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85화 (285/288)

285

귀환(1)

내가 이 땅에 떨어진 이유가 대체 뭘까.

그건 댈런이 설산에서 처음 눈을 뜬 이래,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두 번은 잃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이곳에서 얻은 소중한 인연들을 지키리라 확언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찾은 의미와 목표가 삶의 원동력은 될 수 있을지언정, 가장 근본적인 의문은 해결해줄 수 없었으니까.

‘누가 날 여기 데려왔는지, 항상 굼금했었지.’

제국의 만신전? 대지옥의 주인들? 비밀 마법 결사의 의식? 아니면 성기사단이 섬긴다는 전쟁신?

어쩌면 우연일 지도 몰랐다. 세상 만사가 다 운명론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뻔한 이유였군.”

전말은 의외로 시시했다. 흔한 삼류 소설, 혹은 소년만화에나 나올 법한 이유.

대신 세상을 구해달라니. 그것도 대한민국 방구석의 배불뚝이 아저씨에게?

수많은 세계선을 다스린다는 초월적인 의지라면서, 어지간히 손 내밀 곳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초월적인 의지쯤 되니까 손 내밀 곳이 없는 것도 당연한가. 댈런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잡생각들로 채워져갔다.

사흘 밤을 고민한 난제는 사실 답을 알고 나면 시시한 법이다. 답이 나와버린 인생의 고민 역시 비슷했다.

생각보다 허무한 답지 앞에서, 그 답과 이유에 대한 깊은 고찰보다는 상념들이 복잡하게 얽히기 마련.

‘그럴 거면 좀 더 팍팍 지원하기라도 하던가. 영문도 모른 채로 중세랜드에 툭 떨어뜨려놓고. 그대로 뒈졌으면 어쩌려고?’

온갖 전투와 고초를 겪고 강해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가진 힘만으로는 에낙사구스를 이길 수 없었다.

성검과 도끼는 부러졌고, 유물 무구 역시 대부분 잃어버린 상태.

댈라인의 권능과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능력치를 얻었지만, 에낙사구스 역시 강해지긴 매한가지였다.

‘다섯 대지옥의 세력을 규합했어. 댈라인이 직접 나선다 해도 그런 놈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무저갱에 가라앉으며 3인칭 관찰자처럼 미궁도시를 내려다볼 때, 저 멀리 지평선 근처에 자리잡은 에낙사구스를 확인했다.

비록 볼 수 있었던 건 흐릿하게 가려진 실루엣 뿐이었지만, 베일을 뚫고 번뜩이는 안광은 분명히 다섯 대지옥의 힘을 모두 품고 있었다.

본디 다섯 악신과 그 군세는 끊임없이 서로를 물어뜯고 견제하는 게 정상적인 흐름.

대대적인 침공 와중에도 악마들 사이의 국지적인 전투와, 그런 갈등을 대비한 서로 간의 경계는 끊일 줄을 몰랐다.

‘하지만 악신이 하나가 된 이상, 온전히 힘을 하나로 합치겠지. 단순히 힘이 다섯 배가 된 게 아니다. 그 이상이야.’

문자 그대로 코앞까지 다가온 종말을, 모니터 너머에서도 한 번을 이겨내본 적 없는 대지옥의 연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댈런은 턱을 긁적이며 사내를 바라봤다. 그러고보니 이미 한 번 세상을 멸망에서 구해낸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더군다나 전쟁신이며 전설 속 영웅이라는 그 역시, 대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존재랬었지.

“어쨌든 그쪽도 역천의 우물이 불러서 이곳에 왔다는 거군.”

“난 아니다.”

음? 방금은 저번처럼 외부의 존재가 필요한 거였다며?

댈런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릴 즈음, 사내는 말하지 않은 질문을 어깨 으쓱이며 답해주었다.

“역천의 우물이 도움을 요청한 건 맞다. 하지만 너의 경우와 달리 우물에게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힘은 없지. 난 직접 이 세상에 왔다. 이 땅의 힘 없는 거주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고 나 역시 선택해야 했지. 댈라인 그 아이가 네게 말한 것처럼.”

사내가 씩 웃었다. 송곳니가 드러나는 웃음은 일견 부드러우면서도 사나워 보였다.

“직접 보거라.”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내 그가 손을 가져다대고 있는 빛기둥 안쪽에서, 셀 수 없는 숫자의 장면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허억. 헉···뭔 놈의 약초가 이런 절벽에 달려 있어?]

처음 보인 장면은 약초꾼을 비추고 있었다.

약초를 캐며 대륙 곳곳을 다니다가, 오크 부족에게 붙잡혀 한 입거리 식사가 된 중년의 사내.

[쯧, 오늘 부수입은 짭짤하지가 않군.]

다음 장면의 주인공은 용병이었다.

마물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썰며 돈을 벌던 용병은, 금패로 승격한 다음날 눈 먼 화살에 맞고 명을 다했다.

제국 백인대장, 차르국 기사, 마탑의 제자, 나무꾼을 업으로 삼은 수도사.

수백에 달하는 장면은 각기 다채로운 인생을 담은 한 폭 그림이었다. 그리고 댈런은 그 인생들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었다.

‘내가 키운 캐릭터들.’

모니터 너머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보던 범인과 영웅들. 마우스와 키보드의 딸깍임으로 만들어진 주인공들.

댈런은 빛기둥 안쪽에 비친 장면들을 쉼 없이 훑어갔다. 셀 수 없는 장면들 중에 그가 키운 캐릭터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게임 캐릭터가 아닌 영웅들의 삶이었다. 설산에서 시작한 생애 대신, 누군가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인생들.

‘···저건.’

그 사이에 유독 눈길이 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선 땅과 하늘은 다른 장면들과는 조금 이질적인 배경이었다.

눈 덮인 동토. 두꺼운 털가죽 위주의 복색. 상업과 농경보다 사냥에 의존하는 사람들. 그리고 왠지 어색한 밤하늘.

‘시간대가 다른 건가?’

댈런은 별자리의 위치와 형태가 미묘하게 다른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의 놀라운 감각과 기억력은 언젠가 펠버가 읽던 두꺼운 천문학 서적의 그림 한 장을 불러왔다.

그건 근래 수백 년 별들의 움직임을 토대로,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의 별자리를 추정한 그림이었다.

책에 기록된 내용이 정확하다면, 그리고 그의 기억이 맞다면 저건 수천 년 전의 별자리라는 이야기.

댈런은 사내를 돌아봤다.

“설마 저거 당신이오?”

***

“······.”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빛의 기둥을 응시할 뿐.

깊은 회상에 잠긴 눈동자를 본 댈런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빛기둥 안쪽을 들여다봤다.

[아들이다! 울음소리 한 번 우렁차군!]

[축하한다, 유르칸!]

사내는 북부에서 나고 자란 전사였다.

왕이 있기는 하나 부족장들의 대표 정도이고, 중소규모 부족 단위로 흩어져서 살아가던 고대 북방인들의 사회.

사내가 태어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변방 부족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북방인들과 같이 사냥과 함정, 싸움에 능통한 전사로 성장해갔다.

낮에는 사냥. 밤에는 축제와 기술 연마.

서른이 될 때까지 그의 삶은 반복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지루한 반복 속에서도, 사내는 스스로의 비범함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따금씩 마을 밖으로 나와, 북쪽의 새하얀 동토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어이! 유르칸의 아들 하다쉬!]

[부족 최고의 전사님은 오늘도 땅끝만 보고 계신가?]

[모닥불 지폈으니 한 잔 하러 가야지, 마을 여자들이 너만 기다리고 있다고!]

친구들이 몰려와서 그를 마을 축제에 끌고 가기 전까지, 사내의 시선은 줄곧 땅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가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을 무렵,

그가 줄곧 지켜봐오던 북쪽의 새하얀 황무지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악마 군세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북을 울려라! 뿔나팔을 불어라!]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우리 땅을 지킨다!]

전쟁이 벌어졌다.

한 명 한 명이 숙련된 전사이자 사냥꾼인 북방인들은, 악마와 마물의 군세에 맞서 꽤 오래도록 전선을 펼쳤다.

부족 최고의 전사였던 사내 역시 전장에 나섰다.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으며 사내와 동료들은 날마다 더 강해졌다.

악마의 머리를 자를 때마다 내면의 신성 역시 점점 더 커져갔다.

정확히는 이미 그 안에 잠들어있던 신성이, 악의 수급을 취하며 서서히 깨어나는 것이었다.

[퇴각하라! 퇴각···커헉!]

[남쪽으로 내려가! 동맹군이 우리를 기다린다!]

허나 아무리 강력한 영웅이라 해도, 전쟁에서 혼자 승리를 가져오는 건 불가능한 법.

끝을 모르고 몰려오는 지옥의 군세에 밀려, 사내와 동료들은 살아남은 전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두고 온 고향은 쑥대밭이 됐다. 남쪽의 인간 국가들과 산맥 안쪽 난쟁이들의 왕국, 수인들의 영역 역시 전란의 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수백만이 넘는 생명이 지옥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셀 수 없는 이들이 고향을 잃었다.

그즈음 사내의 무력은 맨 손으로 악마의 골통도 쉽게 부술 정도까지 성장했다.

그에 못지않은 무위를 뽐내는 영웅들 역시 하나둘씩 그의 동료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크즈즛! 북쪽의 불길을 막아라! 크즛!]

다음 순서가 자신들임을 눈치챈 남부 대수림의 리자드맨 교국이 거대한 군대를 북진시켰다.

[대륙의 악을 정벌하러 왔습니다. 인도적인 지원품도 함께 챙겨왔으니, 피난민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배분해주시길.]

바다 건너편의 엘프들 역시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고 대대적인 지원군을 파견해왔다.

모래바람 왕조의 파라오가 서부의 본토에서부터 직접 근위군단을 이끌어왔고, 난쟁이들은 규율을 깨고 지하 깊은 곳의 기관장치들을 병기로 전환시켰다.

끊임없이 갈등을 겪던 수인과 인간이 뭉쳤다. 북방인들은 고향 잃은 복수심으로 칼날을 갈았다.

연합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고, 필멸자들의 영토는 다시금 천천히 수복되어갔다.

대륙 중부와 북부를 다시금 손에 넣기까지는 거의 십 년에 달하는 시간이 소요됐다.

그리고 십 년째 되는 해, 연합군은 북방인들의 땅을 넘어 대륙에 강림한 악신들의 본진 앞까지 진격했다.

***

휘이이이······.

눈보라가 시야를 가린다.

고작 수 미터밖에 되지 않는 가시거리.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과 그 아래의 동토.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연합군은 행진하고 있었다.

“크즈즛.”

“푸흐으···.”

새하얀 입김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삼만에 달하는 연합군의 종족은 그야말로 다채로웠다.

리자드맨과 수인, 엘프와 난쟁이, 인간과 하이 오크, 북방인과 사막인.

거대한 공룡 위에는 도마뱀인간들이 활을 들고 올라타 사방을 경계하고, 그 곁에서는 체고 십 미터가 훌쩍 넘는 삼족보행 기관장치가 삐그덕거리며 눈보라를 뚫고 나아간다.

모래바람 왕조 골렘들의 보석 눈알은 추위 속에서도 제각기 다른 색깔로 번뜩였다. 그들 대부분은 하이 오크의 식량 수레를 끌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수십 가지 깃발들. 대륙의 각 세력이 자신들의 운명을 걸고 파견한 영웅들은, 그들 답지 않게 조금씩 긴장한 기색이었다.

“···크흠!”

“후우. 후우.”

이들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들이 지면, 그 다음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최정예 전력을 잃은 연합은 밀고 내려오는 악신들의 군대를 다시 몰아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기껏 수복한 고향은 쑥대밭이 될 테고, 가족과 친구들은 도살당해 악마의 식탁 위에 올라가겠지.

“······.”

“······.”

하지만 말 없는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을 압도하는 투지와 믿음 역시 깃들어 있었다.

수만 쌍의 시선이 바라보는 건 한 사내의 등이었다.

검과 도끼를 들고 연합군의 최선두에서 걸어가는 사내.

이 미터 남짓 되는 큰 키. 떡 벌어진 어깨와 돌덩이 같은 근육들.

길게 기른 머리칼과 수염에는 하얀 눈이 엉겨붙고, 곳곳이 헤진 털가죽 갑옷 아래로는 흉터가 가득했다.

스윽.

앞장서서 나아가던 사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는 검을 쥔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면을 쓸어버릴 듯 불어닥치던 눈보라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후우우웅······.

서서히 내려앉는 새하얀 눈발.

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지옥의 군세였다.

수백만의 마물과 수천에 달하는 악마. 네 악신이 직접 이끄는 대지옥의 병력.

“연합군, 앞으로.”

몸이 굳은 연합군의 영웅들 앞에서, 사내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등을 바라보는 영웅들은 알고 있었다.

저 등에 가득한 흉터가 얼마나 많은 전장을 거쳐왔음을 의미하는지.

뽑아든 검과 도끼는 또 얼마나 많은 마물과 악마의 수급을 베어왔는지.

“···앞으로! 하다쉬를 따르라!”

“기관장치 전투 태세!”

“적을 섬멸하라! 악을 지워버려라!”

스스로 뱉은 말을 스스로 지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영웅들 역시 그 발자취를 쫓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수천 년 전 대륙의 운명을 바꿔놓았다는 대전쟁.

그 마지막 전투는 그렇게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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