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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86화 (286/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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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2)

“그곳에서 나는 동료들과 싸웠지. 전투는 며칠 낮과 며칠 밤 동안 이어졌다.”

연합군과 지옥 군세가 충돌하는 전장을 배경으로, 사내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스며들었다.

장면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평선에서 솟아오른 해가 중천에 오르고, 다시 반대쪽 지평선으로 넘어가며 어둠이 사위를 뒤덮었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영역의 광채에 달과 별이 빛을 잃었다.

사방에 열린 지옥문에서는 현실을 일그러뜨리는 마력이 쏟아졌다.

사내는 전장의 중심에서 싸웠다. 한 순간의 쉼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깡!]

도끼가 먼저 부서졌다.

[쨍강!]

머지않아 검도 부러졌다.

무기를 잃고 나서는 쓰러진 동료나 적들의 병기를 쥐고 싸웠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었을 때는 맨손으로 악마의 두개골을 으스러뜨렸다.

칠 일 낮밤을 내리 싸우며 흰 동토는 검붉게 물들었다. 수백 악마를 도살한 사내는, 마침내 네 악신의 화신체까지 모조리 쓰러뜨렸다.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사명은 완수했다. 자격을 얻은 이상 원한다면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승산은 이미 기울었다.

사내가 없더라도 연합군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테였다.

술사들의 활약으로 지옥문은 절반 이상이 닫혔고,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악마와 마물들 역시 기세가 한 풀 꺾인 상태.

아군의 사상자 역시 물경 일만을 넘어갔지만, 그들만으로도 마물들을 처리하고 남은 지옥문을 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다쉬! 하다쉬!]

[악마들을 도살한 전쟁의 신을 경배하라!]

[대선조를 위해! 우리는 먹고 싸운다!]

연합군은 사내를 칭송하기 바빴다.

그럴 만했다. 사내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투신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깊은 내면에서부터 끓어올라 마치 불꽃처럼 전신을 휘감고 타오르는 신성.

수많은 마물과 악마를 쓰러뜨리며 신위를 초월해, 그 자체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사방에 퍼뜨리는 위계의 격.

허나 환호하고 경배하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사내는 말할 수 없는 고민에 잠겼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악신들의 본체를 죽이고 그들의 대지옥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지금의 승리는 짧은 평화만을 가져다줄 뿐이라는 것을.

“내가 떠나도 전우들은 이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겠지. 허나 힘을 회복한 악신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대륙의 경계를 침범해올 테였다.”

길어봐야 수백 년. 짧으면 한 세대가 채 가기 전.

다음 침공 때 자신은 승천하고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대륙은 다시금 불바다가 될 테였다.

이대로 모두의 환호를 등에 업고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제 굴에 숨어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악신들을 상대로, 지친 몸을 던져가면서까지 싸움을 마무리지을 것인가.

[···후우.]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가벼운 한숨을 한 번 내쉰 사내는, 연합군의 환호성을 뒤로 하고 홀로 앞으로 내달렸다.

[어, 어어!]

[하다쉬! 갑자기 어디로···!]

“고향이 그립지 않았던 건 아니다.”

장면 밖에서 사내가 말했다.

댈런은 그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북방인들이 영원궁전이라 부르는 장소이자, 하이 오크 전사들이 투쟁 끝에 죽으면 도달한다고 알려진 하늘 성소.

혹은 성기사단의 교리에 천국이라 묘사된 장소겠지. 어느 곳이든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 영웅! 감히 맨몸으로 덤벼들다니···!]

장면 속 사내는 살아남은 악마들 중 가장 강해보이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지친 몸으로도 원했다면 놈을 맨손으로 으스러뜨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사내는 그러지 않았다.

[콰작! 으지직!]

그저 저항 없이 악마의 손톱에 육신을 내맡겼을 뿐.

강철보다 단단한 그의 육신이 찢겨나가고, 붉은 피가 흰 대지 위에 쏟아졌다.

[하, 하다쉬!]

[기관장치 진격! 전쟁의 신을 구해라!]

흐릿해져가는 시야 너머에서 들려오는 동료들의 비명과 절규.

[흐흐흐, 대지옥의 네 주인이시여,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곧 흡족해하실 만한 제물을 바치겠사옵니다.]

악마의 비릿한 웃음소리를 뒤로, 사내의 시야가 암전했다.

***

“···뭐야, 이대로 뒈지셨소?”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지.”

“뒈지면 뒈진 거지 겉으로 보기에는 또 뭐요?”

“참을성이라는 걸 좀 가져보거라. 한국 사람들 성격 급한 건 알고 있다만.”

“······.”

하다하다 남의 나라 가지고 지랄이네. 말보다 머리에 도끼 꽂는 게 빠른 북방인들 성격은 안 급하고?

한 마디 쏘아붙일까 하던 차에 장면이 확 밝아졌다. 붉고 누르스름한 시야. 눅눅하게 달라붙는 독성 연기.

“···지옥?”

화면 너머에서만 수백 번, 이 땅에서도 몇 번이나 경험했기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알던 지옥들과는 좀 다르지만, 사내가 눈을 뜬 장소 역시 악마가 지배하는 영토들 중 하나였다.

“맞다.”

곧바로 돌아오는 긍정. 그리고 가속되는 장면 속 시간.

[인간 영웅을 제물로 바치면, 공석이 생긴 대악마 자리쯤···끄아아악!]

사내는 그를 죽인 악마의 손아귀를 찢어발기고 나왔다. 육신이 부서지고 남은 건 영혼뿐이었지만, 위계 자체를 초월한 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 제단···내 보금자리가···!]

사내를 죽인 악마의 지옥은 몇 시간만에 무너졌다. 사내는 곧장 제단에 연결된 통로를 따라 다음 지옥으로 건너갔다.

점점 더 가속되는 장면이 기나긴 싸움을 담아냈다. 악마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수많은 지옥들을 하나씩 부수고 다니는 여정이었다.

“······.”

하루가 지났다. 다섯 개의 지옥이 소멸했다.

한 달이 흘러갔다. 살해당한 악마의 숫자가 백을 훌쩍 넘어갔다.

환상세계의 시간 관념은 지상과 달랐다. 천 년이 하루일 수도, 하루가 천 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내가 느끼는 시간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계절이 바뀔 시간이 몇 번이고 스쳐가고서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인간 영웅! 허락되지 않은 곳에 발을 들이다니!]

알 수 없는 시간 끝에, 사내의 발걸음은 마침내 대지옥에까지 닿았다.

악신들을 이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잃어버린 육신 따위, 지금껏 수백 수천의 지옥을 무너뜨리며 획득한 신성으로 충분히 복구하고도 남았으니까.

“대지옥을 소멸시킨 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 그게 이 땅 사람들이 승천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사내가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댈런은 문득 눈길을 돌렸다.

무너진 지옥의 정경을 비추는 장면 곁으로, 사내가 죽은 지상의 전장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악마들이 소멸한다!]

[지옥문이 저절로 닫히고 있어!]

[전쟁의 신께서 살아계신 게 분명하다. 직접 지옥으로 내려가셔서 악마 놈들의 본체를 쓰러뜨리고 계신 거야!]

사람들은 환호하고 있었다. 그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사내의 죽음이 허망한 결말이 아니었으며, 그가 지옥에 직접 내려가 악마와 악신들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이날을 되새기는 것도 참 오랜만이구나.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궁금한 게 있소.”

“뭐냐.”

“어차피 돌아갈 거면 왜 싸우신 거요?”

댈런은 눈썹을 슬쩍 들었다. 어쨌건 싸움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사내는 결국 승리의 결실을 맛볼 수 없었다.

그는 곧장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지상에 남은 육신은 찢겨진 그대로였고, 전쟁이 끝난 뒤의 개선식에서 그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왜 싸우냐라. 좋은 질문이구나.”

사내가 웃었다. 그는 허리띠에 손을 꽂은 채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빛기둥에서 눈을 뗀 댈런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검은 눈에 검은 머리. 큰 키와 단단한 몸뚱이.

사내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외로움만큼이나 강하기도 했다.

“에낙사구스를 이길 힘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렇소.”

“힘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해야 하지. 남겠느냐, 아니면 돌아가겠느냐.”

그 고독과 강인함이 어째서인지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침묵에 잠긴 댈런을 향해 사내가 재차 입을 열었다.

“같은 질문을 곁들이도록 하겠다. 내게 왜 싸우느냐고 물었지.”

검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그가 물었다.

“네가 지금껏 싸워온 이유는 무엇이냐?”

***

“···아직 싸울 수 있어.”

루시아는 가쁜 숨을 뱉었다. 비릿한 혈향과 끈적한 단내가 동시에 입안에 멤돌았다.

휘리리―!

손을 들어올리자 성검이 허공에서 간결한 호선을 그렸다. 순식간에 수십 차례 허공을 난도질하고 목표를 향해 내리꽂히는 순백의 성검.

[크아아아악!]

다리가 죄다 잘려나간 채 심장에 검이 꽂힌 지네 형태의 악마가 괴성을 질렀다.

인간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괴이한 비명에 땅이 쩍쩍 갈라지며 보랏빛 독기를 뿜었다. 진체로 강림한 상급 악마의 비명은 그 자체만으로 주문이었다.

“전쟁의 신이시여···!”

물론 그 주문은 신성력의 벽을 뚫지 못했다.

기적으로 독기를 막아낸 루시아는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그 단조로운 손짓에 성검의 물결 문양이 백색 불길을 토했다.

주문이나 다름없던 악마의 비명은 그로서 유언이 되었다. 단마의 백염에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악마를 바라보며, 루시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미궁도시가 공격받은 지 보름째였다.

고작 보름만에 연합군은 백금 거리까지 밀려났다.

도시 연합, 길드 연맹, 차르국과 동부 삼왕국, 황가와 만신전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제국 귀족파까지.

대륙의 온 왕국이 힘을 모았음에도 악마 군세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간만이 아니라 엘프를 비롯한 이종족들의 힘까지 모았는데도 그랬다.

적어도 세 달은 버틸 거라는 금강궁의 예상과 달리, 보름이 지난 지금 사실상 최후의 보루인 백금 거리마저 함락 직전의 상황.

다섯 대지옥의 힘이 하나로 뭉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악신을 전부 흡수한 에낙사구스는, 각 지옥의 권세를 적재적소에 능숙하게 써먹을 줄 알았기 때문.

“···조금만 더 빨리 알았어도.”

적어도 최소한의 대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그 대비가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쨌든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루시아는 이를 악물고 손을 들어올렸다.

찌직―

악마의 심장에 꽂혀있던 성검이 비틀리며 뽑혀나왔다. 재빠르게 돌아와 주인의 손에 안착하는 성검 레레도나텔.

콱!

떨리는 팔로 검을 바닥에 찍고, 지팡이처럼 의지해 일어선다.

마지막까지 꿈틀대던 악마의 시체는 서서히 움직임이 멎어가고 있었다.

루시아는 자연스레 몸을 점검하고 사방으로 감각을 곤두세웠다.

“···썩을.”

당장 근방 몇 블럭 안쪽에 감지되는 것만 셋이었다. 각자 저마다의 정예 마물 군단을 이끈 중급 이상의 악마들.

마탑 연합의 마법사들과 백금 기사단의 잔여 병력이 놈들을 가로막고 시간을 끄는 중이었다.

문제는 시간을 끄는 대가로 기사와 마법사들이 도륙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체로 강림해 고위 마물들의 지원을 받는 악마는, 초월자가 아닌 이상에야 어찌하기 힘든 재해나 다름없었으니까.

“버텨내야 해. 댈런이 올 때까지.”

습관처럼 중얼거리며 다리를 움직인다. 신성 문신이 위태롭게 빛을 뿜어내고, 한 걸음 도약에 건물 너덧 층 높이로 솟아오르는 고위 성기사의 육신.

반파된 건물을 넘어 순식간에 탁 트인 시야에 도시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붉은 정경이 비쳤다.

무너지고 불타는 거리. 곳곳에 낭자한 피와 육편.

그 모든 참상 위에 붉은 음영을 장막처럼 드리우는, 핏빛으로 새빨갛게 물든 하늘과 태양.

쿠구구구······.

악신 에낙사구스 아래 하나가 된 대지옥이, 함락된 미궁도시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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