿐이오?”

“단순한 질문이구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어느 쪽일 것 같으냐?”

“···둘 중 하나겠지.”

“그래. 분명 둘 중 하나로 시작했지. 허나 닭을 먹든 달걀을 먹든 네 입장에서 그게 중요하더냐?”

글쎄. 잘 모르겠는데. 댈런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내는 나직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중요하지 않지. 양계장 주인이에게든 너에게든. 이미 접어든 순환 속에서 시작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중요한 건 닭과 달걀이 벗어날 수 없는 고리에 연결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지. 너와 역천의 우물이 그러하듯이.”

차르르르···.

사내의 손끝에서 순백의 물결이 일렁이며 갈라졌다.

정말로 폭포에 손을 집어넣은 것 같은 모습.

빛의 조각들은 흩어지며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다가, 마침내 새하얀 눈밭에 녹아들듯 자취를 감췄다.

모닥불에서 타오르는 불티를 거꾸로 뒤집은 듯한 모습 앞에서, 사내는 나직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역천의 우물은 종말을 극복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지. 수백의 영육을 빚었고, 어떻게든 그들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종말은 여전히 막을 수 없었다.”

“······.”

“우물은 그때 깨달았지. 자신 역시 운명에 예속된 존재이며, 그 자신이 만들어낸 영웅으로는 그 운명을 비틀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파슷.

어디선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빛의 폭포를 거슬러 솟구친 기류는, 하늘의 먹구름과 뇌해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빛의 폭포의 근원지는 그 너머에 있었다.

오래전 북부 에클라힘의 한 여관, 차리나와 만났던 꿈속에서 거닐었던 정원이었다.

“······.”

마치 거울에 비친 듯 위아래로 뒤집혀 보이는, 밑동이 잘려 나간 나무와 그 앞에 자리 잡은 우물의 모습.

사내의 말대로 빛의 기둥은 그 우물에서 뻗어나오고 있었다.

같은 광경을 올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수천 년 전에 그러했듯, 이번에도 결국 외부의 존재가 필요했지. 그게 네가 이 땅에 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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